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화 원격으로 봐줄까 (1)
[신동맥 협착이 없으면서 칼슘 길항제에 반응이 없다는 건…… 알도스테론 증가를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역시 부신이 원인이 될 거라 이 말이지?’
[그렇습니다. 다른 원인도 배제하기는 어렵지만, 정황상 가능성이 큰 건 부신입니다.]
‘오케이.’
[랩에 대한 확인은 불필요합니까?]
‘이 정도는 뭐……. 뚝딱이지.’
[네, 듣다가 이상하면 개입하겠습니다.]
‘오케이.’
수혁은 잠시 머릿속을 정리했다.
말이 정리지, 남들이 볼 때는 혼잣말 비슷한 광경이었다.
이현종이야 그런 모습이 워낙에 익숙했으나 군의관은 그렇지가 않았다.
‘뭐야, 갑자기. 왜 중얼거리지?’
어두운 곳이었다면 조금은 무서울 수도 있는 광경이었다.
다행히 지금은 낮이었고 사람도 많았다.
군의관은 당황스럽기는 했으나 큰 동요 없이 수혁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렇게 수초가 더 흐른 후에 수혁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평소와 완전히 같은 얼굴로 돌아온 채였다.
“선생님.”
“아, 네.”
수혁의 눈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단단하다고 해야 할까?
하여간 마주한 채 이상한 생각을 이어 나가는 것은 어려웠다.
특히 지금처럼 자기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군의관은 여태 수혁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과는 무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이 환자 랩 뭐 나갔죠?”
“아……. 그, 여기 있습니다.”
“결과지를 가지고 오셨네요?”
“어차피 학회 오는 김에 누구라도 붙잡고 좀 물어보려고 했거든요. 사실 전원 요청서도 작성해서 임시 저장까지는 해 놨습니다. 환자가 가정 형편상 군 병원에서 치료받고 싶어 하지만……. 어쩔 수 없다면 그게…….”
“아, 그렇군요.”
어려운 환자 던질 생각만 하는 거 아닌가.
수혁과 이현종은 동시에 군의관을 조금 한심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게 반드시 탓할 일만은 아니었다.
보지도 못할 환자 붙잡고 있다가 사고 치느니 역량이 되는 곳으로 보내는 것이 백번 나았으니까.
“음.”
지금도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수혁이 이 환자에 대한 랩을 쭉 훑을 수 있었으니까.
[기본적인 입원 랩만 나간 거 같군요.]
‘젊어서 그런가, 혈압이 이렇게 높아도 신장이나 이런 데는 괜찮네.’
[벌써 나가면 안 되죠.]
‘다른 랩들도……. 문제 될 것은 없고.’
[하지만 치료가 늦어지면 짧으면 몇 개월 길게는 수년 내에 망가지겠죠.]
‘그래, 그렇지.’
동시에 돌이킬 수도 없을 터였다.
우리 몸의 장기는 여간해서는 잘 망가지지 않지만, 한번 망가지기 시작하면 되돌리기 어려웠기에 그랬다.
때문에 수혁은 더욱 집중해서 환자 상태를 파악했다.
결과,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일단 고혈압에 대한 워크 업은 CT가 다였어.’
[네, 그렇군요.]
‘아직 2차 합병증은 없고.’
[워낙 젊으니까요.]
‘좋아. 빨리 검사해서 원인만 찾으면 얜 멀쩡해지겠다.’
판단을 끝낸 수혁은 군의관을 돌아보았다.
몇 가지 처방을 내리면서였다.
“부신피질자극호르몬, 코티솔, 레닌 활성도, 알도스테론 농도 나가 주세요. 일단.”
“아……. 네.”
“그리고 푸로세마이드(Furosemide: 이뇨제) 80mg 정맥 투여해 주시고……. 환자 보행 가능하죠?”
“아, 네네. 근데 그건 왜…….”
“자극을 주고 변화를 보려고 합니다. 이뇨제에 더해 4시간가량 보행을 하고 나서 혈장 레닌 활성도를 보도록 하죠.”
“그…….”
군의관은 조금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수혁은 막힘없이 떠들어 대고 있고, 옆에 있는 이현종 또한 이게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자기는 무슨 말인지 알아먹기가 어려워서였다.
“그다음 생리식염수 부하도 할 건가?”
이현종은 그런 군의관에게 관심을 두는 대신 수혁에게 집중했다.
