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화 춘계에서 대놓고? (4)
2차 병원급 과장들과의 대화는 성공적이었다.
모든 2차 병원 과장들이 호의적으로 나온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태화 출신이거나 아선, 칠성 출신이 아닌 이들에게는 반응이 좋았다.
뭐가 되었건 어려운 환자를 봐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라도 뒤에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않은가.
“저, 혹시.”
그들에게도 좋은 일인 만큼이나 태화에도 좋은 일이었다.
뭐가 되었건 이 센터는 다른 병원들과의 차별점이 되어야 할 테니.
해서 이현종은 아까 대화를 떠올리며 후후 웃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머리가 짧은, 젊은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누가 봐도 군인이었다.
“응? 왜?”
이현종은 뭐지 하는 얼굴이었으나, 어찌 되었건 기분이 좋았던 탓에 까칠하지는 않게 반응했다.
아득히 어린 의사에게는 그조차 무서운 일이었지만.
하여간 군의관은 용기를 내 말을 이어 갔다.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국군 수도 병원 내과 군의관 최나연입니다.”
“어어, 최나연 선생. 반가워. 여기 군대 아니고 학회니까 군기는 좀 빼도 될 텐데. 1년 차야?”
“네, 그렇습니다.”
“군펠 했구나. 뭔 훈련을 그렇게 열심히 받았대.”
이현종이 군대 다녀올 적만 하더라도 장교는 거의 신이었다.
그나마 중위까지는 학사 장교니 뭐니 해서 좀 흔했지만, 대위부터는 중대장급으로 대우를 받지 않던가.
그중에서도 군의관이라고 하면 그 누구도 건들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현종은 그때 생각을 하며 군의관의 말을 받았다.
물론 지금 군의관은 그리 널럴하지 않았다.
사회가 많이 바뀐 탓이었다.
“아, 네. 열심히 해야죠. 하하.”
“그래, 뭐. 근데 왜? 국군 수도 병원은 원래도 업무 협약이 되어 있을 텐데?”
이현종은 너무 군인 티가 나는 군의관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말한 대로 국군 수도 병원은 태화와 업무 협약이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인 병원 수준의 협약도 아니었다.
군 병원에 대한 인식이 별로란 것은 국방부도 다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한 대응의 일환으로 군의관들은 각자 자신이 나온 병원 교수들에게 수술이나 진료 지원을 요청할 수 있었다.
아주 어려운 케이스인 경우, 대학 교수가 군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해 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너무 바쁜 몸들이라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지만, 하여간 그랬다.
“아, 네. 그렇긴 한데…… 이게 좀 애매한 케이스가 있어서요.”
“애매한 케이스?”
애매하다는 말에 이현종이 눈을 빛냈다.
뿐만 아니라 사람 상대하는 일에 뒤로 물러나 있던 수혁도 가까이 다가왔다.
보통 전문의가 쓰는 애매하다는 말은 어렵다는 말이나 진배없어서였다.
[자기가 그 질환을 아는지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위험하지는 않나 본데.’
[그렇겠죠.]
바이털이 흔들리고 있다면 민간 병원으로 보내는 것도 별문제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게 아닌데 모르겠는 경우는 이게 참 어려웠다.
뭐가 되었건 군인이라면 군 병원에서 치료받는 건 무료이지 않은가.
한데 나가게 되면 돈이 나갔다.
무엇보다 몸이 우선이니 민간 병원에 가면 되지 않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군의관으로 있다 보면 가정 형편이 너무도 어려운 친구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런 경우엔 최대한 군 병원에서 해결을 보려 애를 써야만 했다.
역량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래야 했다.
“어떤 환잔데? 길어질 거 같으면 여기 앉지.”
이현종은 강의실 밖에 커피나 과자 등이 놓여 있는 테이블로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본격적으로 도와주려는 그의 모습에 군의관이 고개를 숙였다.
과연 괜히 명성이 드높은 게 아니로구나 싶었다.
‘대체 왜 우리 과장님은 이런 훌륭한 사람을 욕했을까?’
칠성 출신인 그로서는 쉬이 이해가 안 갔다.
‘아……. 체면만 아니면 물어보는데…….’
