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3화 새엄마? (2)
교주라.
수혁은 아빠란 사람은 60 넘어서 장가들겠다고 설치고 있고 가장 아끼는 후배 놈은 교주라고 부르는 가운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왜 내 주변에는 다 이상한 사람들뿐이지?’
[수혁이 학생 시절 즐겨 하던 와우라는 게임에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뭔 말.’
약간 불안했지만 그래도 물었다.
궁금했다.
게다가 요새는 바루다가 뭔 말을 해도 딱히 충격받는 일이 없었다.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고 할까?
그 때문에 바루다도 더 독한 말을 하기 위해 애쓰는 것 같기는 한데, 그래 봐야 공격보다는 방어가 더 유리한 법이었다.
[가는 곳마다 헬파티면 한 번쯤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음.’
하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반향이 있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교주님.”
그런 수혁을 상념에서 깨운 건 역시나 안대훈이었다.
“어, 말해 봐. 어떤 환자야?”
교주라는 말이 좀 거슬리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안대훈이 12시 넘어 교수급에게 전화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건, 그가 판단하기에 제법 어렵다는 얘기니까.
굳이 안대훈 아니더라도 3년 차쯤 되면 어느 정도 이게 어떤 케이스구나 하는 감은 잡을 수 있지 않던가.
해서 수혁은 급히 환자에 대해 물었다.
“네, 남자 42세 환자고……. 내원 한 달 전 황달을 주소로 소화기 내과 외래 내원했습니다. 당시 검사에서 빌리루빈 높았고 A형 간염 소견 보여 대증치료 했습니다.”
“음, A형 간염이라. 다른 병은 없대?”
“딱히 보고된 병은 없습니다.”
“그래? 알았어.”
대훈은 없다고 했으나 수혁은 의심을 지우지 않았다.
환자가 기저질환이 없다고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가는 낭패를 보는 수가 왕왕 생겼다.
대기업이나 중견기업과 같이 직장인 검진을 잘 챙기는 곳이면 몰라도 자영업자 같은 경우엔 국가 검진마저 놓치고 사는 경우가 많아서였다.
일반 자영업자가 아닌 개업의들조차 그랬다.
생업이 달리게 되면 다른 일들, 심지어 하나뿐인 건강마저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이 여전히 너무 많았다.
‘아예 없다고 믿을 수는 없지?’
[그렇습니다. 내려가서 봐야겠죠.]
‘음, 그렇겠지.’
해서 의사는 자신이 처음 보는 환자라면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수혁은 그게 인이 박혀 있었다.
“여전히 고빌리루빈혈증은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병발 된 다른 간염 또는 간 질환을 의심하는 거야?”
“아뇨. 오늘 완전 새로운 증상을 주소로 왔습니다.”
“어떤?”
“흑색변입니다.”
“아, 멜레나(Melena). DRE(Digital rectal exam: 직장수지검사)는?”
“검게 나옵니다.”
“아하……. 일단 내려갈게.”
“네. 그와 함께 심계항진이 있습니다.”
“출혈이 심하면 그럴 수 있어. 아무튼, 갈게.”
“네. 나머지는 오시면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의학적으로 말하는 흑색변은 단순히 색이 까맣기만 한 것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마치 짜장면처럼 새까만 변을 의미했는데, 이는 대개 상부 위장관에서 발생한 출혈이 소화가 되면서 철분만 까맣게 된 것에서 유래했다.
즉 멜레나가 있으면 상부 위장관 출혈, 즉 위나 십이지장에서의 출혈을 의심할 수 있었다.
[이상하군요? 단순 위출혈을 의심했으면 소화기 내과에 연락하면 될 텐데.]
‘그렇지? 왜 그러지?’
[알 수 없죠. 하여간 내려간다고 했으니 내려가는 게 좋겠습니다.]
수혁은 그렇지 않아도 갑자기 새엄마가 생긴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새엄마가 이기자 교수라는 사실이 못내 불편했던 참이었다.
해서 환자가 있다고 하곤 자리를 피했다.
별로 흥미롭지 않은 환자여도 반가운 순간이란 얘기였다.
“야야! 인턴! 심전도 왜 안 가지고 오냐!”
“비피 떨어집니다!”
