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화 같이 살려구 (1)
자연히 시간이 좀 지나자, 모두의 시선이 수혁을 향하게 되었다.
누가 보더라도 환아가 입원한 곳은 소아과지만 진단한 것은 수혁인 상황이었기에 그랬다.
물론 김수민 교수도 허당이 아니고 또 소아신경을 전공한 만큼 어떻게든 진단해 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이렇게 빨리는 절대 불가능했을 터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교수님……. 우리 애가 덕분에 살았습니다…….”
교수도 보호자도 연신 수혁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처음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는 정말이지 어쩔 줄을 몰랐더랬다.
특히 바루다가 다 하고 자신은 그저 바루다가 계산한 값을 출력만 했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않았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는 게 일이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으나, 뭐가 되었건 누군가 아픈 사람을 치료해 준 것은 감사 인사를 받아도 되는 일 아니겠는가.
“네, 하하. 다행이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예방을 위한 약을 꾸준히 복용하면 더는 증상이 없을 겁니다. 다행히 경련으로 치면 그렇게 심각한 형태는 아니에요.”
해서 수혁은 아주 자연스럽게 감사 인사를 받았다.
당연히 그 누구도 그런 수혁을 고깝게 여기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거니와, 이 자리에 있는 구성원들 자체가 원래 그렇기도 했다.
“역시! 야, 이놈들아 뭐 하냐. 교수님이 이렇게 어려운 거 진단했는데.”
“어어.”
“그래, 헹가래 하자. 헹가래!”
일단 이현종을 필두로 한 내과 사람들은 벌써 수혁을 이리저리 던져 대고 있었다.
솔직히 이현종 말고는 헹가래까지 할 일인가 싶어 했으나, 그 명을 거역하기엔 너무 높은 사람이었다.
“와아아!”
게다가 3년 차쯤 되면 이런 일에 익숙해지기도 했다.
딱히 바루다의 도움이 없더라도 출근하는 교수 얼굴만 봐도 기분을 알 수 있을 지경이 된다 이 말이었다.
그리고 3년 차는 레지던트들에게 있어 왕이나 다름없었다.
병원 시스템 때문이었다.
물론 아주 어렵거나, 아주 주요한 환자 같은 경우엔 주로 교수가 회진 돌면서 가르쳐 주지만 기본에 해당하는 건 위 연차에게 배웠다.
그리고 벌도 위 연차한테 받았다.
“와아아!”
지금 1년 차만 해도 얼마 전 3년 차에게 벌당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다들 이 이상한 일에 진심이었다.
“뭐래.”
“누구 상이라도 받았나?”
“좋은 일 있나 보다.”
워낙에 소란을 피우고 있는 데다가, 환자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은 고맙다고 하고 울고 있으니 지나가던 다른 환자나 보호자들도 멀뚱히 서서 박수까지 치기 시작했다.
‘하.’
[즐기십쇼.]
‘그럴 수가 없는데.’
수혁은 쪽팔렸으나, 그래도 소용없었다.
수혁이 땅 위에 다시 두 발로 서게 된 것은 무려 5분 정도가 흐른 다음이었다.
그것도 이현종이 팔이 아파서 그만둔 것이지, 절대로 자의는 아니었다.
“후.”
“자, 그럼 축하는 됐고.”
물론 이현종은 마냥 정신 나간 노인네처럼만 굴지는 않았다.
딱 축하가 끝나자마자 센터장의 눈으로 돌아와 말을 이어 나갔다.
“케이스 리포트 교신 저자는 김수민, 1저자는 이수혁. 이렇게 가지.”
아주 당당히 1저자를 요구했다.
무례한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당함을 넘어 사려 깊다고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원래 이만큼 기여를 했으면 1저자는 당연한 것이기에 그랬다.
이현종 성정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교신 저자를 준 게 다행이었다.
“아, 그래. 그게 좋겠네.”
아마 이기자 교수가 소아과여서 그랬을 터였다.
그걸 모르진 않는지, 이기자 교수 또한 웃음을 띠운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가 윗사람들 사이에서 이렇게까지 화기애애하게 진행되는데 김수민 교수라고 딴소리를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김수민 교수가 듣기에도 이건 그럴싸한 제안이었다.
