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444화 (444/1,303)

444화 간 독성? (2)

수혁과 이현종은 그렇게 레지던트 몇을 더 조진 후에야 회진을 돌았다.

말이 조지는 거지, 각각의 케이스가 하나의 강의와 비슷한 수준이었기에 다들 불만은 없었다.

물론 멘탈이 탈탈 털려서 아무 생각 없이 터벅터벅 걷는 이도 있긴 했지만.

오늘 타깃을 면한 이들은 모두 머릿속으로 아까 수혁과 이현종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 그렇지. 간 독성에서 간 수치가 15배 이상이면 그렇게 세게 고민해야지.’

‘만성이라면……. 음, 뭐가 있을까? 원래 바이러스에 의해 간염이 있나?’

‘이상한데. 바이러스성 간염으로 만성이 됐다면 이전에 분명 에피소드가 있을 텐데?’

‘C형 간염인가?’

그저 의뢰서만 봤을 때나, 환자 얼굴을 나름 들여다봤을 땐 도저히 떠올릴 수 없던 고민들이었다.

수혁의 말 몇 마디가 그들의 사고 회로에 기름칠을 한 셈이었다.

물론 수혁은 아예 차원이 다른 고민에 빠져 있었다.

“수혁아, 뭔 생각 하냐. 이제 곧 퇴근인데.”

“아……. 아까 환자 때문에요.”

“무슨? 아, 간? 나머지는 거의 다 해결 됐더만.”

“네, 그렇죠. 아, 맞아. 아빠 그 환자는 협심증 의심하시는 거예요? 홀터 다는 환자.”

“아무래도 그렇지. 의식까지 잃었다면……. 이형협심증(variant angina) 가능성이 있어.”

“아, 그렇겠네요.”

“홀터 달았으니까 뭐가 나오겠지. 어택 와도 뭐……. 우리 병원은 대응팀이 훌륭하니 괜찮을 거야. 하여간 고민할 거면 더 하고 있어 봐. 나도 오늘은 저녁 약속이 있어서 같이 못 나가.”

“네?”

저녁 약속이라.

이현종만큼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라면 저녁 약속이 흔한 일이겠지만.

사실 이현종은 그리 사회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골프 약속 아니고서는 거의 약속이 없다, 이 말이었다.

“삼촌이랑요?”

“삼촌? 아, 원장님? 그분은 바쁘시지.”

심지어 신현태도 아닌 듯했다.

여전히 실적 얘기한 것에 삐진 모양이었다.

아예 빈정거리는 투를 보아하니 정말 만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어, 그럼 누구랑요?”

“뭐……. 있어. 그렇게 중요한 자리는 아냐.”

거짓말이었다.

바루다의 도움도 필요 없었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을 보아하니, 분명 거짓이었다.

[중요한 자리겠군요.]

‘그러니까?’

[이상한 일이네요. 이현종이 수혁과 관계된 일 아니고 중요한 약속이 있나?]

‘그러니까 말야.’

[으음.]

‘으음.’

이현종은 수혁의 얼굴에 떠오른 의구심을 읽었는지 부리나케 자리를 떴다.

고민이나 더 하라는 말을 남기고서였다.

그렇게 이현종이 사라진 자리엔 그가 남긴 체취만 남았다.

‘응?’

[향수를 뿌렸네요? 전공의가 뿌린 건 줄 알았는데.]

‘뭐야, 뭐야, 뭐야!’

[갑자기 왜 그럽니까, 시끄럽게.]

‘야, 아빠 나이에 갑자기 향수 뿌릴 일이 몇 개나 되냐?’

[모르죠, 저는. 수혁이나 이현종은 안 뿌리니까요.]

바루다는 정말이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이해도 갔다.

바루다가 제일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수혁, 이현종인데 둘 다 이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지 않은가.

어필하기 위한 노력도 거의 안 했다.

제때 미용실 가는 거나 너무 후줄근해 보이지 않게 옷을 사는 것을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면 할 말이 있겠지만, 사실 이 둘의 여건에서는 뭔가 더 해야만 하지 않을까.

‘좋은 냄새를 풍겨야 하는 일이 있다는 거잖아. 회사 일이나 이런 건 아냐. 김다현 사장님 만날 때도 그렇고……. 향수 뿌린 적 없어. 아닌가?’

