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화 와 몰려든다 (1)
학회는 여러모로 만족스러웠다.
통합진료센터에 대한 어필도 충분해 보였다.
물론 아선과 칠성의 반발이 꽤 심하긴 했으나, 그건 어차피 예정되었던 일이지 않은가.
아마 아무 말 하지 않았어도 뭐라 하긴 했을 터였다.
단지 시기의 차이일 뿐.
“야, 이거 봐라. 이차 병원에서 의뢰 온다.”
게다가 이현종은 그들의 의견을 그리 귀담아듣는 편이 아니었다.
어차피 적이 하는 소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무슨 얘기를 하더라도 다 그들 잘못으로만 생각했다.
남들이 볼 땐 독불장군 그 자체였으나, 이현종 자신에게는 퍽 도움이 되는 성격이라 할 수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멘탈이 터지지 않아서였다.
[이수혁은 괜찮습니다.]
‘뭔 소리야, 인마.’
[이미 충분히 뻔뻔하지 않습니까?]
‘진짜 뭔 소리야 이놈이.’
그와는 달리 수혁은 이런저런 루트를 통해 칠성과 아선에서 뭐라 얘기하고 있는지 전해 듣고는 일말의 걱정이라도 품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저런 루트라고 하면 퍽 다양해 보이겠지만 사실 아선 일은 우하윤에게, 그리고 칠성 일은 나름 발이 넓은 축에 속하는 안대훈에게 듣는 게 다이긴 했지만.
하여간 이현종의 멘탈 부럽다고 하고 있는 와중에 바루다가 이런 소리를 하니 화가 뻗쳤다.
[수혁은 제 존재를 알리지 않고, 저를 이용한 진료 성과가 마치 자기 것인 양 행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
하지만 이어지는 말을 듣고 보니 조금 숙연한 느낌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진짜 이렇게 행동하긴 하지 않았던가.
다리 대신 얻은 보상이라고 여기긴 했지만.
아마 내과 의사 백 명에게 한쪽 다리 절고, 바루다를 탑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어쩔래, 하고 물으면 백이면 백 탑재한다고 할 터였다.
[뭘 또 그렇게 반응합니까? 밝힌다 해도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을 텐데요? 우연에 우연이 중첩되어 벌어진 현상입니다.]
‘근데 왜 상기시키냐?’
[우연과는 별개로 수혁이 뻔뻔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칭찬입니다. 덕분에 여기까지 왔죠.]
바루다는 지금 수혁이 있는 센터를 상기시켰다.
보기에 번드르르한 것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내실 있는 센터였다.
벌써 이 센터에서 몇 명을 살렸는지 모르지 않는가.
게다가 그 중추적 역할을 수혁이 맡고 있었다.
“야, 수혁아. 뭔 생각 하냐. 이렇게 많이 왔다니까?”
바루다와의 대화, 그리고 상념 때문에 멍하니 있었더니만 이현종이 수혁을 다시 불렀다.
고개를 돌려 보니, 과연 의뢰서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아무래도 센터장인 이현종이 워낙에 높은 사람이어서 그런가, 무턱대고 보내진 못하겠는 모양이었다.
의뢰서들이 상당히 자세했다.
“와, 그러니까요. 살펴볼까요?”
“그래야지. 오늘은 좀 쓸 만한 의뢰가 많았으면 좋겠네.”
수혁은 자기 앞에 놓인 모니터를 통해 의뢰서를 보면서 동시에 이렇게 상세한 의뢰서들이 오는 게 아마 이현종의 위치 때문만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어제 일을 떠올리면 되었다.
‘이런 것도 모르고 의뢰를 하면 어떡해? 자, 내 말 잘 들어. 지금 환자는…….’
그나마 전화라도 해 준 케이스는 다행이었다.
어떤 건 그냥 읽씹 당하기도 했다.
아예 가치가 없다, 이 말이었다.
수혁이 보기에도 그렇긴 했다.
어렵다기보다는 돈도 안 되고 공을 들여 봐야 하는 환자를 귀찮으니 너네한테 던지겠다는 의도를 어떻게든 숨긴 의뢰들도 있었다.
‘에이.’
수혁은 애써 어제 일을 지우려 고개를 가로젓고는 의뢰서를 찬찬히 살폈다.
어제 일이 소문이 좀 났는지 확실히 의뢰서에 들인 공들이 조금 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려운 케이스가 확 늘어난 건 아니었다.
대부분은 문자 또는 전화만으로도 해결이 가능했다.