아무래도 혈압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는 만큼 지식도 관심도 더 많았다.
“아, 네. 알도스테론 농도가 떨어지는지 보고 안 된다면……. 감별점이 될 거 같습니다.”
“좋아. 그렇게 하지.”
아무튼, 둘은 결론을 내렸다.
군의관은 잠시 망설이고 있다가 뭘 모르겠으면 둘의 의견을 따르는 게 맞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수혁은 몰라도 이현종은 천재로 유명하잖아. 아무리 칠성에서 흠집을 내려 해도…….’
심지어 라이벌 병원임에도 불구하고 이현종에 대한 우수함은 인정해 주는 분위기지 않은가.
게다가 방금 들어 보니 수혁 또한 막힘이 없는 것이 보통은 넘어 보였다.
해서 군의관은 즉시 전화를 걸어 당직 서고 있는 군의관에게 부탁해 처방을 내렸다.
“결과 나오면 연락 준다고 합니다. 오늘…… 혹시…….”
“아, 뭐 하루 종일 있을 거야. 하필 내 강의가 첫 시간이었어 가지고…….”
이현종은 군의관의 말에 허허 웃고는 시계를 돌아보았다.
한참 떠든 거 같은데 아직 10시도 안 된 상황이었다.
이현종은 학술 이사 욕을 한바탕해 대고는 군의관의 어깨를 쳐 주었다.
“여기 내 명함. 연락해. 따라다니기는 좀 그렇잖아.”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학회만 듣기 지루하던 참인데……. 잘됐지. 너도 그렇지? 수혁아.”
이현종은 정말로 즐겁다는 얼굴이었다.
수혁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진 않았다.
어차피 국내 학회 수준에서는 둘 다 크게 도움이 되지 않기에 그랬다.
매일같이 가장 앞서가는 학술지 논문을 읽어 보고 있을뿐더러 국내에서 가장 희귀한 질환들을 보고 있지 않은가.
반쯤은 자랑하러 또 반쯤은 사교 모임 하러 오는 게 춘계였다.
그 와중에 이렇게 흥미로운 케이스를 보게 되었다는 건 어찌 보면 행운이었다.
“네, 그렇죠. 연락 주세요. 센터장님은 아시는 분들이 워낙 많아서 연락 안 될 수도 있으니 제 번호로 전화 주시는 게 편할 거예요. 여기, 제 명함.”
“아, 네. 감사합니다.”
수혁은 십분 동감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명함을 주었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명함인 데다가, 새로 여는 센터니 만큼 그룹 차원에서도 신경을 썼던지라 꽤나 멋진 디자인을 자랑했다.
거기에 적힌 직함은 더더욱 그랬다.
‘태화의료원 통합진료센터 부센터장, 국제진료센터위원, 태화 R&D 사외이사…….’
사실 통합진료센터 부센터장 말고는 거의 이름뿐인 직함이라고 보면 되었다.
국제진료센터는 아직 개설을 안 했고, 태화 R&D라는 건 전에 개발했던 ‘거들다’에서 나오는 돈을 받기 위해 걸쳐 둔 직함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솔직히 부센터장보다 사외 이사가 더더욱 있어 보였다.
특히 의사들은 회사 직함에 대해 낯설었기 때문에 ‘이사’에 맛이 갔다.
‘어쩌면 이현종 교수님보다 더 대단한 사람일 수도…….’
수혁은 바루다의 분석 덕에 실시간으로 변하는 군의관의 표정을 확인하며 속으로 웃었다.
‘김다현 사장님 말대로 하길 잘했네.’
[인간이란 참 겉으로 보이는 것에 약한 생물이군요. 이렇게 노골적으로 태도가 바뀌나.]
‘그걸 이제 알았으니 이용해 먹어야지.’
[명함에 한 줄 더 박을 수 있게 노력해야겠군요.]
잠시 바루다와 이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이현종이 어깨를 잡아끌었다.
“수혁아. 너 근데 다리 많이 좋아졌지? 지금도 서 있었는데 뭐 힘든 기색이 없네?”
“아, 네. 그냥 서 있는 건 괜찮아요.”
“그래, 그럼…… 그 뭐야. 심혈관 중재 시술도 좀 볼래? 어차피 나랑 있으니 네가 직접 할 일은 없겠지만……. 너 레지던트 땐 한 번도 참관 못 들어왔지?”
