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464화 (464/1,303)

464화 또 도와주세요 (4)

바루다의 말투는 아주 확고하기 그지없었다.

걱정일랑 붙들어 매도 된다는 느낌이 딱 들었다고 해야 할까?

하여간 뭐가 있어도 있는 모양이었다.

해서 수혁은 여유를 가장할 수 있었다.

“일단…… 뇌파 검사기를 달아 볼까요?”

“야, 뭔가 있나 보다! 역시 우리 수혁이.”

그 모습에 이현종이 신이 나서 외쳤다.

마침내 이루어진 짝사랑이 눈앞에 있어도, 아들 사랑은 어디 안 가는 모양이었다.

이기자는 그런 이현종과 사실은 이현종의 아들이 아닌 수혁을 번갈아 바라보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진짜 이 사람은 하나도 안 변했네.’

수혁에 대한 사랑조차 의학 때문이었다니.

사람이 이렇게 한결 같을 줄은 꿈에도 몰랐더랬다.

순수하다는 말이 이처럼 어울리는 사람도 별로 없을 터였다.

“여기 이쪽으로 가져와 봐.”

이현종이 주접을 떨고, 이기자가 그런 이현종을 기꺼워하는 사이, 김수민 교수는 레지던트에게 뇌파 검사 기기를 끌고 오라 일렀다.

그리곤 레지던트가 끌고 온 뇌파 검사 기기를 아이 앞에 가져다 놓고 부착하기 시작했다.

성인에게 하듯이 무턱대고 퍽퍽 붙이진 않았다.

아이들에게 그랬다간 괜히 아프지도 않은 검사에 거부감만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해서 우선 안심부터 시켜 줘야만 했다.

소아과 의사로 오래 일하다 보면 자연히 체득하게 되는 법이었다.

“아프진 않을 거야. 그냥 붙이는 거거든? 봐 봐. 손으로 만져 봐.”

“아…….”

“그렇지? 하나도 안 아프지?”

“네.”

물론 병원 생활을 오래한 아이들은 어지간한 통증에는 무감해지기도 했다.

7살도 안 된 애들이 주사 맞는다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팔을 들이밀기도 했다.

레지던트 때까지만 해도 그런 아이들을 보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렇게 어린 아이들이 고통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을까?

김수민 교수는 덤덤한 얼굴의 아이의 머리를 슬쩍 쓰다듬어 주고는, 다른 통을 집어 들었다.

“이건 풀이야. 그냥 붙이면 이게 안 붙거든? 그래서 머리에 풀을 좀 바를 거야. 좀 차가워.”

“네. 괜찮아요.”

“그래. 그래, 그럼 이제 붙일게.”

김수민 교수는 괜찮다는 아이의 머리에 풀을 발랐다.

하얀 풀이었는데, 접착력이 강하면서 동시에 물과 비누로 쉽게 씻겨 내릴 수 있는 일종의 신소재 물질이었다.

당연히 인체에 무해하다는 인증도 받은 몸이었다.

그런 놈들이 으레 그러하듯 꽤 비쌌다.

그렇다고 아낄 필요는 없었다.

어떤 병원은 무조건 얼마만큼만 짜 쓰라는 원칙까지 내려온다고 하는데, 태화는 적어도 이런 것에까지 쩨쩨하게 굴지는 않았다.

아끼다 떨어져서 병원 이미지 망치느니 단단히 붙여 놔서 좋게 소문나는 게 훨씬 이득이라는, 지극히 기업 병원다운 판단에서였다.

“좋아.”

하여간 시술하는 입장에서는 무조건 좋은 일이었다.

치덕치덕 바르고 하니까 정말로 잘 붙었다.

아이도 덜 불편하고.

시간 자체가 거의 안 걸리니 당연한 일이었다.

“됐다. 음……. 잘 나오나?”

김수민 교수는 그렇게 뇌파 검사 기기를 붙인 후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뇌파는 정상적으로 아주 잘 나왔다.

지금은 이상도 보이지 않았다.

약간 아쉬웠다.

‘기왕 붙인 거…… 두통이 있을 때 뭔가 이상이 있어야 하는데.’

의사라면서 이상이 있기를 바라는 게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분명 증상은 있는데 계속 정상이 나오는 것만큼 환장하게 만드는 일도 드물었다.