‘문진이나 검사로 충분히 단서를 잡고도 뭘 못하네…….’
[그걸 종합하는 건 차원이 다른 얘기니까요.]
‘내가 가능한 것도 네 덕일까?’
[그건…….]
바루다는 수혁의 질문에 쉬이 답하지 못했다.
바루다가 하는 일은 지식과 경험을 데이터화하는 것 그리고 본인의 연산을 통한 문제 목록 및 의심 가는 질환을 얘기하는 것 정도였다.
물론 이게 정말 대단한 것이지만 요약하면 이랬다.
그 말은 곧 바루다가 쌓아 낸 것을 종합해 사고하는 건 오로지 수혁의 몫이란 얘기였다.
결정적인 힌트 또는 심지어 바루다가 틀린 진단을 바로 잡아 주는 경우도 왕왕 있었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지 않은가.
[어느 정도 수혁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죠.]
해서 어쩔 수 없이 인정해 주었다.
조금 불편한 느낌이 들었는데, 스스로를 깡통이라 여기고 있는 바루다는 그게 바로 고깝다는 감정의 일부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웬일이냐?’
[저는 인간과는 달리 거짓말할 줄 모릅니다. 달리 말하면 평소 제가 수혁에 대해 하는 평 또한…….]
‘아, 시끄럽고. 이거 한번 봐 봐. 이상한데, 이거.’
[어디 보겠습니다.]
해서 저도 모르게 비꼬려는 순간 수혁이 케이스 하나를 망막에 비추었다.
히스토리만 해도 복잡하기 그지없는 환자였다.
일단 나이가 많았다.
[남자 81세. 당뇨, 고혈압 모두 있군요. 지금은 폐렴으로 치료 중인데……. 아직 혈액에서 균이 동정되지는 않았고요.]
‘응. 항생제는 피페라실린에 타조신 쓰고 있고.’
[아직 균이 뭔지 모를 땐 괜찮은 선택이죠.]
‘엑스레이를 보면…… 폐가 개판이야. 근데 그거에 비하면 산소 포화도는 또 괜찮은 편이지.’
[그렇네요? 삽관도 안 했고……. 코로 산소 3ℓ만 주고 있군요.]
폐가 온통 새하얀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중증 폐렴이라고 할 만한 소견이었다.
하지만 산소 요구량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엑스레이 특유의 비틀림인가 했으나, CT에서도 그리 다른 소견을 보이진 않았다.
‘근데 뭘 박으셨나. CT가 너무…….’
[히스토리에 보면 60년 전에 흉골, 갈비뼈 복합 골절로 인해 고정술을 시행했다고 되어 있군요. 그때는 지금 같은 소재를 쓸 수는 없었을 테니 뭐 어려웠을 겁니다.]
‘그렇군. 이래서야 어디 정확한 파악이 되려나.’
[근데 말입니다. 이건 환자의 지병 때문에 어려워진 거지……. 그렇게 드문 병은 아닌 거 같은데요?]
‘이것만 보면 그래. 근데 목록을 봐 봐.’
[무슨 목록 말입니까?]
‘의뢰 목록.’
수혁은 그 말을 하면서 잠시 창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환자가 아니라 의뢰 목록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이게 뭔…….]
바루다는 투덜거리면서도 수혁이 이럴 때 헛짓하는 인간이 아니란 것을 상기했다.
때문에 녀석은 그제야 의료 목록을 주의 깊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정말로 얼마 지나지 않아 수혁이 뭐가 이상하다고 했는지 파악해 냈다.
[지금 이 병원에서 비슷한 소견의 폐렴 환자를 셋이나 의뢰했군요.]
‘응. 같은 의사가 다 보고 있어.’
[여러 가능성이 있겠습니다. 흠. 확실히…… 이건 흥미롭군요.]
일단 같은 의사가 보고 있는 비슷한 소견의 감염 환자라는 게 이상했다.
설마 싶긴 하지만, 한때 의사의 손을 통한 감염이 원내 감염 원인의 1위를 차지했던 적도 있었다.
실제 19세기 헝가리의 저명한 산과 의사 제멜바이스가 의료진의 손을 닦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전까지, 병원 거대한 감염의 요함과도 같았다.
하지만 수혁은 그 가능성이 그리 크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직 피에서 어떤 균이 동정되지는 않았으나, 뭐라도 있으면 모양 정도는 보고될 정도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바루다 또한 상기 사실을 언급했다.
