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8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1)
“아, 안녕하세요. 엄마.”
“옳지, 잘한다.”
생각과는 달리, 수혁은 그리 어렵지 않게 엄마 소리를 해냈다.
애초에 엄마라는 사람이 기억에 남아 있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미 수혁이 실은 고아이고, 이현종은 정말 평생 혼자 살아온 몸이라는 걸 들은 이기자는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 음.”
해서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수혁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렇게만 보면 참 감동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순간이었지만 문제는 장소였다.
“그럼 다음 안건…… 아, 이건 통합진료센터의 재정 건입니다. 이현종 센터장님?”
회의가, 그것도 교수 회의가 한창 진행 중이지 않던가.
수혁은 이현종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보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현종이 이기자 교수와 손을 맞잡고 다른 손으로는 연신 자신의 등을 쓸어내리고 있어서였다.
방금 전까지는 그래도 가까이 있는 사람들만 그걸 보고 있었는데, 이젠 이 방 안에 있는 모두가 보게 되었다.
‘미쳤나.’
신현태는 저도 모르게 입 모양으로 욕설을 내뱉은 후 급히 말을 이었다.
“이현종 센터장님? 지금 회의…… 회의 중입니다.”
“아아. 네네. 왜요?”
다행히 이현종은 난청이 있는 사람은 아니어서, 금세 되물어 왔다.
물론 전혀 회의에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건이 뭔지는 몰랐다.
그저 순진무구한 얼굴로 신현태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 재정이, 말입니다. 그, 말이에요. 센터 재정이요.”
“아, 네. 개선됐죠.”
“네, 최근 타 병원에서 전원 의뢰가 엄청나게 오면서 환자가 많이 늘었죠?”
“네. 3월에 비하면…….”
이현종은 음 하고 신음을 흘리고는 수혁을 돌아보았다.
좋아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사실 제대로 아는 건 별로 없어서였다.
원장 때도 병원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는데 센터장 됐다고 갑자기 센터에 대해 잘 알게 될 리가 없지 않은가.
다행히 수혁은 바루다 덕에 이런 숫자놀음에 대해서도 빠삭한 편이었다.
그래 봐야 데이터화 시키는 것 정도이긴 했지만, 이만큼만 해도 의사 중에서는 상위 1%를 상회하고도 남았다.
원래 진료 외적인 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도 없고, 무시하고자 하는 게 비단 이현종뿐만의 일은 아니기에 그랬다.
“정확히 환자 수는 216% 늘었고, 매출액은 400% 가까이 늘었습니다. 이는 타 병원에서 오는 환자들의 경우 검사 나가는 횟수가 아무래도 많아서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절대적인 매출액은 4월 1일부터 28일 자까지 해서 1억 3251만 원입니다.”
해서 이현종 대신 답하기 시작한 수혁의 모습은 전에 없이 대단해 보였다.
진료 성과에 대해 애써 무시하고자 했던 교수들도 숫자를 줄줄이 나열하는 수혁에게는 탄복했다.
세상에 매출액을 다 알고 있어?
종이도 없는데?
회사에서는 상식적인 일이겠지만 병원에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군요, 아직 100% 가동되고 있는 게 아닌데……. 그런 거죠?”
“네. 교수급 의사가 5명은 되어야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저와 이현종 센터장님이 원래 기대되었던 것보다는 더 많은 환자를 보고 있기는 합니다만……. 완전히 궤도에 오르려면 아직 1, 2년은 더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벌써 한 센터의 월 매출액이 1억이 넘는다……. 올해 목표액은 얼마나 될까요?”
“2억은 달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신환 비율이 높아지고 있어서요.”
“그렇군요. 그럼 3월에 올렸던 인력 보충 건도 더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신현태는 자타공인 선비 스타일이었다.
어디 가서 돈 얘기하는 거 질색하는 사람이란 얘기.
그런 사람이 원장이 되어서 계속 돈돈돈 하다 보니 입 안에 가시가 돋는 듯했다.