제발이라는 말이 튀어 나갈 뻔했을 지경이었다.

“이제 기다리면 됩니다.”

“음……. 오래 기다려야 될까요?”

김수민 교수는 모니터링이 잘되는지 확인을 하고는 수혁을 비롯한 나머지를 돌아보았다.

수혁은 그런 김수민 교수를 마주하고는 물었다.

뇌파 검사라고 해서 만사 형통인 것은 아니었다.

심전도와 같이 증상이 있어야만 확인이 가능했다.

생각보다 이상이 있는 게 확실한데 꽝이 나오는 경우가 그래서 종종 있었다.

“그건 알 수 없죠. 아이 증상이…….”

김수민 교수는 이제 아이를 돌아본 채 말을 이었다.

말끝을 조금 흐리면서였는데, 분명히 입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증상이 점점 심해지고만 있어서였다.

환자나 보호자도 이런 상황이 되면 갑갑하겠지만 책임을 지는 입장인 교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태화는 대한민국에서만큼은 칠성, 아선 등과 더불어 4차 병원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안 되면 뒤가 없다고 봐야 했다.

다른 병원으로 쏘기가 어려웠다.

김수민 교수의 스트레스가 어떨지 대강은 짐작이 가능할 터였다.

“점점 안 좋아지고 있어서 빈도도 늘고는 있어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 말에 아이도 보호자도 얼굴이 어두워졌다.

뭐라도 나오면 좋겠는 건 의사나 보호자나 마찬가지였으나, 안 좋아지고 있다는 말이 좋게 들리진 않아서였다.

“음.”

수혁은 그 얼굴들을 보면서 차마 잘됐다는 말은 못하고 바루다에게만 슬며시 물었다.

‘야, 진짜 뭐가 있지? 이거…… 안 나오면 애한테 너무 미안한데.”

[좀 기다려 보라니…… 어.]

그때 뇌파에 변화가 일었다.

고개를 확 돌려 보니, 아직 아이는 별반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시간의 전후 관계로 보면 뇌파의 변화가 증상보다 먼저 왔다는 얘기였다.

이렇게 되면 잘 봐야 했다.

정말로 뇌파의 변화가 두통의 유일한 원인일 수도 있다는 얘기였으니까.

“아이 잘 봐 주세요.”

뇌파의 변화가 있었다고 해도, 아직은 수혁 정도나 되야 판독이 가능한 수준의 변화였다.

수혁조차 바루다의 분석 결과가 있어야 볼 수 있었으니 다른 이들은 그저 어리둥절했다.

특히 김수민 교수가 그랬다.

소아 신경 분과 파트의 교수도 모르겠는데 그걸 잡았다고?

“갑자기요?”

“네. 곧…….”

“아. 이거.”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뇌파의 변화가 점점 명확해졌다.

그리고 그 변화가 어떤 패턴을 가리키기 시작하자, 아이가 두통을 호소했다.

“으, 으!”

보통 이렇게 되면 근처에 있던 의료진들은 의식하지 않아도 아이에게 달려가게 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모두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모니터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극파…….”

“전신 극파입니다. 뇌전증이에요.”

수혁은 선명히 그려지고 있는 뇌파를 보며 입을 벌렸다.

남들이 보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적어도 수혁만큼은 이걸 예상했다고 보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에 진단을 이끌어 낸 것은 오로지 바루다였다.

[네, 뇌전증의 유일한 증상으로 두통이 나타나는 케이스입니다.]

‘이럴 수가 있나?’

[이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케이스 리포트 된 적은?’

[우리가 하면 처음이겠죠.]

‘허.’

세상에서 처음 있는 케이스를 지금 눈앞에서 보게 된 순간이었다.

수혁도 놀랐지만, 소아 신경을 전공한 김수민 교수는 아예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어, 어.”

그 정도가 아니라 한동안 제대로 된 말도 못 꺼냈을 지경이었다.

“으, 으!”

하지만 아이의 고통을 눈치채자마자 처방은 내렸다.

“발…… 발프로익 애시드 줘.”

일반적인 두통에서 쓰는 약은 결코 아니었다.

이미 약의 단계가 많이 넘어와 있기는 했다.

