426화 춘계에서 대놓고? (1)
“이거…… 이거 누가 낸 거라고 했지?”
내과 학술 이사가 프린트해 둔 종이 쪼가리를 흔들었다.
통합진료센터 운영의 성과라는 제목이 쓰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그래서 학술 위원들은 조심스러웠다.
학술 이사를 맡고 있는 아선 병원의 김태형 교수도 물론 시니어이긴 하지만.
이현종은 이제 곧 원로급이지 않은가.
나이로만 밀어붙이는 사람도 아니었다.
이루어 놓은 업적으로 비교하면 반칙이라는 소리가 나올 만큼 말도 안 되었다.
“그, 이현종 교수님입니다.”
“이현종? 내가 아는 그 이현종 교수님?”
“네.”
“아니……. 연세가 드시면서 노망이 드셨나?”
아선과 태화는 언제가 됐건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라이벌 구도도 아니었다.
태화가 홀로 최고의 자리에 올라 있어서였는데, 이제는 딱히 그렇지도 않게 된 지 오래였다.
그래서 더더욱 사이가 안 좋아진 데다가 최근 이현종에 대해 도는 소문 때문에 조금 격한 말이 나오고 말았다.
“아니, 이건 실언이고.”
해서 급히 주워 담으려 했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이미 이현종이 심어 둔 프락치 중 하나가 문자를 보내고 있는 참이었다.
말을 그대로 옮기면 싸우란 얘기니 좀 순화하긴 했지만, 하여간 별로 호의적이진 않더라 뭐 이런 내용이었다.
“이거…… 규정에 어긋나지는 않나?”
김채형 학술 이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질문을 던졌다.
춘계 학회면 그래도 제일 공식적인 자린데 여기서 이런 광고가 되냐 뭐 이런 얼굴을 하고서였다.
그러자 역시 이현종 측, 정확히 말하면 태화 출신인 학술 위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도 검토해 봤더니 새로운 개념의 센터 같은 경우엔 경험을 나눌 수 있습니다.”
“새로운 개념이라. 새롭기는 하네. 통합진료센터가 대체 뭐야?”
“초록만 보내서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협진 센터 같습니다.”
“그건 원래 있는 거 아닌가? 각 과별로 운영하잖아?”
“이건…… 그 협진 센터로 해결이 안 되는 환자를 보는 개념 같습니다. 내과 환자만 보는 것도 아닌 거 같고…….”
“그게 되나?”
내과 환자만 보는 게 아니란 말에 김태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 전 아선에서 있었던 회의를 떠올리면서였다.
아득한 선배인 자신을 제끼고 기조실장이 된 우창윤의 말이었다.
‘학회 발표도 압도해야 합니다. 각 교수님들 이번 학회는 신경 써서 무조건 1인 1강의는 내 주셔야 합니다.’
고깝게 들렸지만 뭐라고 하기도 그런 게 우창윤은 무려 3개나 낸 참이었다.
‘망할 놈.’
때문에 학술 이사 체면에 질 수는 없는 노릇이라 3개 맞추느라 어찌나 고생을 했는지.
하여간 학회 강연 자리는 정해져 있어서 아선이 많이 하려면 다른 곳 강연을 줄여야 된다는 뜻이었다.
작은 병원 쪽을 줄이는 건 어려웠다.
원래도 적은 강연인데 거기서 더 줄이면 불만이 터져 나오지 않겠는가.
그러니 칠성과 태화 측을 건드려야 했는데, 이쪽도 칼을 갈았나 어쨌나 만만치 않은 주제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나마 이게 좀 이상하다 싶어서 자르려고 했더니만 이현종이었다.
‘이현종 강연을 자른다…….’
현재 대한내과학회 내에서의 이현종의 위치는 어마어마했다.
아마 그가 강연 자리에서 내내 재채기만 하고 들어간다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이 거의 없지 않을까?
근데 나름 규정에도 어긋나지 않은 제목의 초록을 냈는데 잘라?
원로들에게 불려 가는 물론이거니와 아주 여러 사람에게 구차한 설명을 이어 나가야 할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걸 그랜드 볼룸에 넣는 건 좀…….”
“저도 그건 그렇게 생각합니다. 근데 이현종 교수님 의사가 워낙에 강하셔서요.”
“따로 얘기를 했어? 그건.”