왜 이현종이 회의 시간만 되면 없는 일도 만들어서 튀었는지 알 것 같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수혁 칭찬하는 것 하나는 즐거웠다.
신현태는 줄기차게 센터 인력 증원에 반대했던 이들 쪽을 돌아보며 웃었다.
‘봐라. 우리 수혁이는 돈도 잘 벌어.’
세상에 사람도 살리는데, 돈도 벌어.
신현태는 이런 애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에 웃다가, 이현종를 보고는 다시 무표정으로 바뀌었다.
자식새끼는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는데, 애비라는 사람이 되어 가지고서는 사고만 치고…….
심지어 지금도 말을 듣고 있지도 않았다.
이기자 교수랑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떠들어 대고만 있었다.
다행인 것은 이제 회의가 끝날 시간이라는 점이었다.
신현태는 후 하고 한숨을 쉬고는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댔다.
“음. 이것으로 오늘 회의는 마치겠습니다. 바쁘신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잡힌 회의에 오신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그리곤 회의를 끝내자마자 일단 이현종을 향해 달렸다.
“억. 이놈이 어깨로 치네.”
“주먹으로 안 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이현종은 그런 신현태의 어깨에 차징을 당한 채 조금 뒤로 밀렸다.
원래는 이런 식으로 일이 마무리되기 마련이었다.
일단 이현종이 잘못을 하고, 신현태가 수습하고 적당한 응징을 하고.
하지만 이젠 이현종의 편이 하나 더 늘어 있었다.
“선배를 치네?”
“아……?”
이기자였다.
이기자는 이현종의 동기고, 그 말은 곧 신현태보다 위라는 거 아닌가.
그렇다고 해도 설마하니 원장을 기수로 밀어붙일 줄은 몰랐던지라, 신현태는 무척 당황한 얼굴로 이기자를 바라보았다.
“원장 됐다고 선배를 쳐?”
“아니……. 교수님. 이건.”
“치더라도 나 안 보는 데서 쳐요.”
“어……. 알겠습니다.”
신현태는 얼떨떨한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니…….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부부처럼 굴지? 설마…… 이기자 교수님도 현종이 형을 좋아했나?’
하고 이현종을 돌아보았다.
이현종은 여기 아파또 하면서 이기자 교수에게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저런 걸? 아니, 아니지. 그래도 형인데……. 내가 심했네.’
신현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반성했다.
아무리 그래도 선비를 자처하는 몸인데 너무 안 좋은 생각을 떠올리지 않았던가.
“아, 참. 이수혁 교수.”
그사이 이기자 교수는 이현종의 어깨에 입김을 불어 주고는 수혁을 돌아보았다.
또 엄마라고 하라고 하려나 하고 긴장하려는 순간, 말을 이었다.
“소아과 김수민 교수라고 알아?”
다행히 우려했던 말이 나오진 않았다.
해서 수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죠. 저랑 같이 임용되신 분이죠?”
“응. 소아 신경 쪽인데……. 입원 환자 중에 좀 어려운 환자가 하나 있는 모양이야. 내가 넌지시 통합진료센터 얘기해 봤는데 말을 안 들어서.”
“아……. 무슨 기분일지는 알 거 같습니다.”
다른 병원에서도 전원 오는 경우가 확 늘어난 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하지만 모두 내과적 질환에 국한되어 있었다.
아직 다른 과에서의 의뢰는 턱없이 적었다.
특히 소아과와 같이 바이털 과라는 자부심이 있는 과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게다가 소아는 작은 성인이 아니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아예 다른 생명이라는 뜻이었다.
비슷한 질환일지라도 치료는 전혀 다른 경우도 많았다.
“뭐……. 한번 봐줄 수 있어?”
“네. 봐야죠. 어떤 환자예요?”
“나는 잘 몰라. 신경 쪽이라…….”
“아……. 소아 신경이군요.”
확실히 왜 의뢰를 안 했는지는 알 거 같았다.