[향수 항목까지 데이터화한 적은 없지만 이런 냄새는 없었던 거 같군요. 그 어떤 데이터를 토대로 살펴봐도 없기는 합니다.]

‘어, 뭐지.’

수혁은 환자 일은 까맣게 잊은 채 이현종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잠깐도 아니고 한참을 그러고 있으려니 당연하게도 바루다의 핀잔이 날라왔다.

[수혁.]

‘응?’

[남의 일에는 신경 끄고 환자 고민이나 하시죠.]

‘아……. 그래야 되는데 솔직히 너무 궁금한데. 이제 와서 아빠가 연애라니?’

[벌써 기정사실화하시는 겁니까? 중간 과정을 너무 많이 건너뛴 거 같은데요?]

‘아, 넌 안 궁금해?’

[네.]

‘와 할 말 없네.’

너무 단호한 답이었다.

하긴 바루다는 인공지능인데 남의 연애사가 왜 궁금하겠는가.

아마 수혁도 다른 사람 연애사, 그러니까 안대훈의 연애사라면 시큰둥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현종은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

다시 고민에 빠졌던 수혁은 안 되겠단 얼굴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그의 수족과 같은 심복, 안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교주님! 아니, 교수님!”

신호가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안대훈이 전화를 받았다.

중간에 좀 이상한 호칭이 있었던 거 같지만, 수혁은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교주라고 했군요. 교주란 네이버 검색에 따르면 종교의 가르침을 펴고 종교단체의 최고 책임자로, 교단을 창립한 교조(敎祖)와 혼칭하는 경우도 있다, 라고 하는군요.]

‘너 인터넷 되니?’

[아뇨, 전에 안대훈이 이렇게 부르겠다고 해서 수혁이 벌벌 떨면서 검색해 봤을 때 데이터화해 두었습니다.]

‘왜?’

[그냥요.]

‘어휴.’

수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그러는 사이 안대훈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인지 하명해 주십쇼!”

여전히 이상한 말투였다.

이 자식이 어디서 사극을 보고 심취했나 뭐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서 더 믿음직스럽긴 했다.

“너 이번 달 어디 돌더라?”

“감염내과입니다, 교주, 교수님.”

“둘 중에 하나로 통일해 줄래?”

“그럼 교주님.”

“아니, 교수라고 하라고.”

“아…….”

“아쉬워하지 말고.”

아닌가?

믿음직스러워하면 안 되나?

수혁은 헷갈려 하면서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무튼, 오늘 시간 있어?”

“있어야 하죠.”

“뭔 대답이 그래?”

“있습니다. 신현태 원장님 파트라…… 사실 꿀 스케줄입니다.”

“아, 그렇겠구나.”

레지던트라고 해서 3년 내내 죽도록 바쁜 건 아니었다.

특히 3년 차쯤 되면 1년에 한 달, 운이 좋다면 두 달까지는 꽤 편한 달도 있었다.

그래 봐야 제때 퇴근이 가능하다는 정도였지만.

레지던트의 삶을 살다가 평일 날 퇴근을 해서 밖에서 저녁을 먹다 보면 인생에 감사함을 갖게 되었다.

“그러니 무엇이든 하명하십쇼.”

“응, 지금 빨리 사복으로 갈아입고 로비로 가 봐. 가서 이현종 교수님 있으면 전화해 줘.”

“오.”

“오는 무슨 뜻이야.”

“아뇨, 아닙니다.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응, 고마워.”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내린 후였지만 그와 동시에 속이 후련해졌다.

비로소 환자에 대한 고민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아깐 말 안 했는데 비장도 커져 있었지?’

[네, 14cm 이상입니다.]

‘비장 종대가 있다……. 확실히 만성 간 질환이 있다는 뜻이야.’

만성 간 질환이 있었는데 어떻게 증상이 없었냐 뭐 이런 얘기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간이 괜히 침묵의 장기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어지간히 망가지기 전에는 증상을 아예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간 경화가 진행한 상황에서도 딱히 이렇다 할 증상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어떤 조건이 만족 되면 갑자기 가기도 했는데, 이 환자의 경우엔 아마도 홍삼 달인 물이 방아쇠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게 맞을 거 같았다.

‘홍삼 달인 물을 먹고 악화가 된 거겠지. 그리고 진행…….’