[보통 의료진 손을 통해 감염되는 균은 황색포도상구균, 그중에서도 메티실린에 내성을 가진 이른바 슈퍼 박테리아입니다.]
최근에 워낙 흔해지기도 한데다가, 반코마이신이라는 항생제가 개발되기도 하면서 주목도가 떨어지긴 했지만.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그 위력은 가히 충격적이라 할 만했다.
범용적으로 쓰이는 항생제에 내성이 있어서였는데 대체 이런 놈이 어디서 나왔을까에 대한 논의가 계속적이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원내 의료진들에게서 감염이 된다는 것을 밝혀냈던 것.
그전에도 강조되기는 했으나 종종 무시되곤 했던 의료진 손 씻기 운동에 다시 한번 열기가 오르게 된 계기가 되었던 바 있었다.
[하지만 이 환자의 피에서는 그러한 종류의 균이 자라진 않네요. 임상 양상도 메티실린 내성 황색포도상구균(methicillin-resistant Staphylococcus aureus infection, MRSA)과는 다르고요.]
‘응. 아예 다른 종류의 원내 감염균일 수 있겠어.’
[그렇다면 흔한 종류는 아닐 겁니다. 한번 보시죠? 병원 소재지는 경기도 오산입니다.]
‘그렇게 멀지도 않네. 오케이.’
결론을 내린 수혁은 이현종을 돌아보았다.
이현종도 몇 가지 케이스를 추려 낸 모양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은 케이스를 미친 듯이 지우고 있는 걸 보면 대강 유추가 가능했다.
“저, 아빠?”
“응, 아들. 말해 봐.”
“저는 이 케이스들이 의미가 있을 거 같아요. 나머지는 대강 조언을 해 줬습니다.”
“그래? 그럼 받아야지. 나는 심장 쪽 환자들 받아 보려고. 부정맥이 어렵긴 한데……. 그래도 참 이러네.”
“네. 손도 못 대고 있더라고요.”
“어쩌겠어, 이런 건 우리가 봐줘야지. 이번 달 치프는 누구지?”
치프.
곧 3년 차 누구냐는 뜻이었다.
아쉽게도 수혁은 본인이 유명한 것과는 별개로 그리 발이 넓지 못한 사람이었다.
저번 달이야 안대훈이 있었으니 익숙하기 그지없었으나, 이번 달은 그렇지 못했다.
“그…… 모르겠습니다.”
“그래, 치프가 중하니. 자네가 찾아서 오라고 해 봐.”
이현종이야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본인도 챙겨 줘야 할 정도의 사이, 즉 제자나 직속 후배 아니고서는 딱히 관심을 두지 않는 성격이지 않은가.
오히려 수혁의 이런 점이 기꺼웠다.
재능 있는 놈들이 정치질에 매몰되어 실력이 퇴화해 가던 꼴을 몇 번이나 봤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런 것도 닮았단 말이지.’
친아들도 아닌 주제에 이런 생각까지 했다.
그사이 이현종의 명에 따라 인턴이 바람같이 달렸고, 치프가 불려왔다.
“여기 표시해 둔 케이스들 해당 병원에 연락해서 오라고 하고…… 여기 보면 다른 케이스들엔 우리가 코멘트 남긴 거 있지?”
“네, 교수님.”
“그거 보고 공부하고…… 내일 아침에 발표해. 모든 레지던트들이 케이스 하나씩. 중복되지 않게 어레인지 해서.”
“아…….”
치프, 그러니까 대훈의 친구이자 동기는 대훈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정말, 정말 많이 배우는 한 달이 될 거라 했다.
동시에 엄청 혼나는 한 달이 될 거라고도 했고.
인계 사항 없냐고 했더니 별 의미 없다는 말도 남겼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엿 먹이려는 건가 했더니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이렇게 즉석에서 케이스 컨퍼런스가 뚝딱 떨어질 줄이야.
황당한 마음에 입을 벌리고 있으려니, 이현종이 고개를 삐뚜름하게 만들었다.
누가 봐도 시비 거는 듯한 모양새였다.
“왜.”
“아닙니다! 제가 어레인지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라고. 나는 멍청한 놈도 싫어하는데, 노력 안 하는 놈은 더 싫어해.”
“아, 네!”
보통 이럴 땐 ‘멍청한 건 봐줘도’라는 말로 시작하지 않던가.
뭐 이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3년 차까지 올라온 사람이라면 눈치가 개발되는 법이었다.
머릿속과는 정반대로 씩씩한 대답만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