소아과라는 거 자체가 어려운 과인데, 거기서 신경?
난이도가 극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컸다.
[자신 있습니까?]
‘뭐……. 공부는 되어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경험이 많지는 않지.’
[일종의 도전이군요.]
‘그렇지. 아무래도?’
[가 봅시다.]
하지만 수혁은 다년간의 경험 및 공부를 통해 자신감이 충만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근거 없다고 볼 수도 없는 것이, 실제로 수혁은 정말 많은 공부를 해 오고 있었다.
특히 통합진료센터 설이 돌고 난 다음부터는 다른 과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내과는 이제 기본은 턴 지 오래고, 최신 논문 및 케이스 정도만 보면 되기에 부담이 안 되기 시작한 덕도 있었다.
“보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우리는 차라도 한잔?”
“아…….”
수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기자 교수는 이현종 교수와 나란히 선 채 신현태를 불렀다.
신현태는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요청을 수락했다.
‘그래, 이번 기회에 좀 물어봐야지. 뭔 생각인지…….’
원장으로서 병원에서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센터와 한 과의 기둥 격인 교수의 연애 상담 정도는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현종은 수혁과 떨어지는 걸 아쉬워했지만, 이기자 교수가 있어서 그런가 질척거리진 않았다.
생각보다는 금방 헤어질 수 있었단 얘기였다.
해서 수혁은 곧장 소아과 병동으로 향했다.
[언제 와도 분위기가 적응이 잘 안 되는군요.]
‘애들 있는 곳이니까.’
아픈 아이들이라고 해서 굳이 삭막한 병동에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모든 대학 병원이 그러하듯, 태화의 소아과 병동도 알록달록했다.
심지어 간호사들이 입고 있는 옷도 달랐다.
아이들의 경계심을 허물기 위함이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말투도 조금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유치원 선생님을 닮아 있다고 해야 할까?
수혁은 생글거리는 미소의 소아과 병동 간호사에게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김수민 교수님 환자 중에…… 아기 이름이 뭐더라. 아, 김서아. 서아를 보러 왔습니다.”
“아……. 김서아 환아요. 음.”
김서아란 이름을 되뇌는 동시에 간호사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상태가 좋지 않거나, 별다른 진척이 없는 모양이었다.
“어디 있죠?”
“9호실이요. 6인실입니다.”
“네, 가서 볼게요.”
“아, 근데…….”
“네.”
“협진 안 나가 있던데…….”
아마 다른 병동이었다면 딱히 요청이 없다고 해도 별문제 삼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소아과는 달랐다.
아이는 어려서, 보호자는 그런 아이를 보는 게 아파서 다들 예민했다.
혹 수혁이 실수라도 하게 되면 그 대가는 병동과 담당 교수가 치러야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물론 수혁에게는 강력한 핑곗거리가 있었다.
“이기자 교수님께서 한번 가 보라고 해서요.”
“아. 아! 그렇구나. 네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이기자는 소아과의 거두였다.
교과서 집필진임은 물론이거니와 점점 인기가 떨어지는 와중에도 탁월한 교수법으로 태화만큼은 미달이 나지 않게 만들어 주고 있는 사람이었다.
병동에서는 이기자의 말을 허투루 여길 수가 없었다.
그런 사람이 왜 이현종과 갑자기 이어졌을까, 수혁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간호사의 뒤를 졸졸 따랐다.
“야! 가만히 있으라고!”
“이히히!”
아픈 아이들도 아이는 아이였다.
통증만 없으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이 예사였다.
지금도 그랬다.
수혁은 병동 안으로 들어가다 그만 어떤 아이와 부딪쳤다.
키가 한 1미터 20은 될까?
밝은 표정과 달리 수척한 얼굴을 한 아이는 즉시 사과를 해 보였다.
“아, 죄송합니다.”
“아냐, 괜찮아. 혹시 이름이 뭐야?”
“김서아요.”
“아, 네가 서아구나.”
수혁은 아이의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주의 깊게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잠시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느낌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