“어……. 새츄레이션…… 삽관 안 되면 이비인후과 부르라고! 딱 봐도 숏넥인데 뭐하냐?”
응급실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여기저기서 소음이 들려왔다.
병원이라는 곳이 원래 이랬다.
어느 한쪽 구석에서는 목숨을 건 심장 수술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면, 어느 한쪽에서는 나이 60 넘어 첫사랑에게 장가가고 싶다는 소리가 오가기도 하고, 응급실에서는 이렇게 여러 목숨이 왔다 갔다 했다.
다들 급할 테고 수혁이 돕는다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되겠으나 지금은 맡은 환자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태화 의료원쯤 되면 어지간하면 각기 대응이 가능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게 된 덕이었다.
“아, 교주…… 아니, 교수님.”
좀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니 안대훈이 수혁을 불렀다.
환자는 처치실에 있는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가뜩이나 에이형 간염이 있는데 출혈이라……. 안 좋겠지.’
[급성으로 안 좋아질 수 있는 상황이죠.]
‘응?’
처치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미 소화기 내과 의사들이 와 있었다.
내시경실로 끌고 가기 전에 일단 상태부터 보려고 온 모양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수혁이 오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앗, 교수님.”
“교수님 오셨습니까.”
대부분 선배는 맞았다.
하지만 교수는 없었다.
아무리 높아 봐야 펠로우 2년 차.
그러니 부센터장에게는 일단 존대를 해야만 했다.
“네, 안녕하세요. 안대훈 선생이 노티 해서요.”
“아……. 네. 위장관 출혈 같은데……. 혹시 뭐 다른 게 있을까요?”
게다가 수혁은 실력마저 최고지 않은가.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수혁은 새삼스레 자신의 달라진 위상을 확인하면서 말을 이었다.
“아뇨, 아직……. 일단 하던 거 계속해 주세요. 저는 저대로 보겠습니다.”
“아, 네. 그럼…….”
그리곤 대훈을 불러 물었다.
“근데…… 단순 위장관 출혈 환자를 왜 부른 거야? 나야 뭐……. 기왕 깨 있기도 하고 해서 왔다만.”
“아……. 그게, 일단 이쪽으로.”
대훈은 그런 수혁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냥 봐도 음흉해 보였는데, 아예 머리가 없어서 그런가 나쁜 정치인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하여간 머리가 없으면 뭘 해도 전문가처럼 보이기 마련이었다.
실제 대훈은 여지껏 단 한 번도 보호자나 환자에게 컴플레인을 겪어 본 일이 없었다.
단순히 녀석이 잘해서라기보다는 외형상의 이유가 반드시 있을 거라고, 수혁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 이현종 교수님 말입니다.”
“아……. 아빠…….”
그렇게 끌려간 구석에서 대훈은 이현종 얘기를 꺼냈다.
뭔 얘기를 하려고 하나 했더니만 김이 팍 새는 순간이었다.
아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흥미로웠을 터였다.
하지만 이미 다 까발려진 마당인지라 뭘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 같았다.
“오늘, 아니지. 이제 어제구나. 아침에 이기자 교수님하고 같이 출근했다던데……. 혹시 알고 있나요?”
“어? 아……. 아, 그렇지. 안 씻고 오셨지……. 와……. 찐 어른이네.”
대체 어떻게 사귄 지 하루 만에 잘 수가 있단 말인가.
자의라기보다는 타의에 의해 순결을 지키고 있는 수혁으로서는 이런 세상이 개탄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저도 좀 궁금한데, 안타깝네요.]
‘뭐가 궁금해.’
[아시다시피 저는 수혁과 감각을 공유…….]
‘하, 하지 마. 소름 끼쳐.’
바루다가 거기에 거들자 더더욱 그랬다.
안대훈은 수혁의 소름을 온전히 자기 얘기에 의한 것으로 판단하고 신이 나서 더 떠들었다.
“아무래도 이거 두 분이 사귀는 거 같습니다.”
“뭐……. 어른이 그럴 수도 있지.”
“네? 이현종 교수님과 이기자 교수님이잖아요. 심장내과의 거두와 소아과 거두가…… 게다가 이렇게 되면 교주님은 새엄마가…….”
“아니, 뭐. 그렇지. 근데…….”
그 얘기 듣기 싫어서 도망친 곳에서 또다시 비슷한 얘기를 듣게 될 줄이야.