칠성도 훌륭한 병원인데 왜 그쪽에다 안 묻는고 하면,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의국 내에서 자유로운 질문이 허락되는 건 대개 레지던트까지가 끝이었다.
그중에서도 좀 까다로운 교수들은 1, 2년 차까지로 제한하기도 했다.
이후론 네가 알아서 공부해야 된다는 생각 탓이었다.
물론 그런다고 물어봤는데 답을 안 해 주진 않지만, 아 이 자식은 공부 안 하는 게으른 놈이구나 하는 생각을 심어 줄 수 있었다.
특히 너무 쉬운 케이스라면 더더욱 그랬다.
교수도 모를 케이스면 뭐 오히려 질문한 게 플러스가 될 수도 있겠으나 지금은 그런 케이스인지 뭔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군의관은 이런저런 계산을 정리하고는 말을 이었다.
“이, 이래도 될까요? 아까 강의를 보고 드린 말씀이기는 한데…….”
“뭐 의사가 환자 모르겠다는데 도와줘야지. 괜찮아, 나도 모를 때 많이 그랬어.”
“교수님도 그럴 때가 있었습니까?”
“인턴 때 그랬지. 레지던트 이후로야 뭐……. 교수들도 나만 못하더라고.”
“아, 네.”
그러다 문득 왜 과장이 싫어하는지 알겠단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래, 해 봐.”
“네. 교수님. 일단 환자는 두통을 주소로 내원했습니다.”
“두통이라.”
“음, 두통.”
이현종과 수혁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된 호소 증상이 두통인 경우, 그러면서 내과 질환이 의심될 경우 대개는 어려운 케이스로 귀결되기에 그랬다.
군의관은 그런 둘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현종 교수님이야 그렇다 쳐도……. 이 사람은 어린데.’
군 펠로우를 했기에 나이도 경력도 수혁보다 위였다.
게다가 칠성에서 수련을 받은 터라 수혁에 대한 소문은 의도적으로 어느 정도 차단이 된 상황이었다.
애초에 전공의 생활이나 펠로우 생활이 다른 병원 소식에까지 신경 쓸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건 아니었다.
‘뭐……. 아들이니까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역시나 티를 내지는 않았다.
지금은 부탁하는 입장인 데다, 하늘같이 높은 사람을 눈앞에 둔 마당이어서였다.
눈치가 없는 사람도 수련받다 보면 눈치가 생기지 않던가.
군의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살이고. 1차 신검에서 수축기 혈압이 170이 나왔는데……. 본태성 고혈압으로 진단되어 약 복용 중입니다.”
“약 뭐?”
“칼슘채널 블로커입니다.”
“아……. 그래서?”
“약 먹고 3개월 후 재검했더니 일단…… 150에 85가 나와서 현역 입대했습니다.”
“그래? 그 정도도 군대를 가야 해? 왜 이렇게 빡빡하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이현종은 본인 현역일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일단 수축기 170이 나왔으면 면제거나 방위였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은 현역으로 갈 인구 자체가 부족해 기준이 많이 내려온 상황이었다.
이를 모르는 이현종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혁 또한 애초에 면제였기에 군 신검 기준은 하나도 모르기에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1년 정도 복무하던 중 두통이 있다고 하여 사단 의무대를 방문했습니다. 그때 혈압이 220에 120이었습니다.”
“220? 이런 미친. 약은 먹었고?”
“물어보니까…… 약을 제대로 먹질 않았습니다.”
“왜?”
“그건…….”
그걸 군의관이 대체 어찌 안단 말인가.
환자가 그냥 자의로 안 먹은 건데.
하지만 이현종은 한심하단 얼굴이 되었다.
‘이 자식 태화 출신 아니지?’
‘네, 칠성 출신이에요.’
‘왜 나한테 묻는지 뻔하네.’
처음과는 달리 대화를 나누다 보니 출신이 보여서였다.
일단 태화 출신이라면 그걸 밝히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얼굴도 좀 낯익을 것이고.
한데 이놈은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 칠성 놈들이 기웃거릴 땐 얼굴을 가리기까지 했다.
“어디서 수련을 받았길래 환자 파악이 이래.”
해서 시비를 걸었다.
군의관 입장에서는 피할 수도 맞설 수도 없는 시비였다.