타이레놀을 넘어, 케토놀락이라는 꽤 역가가 높은 진통소염제도 넘어서 메토클로프미드와 같은 약을 같이 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발프로익 애시드는 아예 궤를 달리하는 약이었다.

“어……. 발프로익이요?”

해서 전공의, 즉 주치의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직 레지던트고 또 수련받는 입장이다 보니 딱 뇌파를 보자마자 이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지 못해서였다.

드문 일은 아니었다.

원래 심전도니 뇌파니 하는 것들은 방대한 의학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에 속했다.

“어, 어. 경련이야. 뇌전증이라고.”

“아……. 네! 알겠습니다.”

뇌전증.

예전엔 간질 발작이라는 진단명으로도 불렸던 병이다.

대개는 경련으로 증상이 나타나고, 종류에 따라서는 의식 소실도 가능한 병이다.

당연히 뇌의 어떤 부분이 자극되고 또 억제가 되느냐에 따라 경련이 되는 부위가 달라졌다.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는 두통을 일으키는 부위만 경련이 생기는 것도 가능은 하다는 얘기였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우연에 우연이 중첩돼야 하기에 확률이 극히 낮았다.

하지만 눈앞에서 보고 있는데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단 말인가.

“바로 줘!”

“네!”

김수민 교수는 레지던트와 담당 간호사가 병동 스테이션으로 뛰어갔다가 돌아오자마자 바로 줄 것을 요구했다.

뭔가 달라진 분위기에 보호자들은 기대했고, 발프로익 애시드는 그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약이 거의 들어가자마자 아이의 얼굴이 편해졌다.

이때까지 쓰던 약하고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

“어.”

“안…… 안 아파?”

“응, 안 아파.”

“아…….”

엄마 쪽은 아예 다리가 풀리는지 뒤에 있던 침대에 주저앉았다.

아이는 그저 감쪽같이 사라진 통증이 신기하고 또 기분이 좋기도 한지 웃으며 서 있었다.

아빠는 그런 아이가 대견하다는 듯 머리를 쓸어 주었다.

혹여나 머리에 붙인 게 떨어져 진단이나 치료에 방해가 될까 아주 주의를 하면서였다.

“이거…… 이제 사라지는데……. 아까 분명 극파였지?”

“네. 전신 극파였습니다.”

“그럼 경련인데……. 이럴 수도 있나?”

“이론적으로 가능합니다. 용어를 만들어 보면……. 글쎄요. ictal epileptic headache 정도가 될까요?”

“그래? 발표된 적이 있나?”

“제 기억에는 없어요. 보지 못한 건지 아니면…….”

그사이 김수민 교수는 이기자 교수와 함께 토의에 들어갔다.

워낙에 기이한 케이스가 된 참이라 그랬다.

이기자 교수야 물론 감염 파트지 소아 신경 파트는 아니긴 했으나, 그래도 관심이 갔다.

이기자 교수가 한창 수련받을 때만 해도 딱히 분과가 나누어져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그랬다.

대강은 다 안다 이 말이었다.

“이게 세계 최초일 수도 있겠는데?”

“네. 지금 검색해 봤는데 일단 증례에 없습니다. 정말 없었는지…… 아니면 원인불명의 두통으로 놓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이건 의심해 보고 뇌파 검사해 보지 않는 한 절대 진단이 안 돼.”

“네. 그렇죠.”

생각보다 아직도 진단되지 않은 채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들이 많았다.

그중 일부는 진짜 현대 의학의 한계에 의한 것이겠으나 또 일부는 그저 의료진의 역량 부족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러지 않았던가.

수혁이 없었다면 김수민 교수는 이 질환을 진단하지 못했거나, 진단했다 하더라도 꽤 오랜 시간을 환자의 고통과 함께 허비했을 터였다.

그제야 수혁 생각이 난 김수민 교수는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수혁을 돌아보았다.

어제도 그랬지만 이번 진단은 정말이지 놀라웠다.

“아,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래서 그런가 고개를 숙이는 폼이 정중하기 짝이 없었다.

이기자 교수로서는 내 새끼가 남한테 이렇게 신세 지는 게 달갑지만은 않았으나, 그렇다고 꿍하지는 않았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했다.

이수혁은 진짜 천재였다.

그것도 지금껏 이기자가 천재라고 불렀던 이들에게서 그 호칭을 거둬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천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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