또 될 수 있으면 하루라도 빨리 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세계 최초다. 세계 최초.’
교수가 되었다는 건, 뭐가 되었건 그만큼 명예욕이 있다는 얘기였다.
로컬에 나가는 것에 비해 금전 보상이 작으면서도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더 치열하게 살아야 되는 만큼 충족되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당연히 더 어려운 환자를 봐야 하는 만큼 보람도 더 있기야 하겠으나 내면 깊숙한 곳을 살펴보면 다들 어느 정도는 명예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그렇다 보니 세계 최초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늦으면 또 다른 놈이 낼 수도 있어.’
괜한 걱정을 하는 게 아니었다.
현대 의학의 발전은 묘한 면이 있어서 어디선가 최초로 진단이 되고 나면 아주 근시일 내에 다른 곳에서도 진단을 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먼저 진단한 사람이 케이스 리포트나 논문 제출이 늦어 최초라는 타이틀을 뺏기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하지만 수혁은 침착했다.
‘이건 너 아니었으면 못 해.’
[그렇죠.]
자신이 한 거였다면 수혁 또한 초조했을 터였다.
바루다와 함께하는 수혁이야 당연히 세계 최고 수준이겠으나, 바루다를 떼고 놓고 보면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기에 그랬다.
하지만 이번 일은 바루다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그런데 너 대체 어떻게 안 거야? 경련의 유일한 증상으로 두통이 가능하다, 이것만으로 설명하기엔 너무 확신에 차 있었잖아.’
[아이 얼굴을 재생하죠.]
바루다와의 대화를 이어 나가다 보니 더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 바루다는 아이가 고통스러워하던 당시의 영상을 보여 줬을 때라고 해야 더 맞는 말일 터였다.
‘아…….’
[분석하면 눈동자가 정확히 같은 시간마다 좌측으로 튑니다.]
‘우측 대뇌에서 극파가 있었으니……. 너는 방향도 알고 있었구나.’
[네. 아마 이때마다 0.1초간 의식 소실이 있을 겁니다. 의식 소실이라기보다는 통제에서 벗어나는 느낌일 텐데……. 아이니까 그런 느낌을 상세히 서술하기는 어렵겠죠.]
‘그렇군……. 이런 게 가능하다니……. 나랑 똑같은 걸 보는 건데.’
[저는 분석 시에 더 느리게 재생할 수 있으니까요.]
이걸 다른 곳에서 의심해서 진단할 수 있다고?
이번 케이스 리포트가 발표된다면야,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에서 뇌파 검사하는 것이 일종의 루틴이 되거나 최소한 근거를 갖게 될 테니 조금쯤은 확률이 올라가겠지만.
그런 게 없고서는 불가능할 터였다.
[수혁.]
‘왜.’
바루다는 수혁이 감탄하고 있는 걸 가만히 보고 있다가 불렀다.
수혁은 그런 바루다를 돌아보았다.
딱 보자마자 이놈이 뭔 소리를 하겠구나 하는 감이 왔다.
[이제 절 가지고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아시겠죠?]
‘음.’
심정적으로는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방금 기적에 가까운 수준의 진단 능력을 본 참 아닌가.
수혁은 비록 종종 싸가지가 없을 때는 있었지만 양심이 없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해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그래. 큰 행운이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십쇼. 케이스 초안 작성은 본인이 한다고 하시고요.]
‘그건 왜. 소아과 환잔데, 그래도.’
[제가 있으니 시간을 극단적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동의합니까?]
‘그래……. 그렇지.’
[그럼 가서 말하세요.]
‘알았다.’
그 뒤로도 바루다의 꼴값은 계속되었다.
그때마다 울컥했지만, 하여간 방금 보여 준 것이 인상적이기는 했기에 일단은 시키는 대로 했다.
김수민 교수는 당연히 즐거워했다.
수혁의 능력은 이제 태화 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진단하는 능력도 뛰어나지만, 논문도 아주 잘 쓴다는 것 정도는 누구나 알았다.
특히 이현종과 뚝딱해서 NEJM에 낸 일화는 유명했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검수만 좀 잘해 주세요. 디스커션도……. 아무래도 제가 소아신경의 미래를 논하기엔 부족하니까요.”