“그, 죄송합니다.”
“계속해 봐.”
“네. 그…… 사단 의무대 검사에서 그렇게 나와서 수도 병원으로 진료 의뢰되었고 일단 입원을 시켰습니다. 입원시켜 보니 bmi도 19 정도이고 본태성 고혈압보다는 2차성 고혈압이 의심되었습니다.”
“그렇지. 본태성으로는 혈압이 200 넘기 쉽지 않지.”
“네네.”
군의관은 고개를 황급히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혹 또 이현종이 시비를 걸어올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우선 이 나이에서 이만한 혈압을 보일 만한 질환은……. 신동맥 협착이 아닐까 해서 CT부터 찍었습니다.”
“잘했네. 타카야수 혈관염 등이 원인이 될 수 있지. 근데?”
다행히 이현종은 케이스에 심취해 있었다.
애초에 심장을 보는 의사다 보니 혈압에도 조예가 깊어서였다.
“근데 일단 CT에서는 정상으로 나왔습니다.”
“그래? 신혈관이 정상?”
“네.”
“CT에서 다른 이상은 없고?”
“네, 그렇습니다. 영상의학과 컨펌 받은 상황입니다.”
그래서 오리무중이었다.
애초에 군 펠로우는 소화기로 받은 거라 더더욱 그랬다.
혈압 쪽은 문외한인데, 하필 내분비 쪽은 분과 전문의가 수도 병원엔 없었다.
심장 내과 쪽도 충원될 예정일 뿐, 지금은 양주 병원과 공군 항공우주 의료원에만 있었다.
그 와중에 제일 강하게 의심되었던 신혈관 협착이 꽝이 나온 데다가, 다른 이상도 없다고 하니 벙찔 수밖에 없었다.
“아니, 잠깐만.”
그때 묵묵히 있던 수혁이 나섰다.
이현종은 그런 수혁을 반가워했으나 군의관으로서는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얘는 뭔데 감히 이현종에게 노티 중인데 나서나 싶었다.
“환자 CT 정말 아무 이상 없는 게 맞아요?”
하지만 이현종 앞이라 아무 말도 못 했는데, 그러고 있자니 갈수록 점입가경이었다.
아무리 군 병원이라 해도 영상에서 컨펌을 했다는데 그걸 의심해?
“그래, 확실해?”
“네?”
그런데 이현종이 가세하고 나섰다.
수혁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도 있거니와, 현재 의심해야 할 질환이 영상에서 제대로 안 보일 가능성 또한 있어서였다.
원래 영상의학적 검사라는 게 만능은 아니지 않은가.
임상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았다면 더더욱 틀릴 가능성이 컸다.
“확실하냐고.”
“어……. 그, 영상에서도.”
“임상이 영상만 믿고 있나? 대화하면서 찾아야지. 그런 노력은 했어?”
“그…….”
“어이구, 너 수련 병원 어디냐?”
“그.”
“됐어. 뭐 칠성이나 아선이겠지. 덩치만 따라잡느라 내실이 없어. 하여간 영상 볼 수 있어? 여기서 한번 봐 봐.”
“가지고 있긴 합니다. CD로 떠서요. 의뢰할 생각도 있었어서…….”
“그래? 그럼 띄워.”
이현종은 발표 자료 넘기는 용으로 마련된 컴퓨터를 가리켰다.
이미 학회 둘째 날이라 무척 한산했다.
넘길 사람은 다 넘겼다, 이 말이었다.
간혹 강박적으로 발표 직전까지 자료 수정을 거듭하는 사람 말고는 찾는 사람도 없었다.
해서 군의관은 별다른 기다림도 없이 영상을 띄울 수 있었다.
수혁은 그렇게 뜬 영상 중 신장 위를 유심히 살폈다.
부신이 타깃이었다.
[정상을 줄 만한 소견이네요.]
‘하지만 의심하고 보면……. 이건 종양이라고 판정을 줄 수도 있어.’
[글쎄요. 그렇게 말하기엔 근거가 부족합니다. 검사라고는 달랑 CT밖에 안 되어 있으니까요.]
‘처방 내려서 결과를 더 봐야겠는데.’
[네, 저도 그러길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