“네. 그때는…….”
“오늘 어디냐. 에메랄드 홀에서 이거 섹션이 있어. 어차피 다 녹화본으로 하는 거긴 한데 그래도 시술자가 직접 얘기하는 거 들어가면서 보면 도움이 될 거야.”
들어 보니 거절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제안이었다.
이현종의 말대로 수혁이 직접 뭘 할 일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알고서 처방을 내리거나 협진을 내는 것과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건 천지 차이였다.
“좋죠. 심혈관 중재 시술만큼 중요한 시술도 없으니까요.”
“그래, 그럼 가자.”
게다가 이현종은 본인이 하고 있는 시술에 대한 자부심이 어마어마한 사람이었다.
이 나이에도 여전히 태화에서 제일 많이 하고 있고 또 제일 잘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걸 치켜세워 주지 않는다면 대단한 불효자일 터였다.
[입꼬리 올라가는 것 좀 보세요.]
‘단순하시다니까.’
지금도 반응이 대단히 좋았다.
다 떠나서 아들 된 몸으로 이만큼 수고해서 상대의 기분을 한없이 좋게 만들 수 있다면 반드시 가야 하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에메랄드 홀에 도착했다.
안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앉아 있었다.
“어, 이현종 교수님 오셨네요.”
그 정도가 아니라 세션이 시작됐는지 단상 위에 좌장뿐 아니라 발표자도 하나 올라가 있었다.
그럼에도 좌장이 방금 열린 문으로 들어온 이현종을 가리키며 박수를 유도했다.
“어서 오십쇼.”
“안 오시나 했습니다.”
“아이구, 교수님.”
“영광입니다!”
현재 심장내과에서 이현종의 입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 세션은 그냥 심장내과 쪽도 아니고 심혈관 중재 시술이니 반응이 더 격할 수밖에 없었다.
발표자 말고는 모두 이현종을 반기고 있었다.
‘좆 됐네.’
반면 발표자는 얼굴이 흙빛이 된 지 오래였다.
이현종을 개인적으로 싫어해서는 아니었다.
그도 이현종을 존경했다.
불가능했던 시술을 가능케 한 사람이지 않은가.
하지만 발표자의 입장에서만 보면 나쁜 인간도 이런 나쁜 인간이 없었다.
“자, 그럼 발표 시작할까요?”
발표자의 걱정과는 별개로 발표는 재개되었다.
이현종은 늦게 온 주제에 제일 앞자리로 안내되어 발표자를 바라보았다.
수혁을 바라볼 때와는 달리,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을 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이제 나보다 잘하는 애들이 나와야 하는데 말야?’
어찌 보면 대한민국에서 심혈관 중재술 하는 사람들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이현종의 제자라 할 수 있었다.
스승 된 마음에서 청출어람을 꿈꾸는 게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요원한 일로만 보였다.
한때 수혁에게 욕심을 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혁은 심혈관 중재 시술의 고수가 되는 것보다 더더욱 그릇이 큰 사람이었고, 이현종은 수혁을 스승으로서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사랑했기에 풀어 주었다.
‘아쉽다고, 아쉬워.’
그러한 마음이 발표자에게는 퍽 불편하게만 전해졌다.
하필 발표 제목이 관상 동맥 중재 시술의 한계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시발……. 15분만 이따 오시지.’
발표자는 목울대를 울렁대며 입을 열었다.
“이 케이스는 관상동맥의 이상이 있어 어려웠던 케이스입니다. 여기서 진입하려면…… 찢어질 가능성이 있기에 흉부외…… 네, 이현종 교수님.”
“태화 의료원 이현종입니다. 훌…… 발표 잘 듣고 있습니다. 이 케이스가 어렵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불가능할 정도였나요?”
예상했던 대로 태클이 진행됐다.
노인네가 쓸데없이 발목 잡는 느낌은 아니었다.
분명 이현종이 발표했던 사례집에서 해당 관상동맥 변이에 대한 대처법을 다루었으니까.
문제가 있다면 따라 하기가 좀 까다롭다는 점이었다.
“그……. 안전을…….”
“혈관 막힌 상황에서 흉부외과 연락하고 수술방 열고 마취하고 개흉하고……. 시간 허비하는 게 더 위험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나요?”
“그…….”
발동 걸린 이현종을 안정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수혁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제풀에 꺾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 말이었는데 연락이 왔다.
‘아.’
군의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