[대한민국의 통계를 보면 바이러스성 간염일 가능성이 제일 크죠. 비형 간염 아니겠습니다. 수직 간염인 경우 검사에 걸리지 않았다면 이렇다 할 증상 없이 만성으로 진행했을 겁니다.]

‘으음……. 가능성 있는 얘기네.’

몇몇 감염증은 산모에서 태아로 전달되기도 했다.

비형 간염이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대표적이었다.

딱히 증상도 없이 지내다 군대 갈 때 되어서 검사했더니만 비형 간염 보균자라고 판명되는 게 거의 이 경우라고 보면 되었다.

물론 이젠 비형 간염 백신이 필수 접종 대상이 된 지 오래라 찾아보기 힘든 일이 되긴 했지만.

30대 중후반만 해도 비형 간염 보균자 찾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 아냐. 입원 기록 보면 이 환자 애 낳은 적이 있어.’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비형 간염 보균자라고 해서 애를 못 낳는 건 절대 아닌데요.]

‘아니, 바이러스 감염이 있었다면 거기서 걸렸을 거야. 루틴으로 비형 간염, 씨형 간염은 검사하잖아.’

[아, 그렇구나. 그렇네요. 검사에서 이상이 나왔다면 기저질환에 표시가 되었겠습니다.]

어떤 처치를 하기 전에 비형 간염과 씨형 간염을 검사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의료진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나마 비형 간염의 경우엔 백신이 있고 대다수 의료진이 이에 대한 항체가 있지만, 씨형 간염은 애석하게도 아직 백신이 나와 있지 않았다.

심지어 씨형 간염인 경우 비형 간염보다 오히려 더 만성 간염으로 갈 확률이 높은 데도 그랬다.

이러니 사전 정보 없이 처치하다가 찔리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무조건 검사를 진행해야 했고, 검사 결과는 늘 공유하게 되어 있었다.

‘그렇지. 그러니까 그건 아냐.’

[그래도 검사 결과를 보긴 해야겠지만……. 바이러스성 간염일 가능성은 크게 줄었군요?]

그 덕에 수혁은 아직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었다.

다른 레지던트들 아니, 교수들이라 해도 기다리는 단계에 머물러 있을 거라는 걸 감안하면 과연 명의는 명의였다.

‘그럼 바이러스 아니고, 허혈성 아니고.’

간 수치가 15배로 뛰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

바이러스, 허혈성 그리고 간 독성 약물이었다.

바이러스는 지금 유추를 통해 어느 정도 배제했고, 허혈성은 말 그대로 피가 안 가서 생기는 상황인데 이 환자는 딱히 혈압이 떨어지거나 크게 다친 적이 없으니 배제할 수 있었다.

결국 돌고 돌아 간 독성 약물로 돌아온 셈이었다.

[그렇다고 간 독성 약물 단독은 아닐 텐데요?]

‘병발을 생각해야지. 뭐가 있을까?’

[지금 수혁이 생각하는 그 병이겠군요.]

‘그래, 그거밖에 없어. 생각했던 것보다는 쉬운 케이스 같네.’

수혁이 막 생각해 낸 진단명을 적으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안대훈이었다.

“오.”

동시에 수혁은 방금 안대훈에게 엄청 중요한 미션을 맡겼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 대훈아. 어때?”

“지금 막 오셨습니다. 근데…….”

“근데 뭐?”

“왜 이렇게 빼입으셨죠? 정장에 구두도 뻔쩍이는 게 완전 새 거 같아요.”

“그래? 허.”

수혁은 환자 진단명 알아냈을 때보다 방금 더 기뻐했다는 사실에 잠시 자괴감을 느끼다 말을 이었다.

“미안한데 따라가 줄 수 있어? 내가…… 그래, 밥 살게.”

“둘이서 먹나요?”

“어……. 어, 뭐. 너 원하면?”

“지금 갑니다.”

안대훈은 허허 웃으며 이현종의 뒤를 밟았다.

이현종은 평소 그답지 않게 주변을 무척 경계했으나 안타깝게도 안대훈이 미행을 위해 모자를 썼기에 그의 가장 큰 특징인 머리가 드러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때문에 이현종은 꼬리가 따라붙은 것도 모른 채 택시에 올랐다.

안대훈도 그 뒤에 있던 택시에 탔다.

“저 앞에 차 따라가 주세요.”

그리곤 첩보 영화에서만 봤던 대사를 쳤다.

교주님을 위한 모험 느낌이 나서 괜히 신났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