“아뇨, 아뇨. 그건 아니죠. 이현종 교수님이 그렇게 생각 없는 분은 아니시지 않습니까?”
“음.”
가끔 생각 없이 굴기도 하지 않나.
뭐 이런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굳이 내뱉지는 않았다.
말실수는 하루 한 번이면 족했다.
“건너 건너 들리는 말이 그렇다는 거죠. 실제로 성과가 되게 좋다는 말도 있고.”
“건너 건너? 자네 태화 출신이라고 너무…….”
“에이. 그럴 리가요. 저 태화에서 나온 지가 언젠데.”
“음. 아무튼……. 그래, 그랜드 볼룸…… 30분짜리 강연이니까 그냥 둬. 대신 시간을 둘째 날 오전 첫 세션으로 밀지. 그러면 말이 안 나올 거야.”
“아.”
“왜.”
“아뇨, 아닙니다.”
학회라는 게 당연히 공부하는 자리이기는 했다.
하지만 공부만 하는 자리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었다.
더욱이 국내에서 가장 커다란 학회, 즉 내과 사람들이라면 대부분이 모이는 춘계 학회는 더더욱 그러했다.
간만에 모이는 만큼 동문회도 겸사겸사해서 열리고 마음 맞는 교수들끼리 따로 사모임이 생기기도 했다.
당연히 둘째 날 아침은 숙취로 인해 참여율이 가장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감히 원로에 가까운 교수 강연을 여기에 집어넣는 건 일종의 도전이지만, 대놓고 광고하는 걸 어찌 황금 시간에 넣을까.
학술이사 김태형은 그런 생각을 하며 슥 기입해 넣었다.
“미친놈이.”
당연히 그 사실은 거의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이현종에게 전달되었다.
윗사람들한테는 개겨도 아랫사람들 챙길 때는 또 화끈하게 챙기는 사람이지 않은가.
일단 의국 내 폭행을 없앤 사람이라는 점에서 가까운 태화 후배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 이유였다.
물론 세심하지는 않아 놓치는 경우도 많은데 그건 신현태가 챙겨 주었다.
“왜요?”
“이것 좀 봐라. 김채형 이 새끼 이거.”
“애 있는 데서 자꾸 욕하지 말고요.”
“일단 보라니까?”
“아……. 음. 욕 나올 만하기는 하네.”
“그치? 학회 가면 나 찾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아침 첫 시간에 넣어 놔? 사교 모임도 하지 말라는 거 아냐.”
“근데…….”
잔뜩 뿔이 난 이현종을 보던 신현태는 간신히 자업자득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조금 힘들었지만 그래도 해냈다.
촐싹댄 것은 최근 부쩍 더 친해진 조태진이었다.
“광고니까 그렇죠.”
“이 새끼가, 광고가 아니라니까?”
“광고…… 아니에요?”
“그래. 해 보니까 정말 좋아서 권유하는 거 아냐.”
“다른 병원에서도 하라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 병원에 보내라는 거…… 아니에요?”
“당연하지. 다른 병원에 나나 수혁이 같은 사람이 있어? 없으면서 이런 거 하면 사기지, 그건.”
“음.”
당연하게도 불같이 혼나고 입을 다물었다.
의미 있는 조언을 한 것은 수혁이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수혁에게만큼은 이현종도 화를 내지 못해서였다.
“그래도 아빠, 뭐라고 하지는 마세요.”
“왜? 화가 나는데.”
“아침이기는 해도 그랜드 볼룸이잖아요. 학회 관련 사람들은 무조건 올 거고……. 그렇게 적지는 않을걸요.”
“그건…… 그건 그렇긴 하지.”
아니, 화를 내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수그러들 지경이었다.
참으로 대단한 위력이라 할 수 있었다.
“근데 발표 준비는 잘 되어 가세요? 제가 좀 도와드려요?”
“응? 아니, 도와줄 필요 없어. 다 놀라게 해 줄 거야.”
“아.”
바로 그 점 때문에 봐준다는 건데, 수혁조차도 차마 이 말은 하지 못했다.
대신 신현태가 나섰다.
후배로서가 아니라 원장으로서였다.
“너무 놀랄까 봐 그러지……. 내용만 볼게요. 돕지는 않고.”
“그럼 안 놀라게 되잖아.”