“아유, 겸손도. 아무튼, 그건 걱정 마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네.”
해서 수혁은 논문을 언제까지 주겠단 약속까지 남긴 채 소아과 병동을 빠져나왔다.
이현종, 나머지 내과와 함께였다.
의외로 이기자 교수는 소아과에 남았다.
“아빠, 근데 이기자 교수님…….”
수혁은 그렇게 몇 걸음 더 걸어 나와서 물었다.
무척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어어. 그래, 내가 말해 줄게.”
그러나 이현종은 그렇지 않아도 아들에게만큼은 무슨 일이 있었고,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다 말해 줄 참이었기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일단은 같이 살려고.”
“네, 네?”
“아니, 보니까 이기자 교수 딸 있잖아. 지혜.”
“아, 네.”
이제 남의 딸 이름도 그냥 막 턱턱 부르는구나 싶었다.
‘아닌가? 남의 딸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생판 남인 수혁조차 아들이라고 대외 공표했을 만큼 이상한 데서 열린 사람이지 않은가.
어쩌면 이미 지혜라는 친구도 자신이 낳은 딸이겠거니 하고 여기고 있을 수도 있었다.
수혁이 복잡한 머리로 생각을 이어 나가는 동안 이현종이 말을 이었다.
“걔도 이제 나가 산대. 취직해 가지고.”
“아…….”
“애가 기특해. 지 엄마 빼닮았는지 독립심이 투철해. 알바 한 거 모아 둔 돈만으로도 회사 근처 원룸 전세 구할 수 있다더라.”
“그래요? 대단하네.”
“하여간 그래서 이기자 교수 혼자 넓은 집 살게 생겼거든. 나도 혼자 오래 살아서 아는데 넓어 봐야 적적하기만 하고……. 그래서 걍 합치려고.”
“아, 네…….”
이런 말을 그냥 이렇게 복도에서 해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만 들었다.
수혁은 저도 모르게 같이 걷고 있는 레지던트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음. 음.”
레지던트들도 그랬다.
녀석들은 누가 봐도 들리는 거 뻔히 보이는데, 모르는 척하느라 조금 뒤떨어져 걷고 있었다.
신경 안 쓰는 건 이현종뿐이었다.
“인테리어도 새로 하고 가구도 새로 사려고.”
“아……. 그 뭐…… 신혼 같은 거예요?”
“신혼? 하하, 난 안 해 봤으니까 결혼식부터 해야지.”
“그…… 사귀신 지 얼마 안 되지 않았어요?”
“안 사이는 수십 년이잖아.”
그 수십 년간 말도 제대로 안 해 보지 않았나요? 라는 말이 입 안에서 멤돌았으나 차마 입 밖에 내진 못했다.
말하는 이현종의 얼굴이 너무 밝아서였다.
순간 후광이 있나 싶을 지경이었다.
바루다의 말까지 듣고 난 후에는 더더욱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수혁. 이현종은 수십 년간 안 본 게 아니라 짝사랑한 겁니다. 수혁의 데이터를 토대로 유추해 볼 때, 이현종은 이기자 교수의 모든 취향을 알고 있다고 봐도 좋습니다.]
‘왜 꼭 내 데이터를 걸고넘어져?’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수혁은 제 유일한 입출력자이니까요.]
‘후.’
화가 나기는 했지만 하여간 맞는 말 같기는 했다.
해서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이현종이 계속 말을 이었다.
“이따 끝나면 가구나 좀 봐 줘라. 젊은 느낌으로 가자는데 당최 그게 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저도 뭐…….”
“그래도 나보단 낫겄지.”
“그래요, 뭐. 가구…… 보러 가죠. 근데 오후에 들어온 케이스는 보고 가실 거요?”
“응? 당연하지. 내가 센터장인데. 언제 일 대충 하는 거 봤어?”
수혁은 어제오늘 대충 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안 했습니다 라고 눈으로 말했다.
이현종은 초능력이 없으니 당연히 알아먹지 못하고 그대로 센터 안으로 들어섰다.
한데 센터 안에는 몇몇 사람들이 와 있었다.
초조한 얼굴을 하고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