케이스라도 흥미로웠다면 덜 억울했을 텐데.
수혁은 한숨을 쉬고는 대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환자는 특별할 거 없다는 거지?”
“아, 네네.”
“그럼 난 자러 갈게. 와 어제오늘 연타로 빡세니까 힘들다.”
“아, 네. 들어가십쇼.”
해서 대훈을 뒤로하고 당직방으로 가기 위해 처치실 근처를 스쳐 지났다.
그사이 소화기 펠로우들은 보고자 했던 것을 다 확인했는지, 환자를 침대째로 끌고 밖으로 나왔다.
“내시경실로 가는 거죠?”
“아, 네.”
“같이 가서 봐도 되겠죠?”
“물론입니다.”
그걸 보고 나니 일말의 책임감이 일었다.
그래도 이 자리에서 제일 높은 사람인데, 환자가 어찌 처치되는지까지는 봐야 하지 않을까?
혹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장강명이나 다른 교수 부르기에도 좋을 터였다.
해서 수혁은 일련의 무리와 함께 내시경실로 향했다.
내시경실 밖에는 모니터가 하나 달려 있었다.
밖에서도 안에서 어떤 처치를 하는지, 잘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장강명이 이걸 좋아했다.
식도나 위에서 나는 피를 딱 막고서 나오면, 그걸 본 보호자들이 껌뻑 죽었기 때문이었다.
“이 모니터를 통해서 내시경 시야를 공유하실 거예요. 방금 콧줄로 위세척을 해 보니까 붉은 피가 아주 많이 나옵니다. 아마…… 좀 보기 그러실 거예요. 보기 싫으시면 옆에서 대기하셔도 됩니다.”
“아이고, 네. 꼭 좀…….”
“부탁드립니다, 박사님.”
환자 나이가 비교적 젊어서 그런가 보호자가 둘이나 와 있었다.
하나는 아내로 보였고, 다른 하나는 엄마로 보였다.
둘은 아직 박사 과정에 들지도 못한 펠로우에게 박사님, 원장님, 교수님 등등의 호칭을 붙여 가며 연신 잘해 주십사 부탁을 해 댔다.
다행히 펠로우 2년 차는 그것을 부담으로 여길 만큼의 새내기는 아니었다.
‘하긴 여기 2년 차면……. 응급 위내시경은 지겹게 했겠지?’
[그렇죠. 워낙에 케이스도 많고 백도 잘 잡혀 있으니까요.]
내려오지 않았을 뿐, 병원 어딘가에는 이 사람보다 더 윗사람이 상주하고 있을 터였다.
큰 병원이 괜히 큰 병원이 아닌 게 맨파워부터가 달랐다.
“자, 들어간다…….”
펠로우 2년 차는 보호자에게 설명하는 사이 준비를 마친 내시경실 안으로 들어가 위내시경을 환자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꿀렁인다 싶더니만 식도를 타고 슥슥 들어가기 시작했다.
확실히 실력이 있는 친구였다.
“아……. 여기.”
출혈이 있던 곳은 십이지장이었다.
원래도 궤양이 있던 모양인데, 거기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래 봐야 내시경 시야 하에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실 같은 출혈일 터였다.
“클립.”
펠로우 2년 차는 아주 능숙하게 클립으로 출혈을 잡았다.
그와 동시에 피는 멈추었고, 펠로우 2년 차는 이제 할 일 다 했다는 얼굴이 되었다.
“자……. 그럼 병실 올리자.”
다들 거기에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대훈도 그랬다.
녀석은 애초에 수혁에게 하고자 했던 말을 다 한 후로는 할 일 다 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3년 차긴 하지만 이미 펠로우들이 온 상황이었으니 그래도 되긴 했다.
“아니, 잠깐만.”
그때 수혁이 손을 들었다.
당연하게도 모두의 눈이 그를 향했다.
“네?”
“출혈 잡았으니까……. 에이형 간염이 왜 이렇게 오래가는지 봐야죠.”
“아…….”
“CT 찍자고요. 보통 2주면 피크 찍고 떨어져야 되는데 아직도 황달이 있잖아요? 쓸개즙 정체가 있을 겁니다. 어차피 치료야 대증치료겠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야죠.”
“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