“아니, 어떤 식으로 하려고요. 여태 이런 적 없었잖아.”
“응, 정말 새로운 형식의 발표가 될 거야. 의사들 학회에서든 여지껏 본 적 없는 그런…….”
“그러…… 그러지 말라고.”
“싫어.”
“하.”
애가 떼쓰는 것도 보기 힘들지만 다 큰 성인이 떼쓰는 건 보기 힘든 정도를 넘어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 대상이 화를 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럼 난 간다.”
“아.”
이현종은 그렇게 여러 사람의 복장을 뒤집어 놓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아무도 붙잡지는 않았다.
어차피 학회가 곧인데 지금 잡아봐야 뭐 어쩌겠는가.
게다가 방금 말하는 투로 봐서는 그 누가 말을 해도 들어 먹지 않을 거 같았다.
이런 면에 있어서만큼은 또 쓸데없이 고집이 세기 때문이었다.
“과장님 부르자.”
해서 신현태는 다른 식으로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김문재 과장은 금세 불려왔다.
신현태는 목이 메는지 잠시 물을 먹고는 말을 이었다.
“의국장이랑 전공의 전체에게 이 말 좀 전해 주세요.”
“뭐라고 할까요?”
“불러서 저 시간 강의실…… 최대한 태화 애들로 채우자. 뭔 얘기가 나와도 우리 애들이 주로 들으면 괜찮겠지.”
“아, 이현종 교수님 강의 때요? 저도 들었습니다. 통합진료센터가 진짜 좋은 센터긴 해도 그걸 학회에서 얘기하는 건 그렇다 생각했는데……. 묘수네요. 어떻게 그런 방법을 생각해 내셨어요?”
“부러워요?”
“네.”
“이현종 교수님하고 20년만 같이 둘이 붙어 다니면 다 이렇게 됩니다.”
“아……. 네.”
김문재 교수는 갑자기 하나도 안 부러워졌다는 얼굴로 총총 사라졌다.
그리고 신현태가 당부했던 말을 모두에게 전했다.
그렇게 모두가 춘계 학회에 대해 나름의 대비를 하는 사이, 시간은 흘러 학회 당일이 되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태화 의료원 내과는 버스를 몇 대 대절해 학회장으로 향했다.
춘계는 늘 서울 내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지기에 장소에 대한 설렘은 전혀 없었다.
특히 직급이 위로 갈수록 그랬다.
벌써 여러 번 와 봤는데 뭐가 특별하겠는가.
‘근데 떨리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현종 때문이었다.
대체 어떤 강의를 준비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출발도 따로 했다.
혹 버스 안에서 잠들 경우 USB를 탈취당할까 두렵다는 이유를 들면서였다.
이현종은 알고 있을까?
그 말을 들은 신현태가 얼마나 가슴이 서늘해졌는지.
“후.”
“걱정 마세요. 설마 아빠가 이상한 짓 하려고요.”
옆에 앉아 있던 수혁이 신현태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평소라면 웃음이 나왔겠지만, 지금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넌 형 알면서 그런 말이 나오냐?”
“실은 저도 불안해서 그냥 해 본 말이에요.”
“하긴 넌 당사자지…….”
“그러니까요.”
“가서 쥐 잡듯이 뒤져 보자. 잡아서 봐야겠어.”
“네, 그러죠.”
둘은 정말로 학회장에 도착하자마자 강의 듣는 시간 빼놓고는 죄 이현종을 찾는 데 허비했다.
하지만 이 노인네가 어찌나 신출귀몰한지, 태화 사람 아닌 사람한테만 얼굴을 들이밀고는 제보가 들어오는 즉시 사라졌다.
결국, 둘이 이현종을 다시 대면한 것은 학회 둘째 날 아침 그랜드 볼룸 안에서였다.
그것도 마주한 것이 아니라 강단 위에 서 있는 이현종을 바라봐야만 했다.
“다음은 태화 의료원 이현종 교수님의…… 음. 이게?”
“제목 맞아요, 읽으시죠.”
“아……. 네. 초록이랑 달라져서. 음. 네. 어……. 네. 그 제목이…… 당신이 모르는 환자가 있다면 반드시 태화 의료원 통합진료센터로 보내야 하는 이유…… 입니다. 이것에 대해 그, 이현종 교수님의 발표가 있겠습니다. 바, 박수로 맞이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