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6화 같이 살려구 (2)
“뭐야?”
이현종은 센터 내에 들어서면서 물었다.
별로 달가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안에 들어와 있던 사람들은 의료진이 아니었다.
죄다 새카만 양복을 입고 있었다.
“아, 이현종 원장님.”
“나 원장 아닌데, 이제.”
그들 중 하나가 이현종을 보고 인사를 했다.
머리가 히끗한 사람이었는데 뭐라 딱 짚어 말하긴 어려우나 어딘지 지위가 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입고 있는 옷부터 넥타이 그리고 머리 넘긴 모양까지 다 그랬다.
물론 이현종은 그따위 허울에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태도 변화는 없었다.
“여기 진료 보는 병동이고 센턴데……. 누구 보호자라도 되시나?”
오히려 더 까칠하다는 느낌도 있었다.
이현종은 원래 이랬다.
진료에 방해가 될 거 같으면 일단 화부터 냈다.
지금은 그나마 나이 들면서 많이 나아진 것이었다.
“아이, 형.”
그때 양복쟁이들 사이에 가려져 있던 신현태가 나타났다.
평소와는 달리 머리에 뭘 좀 뿌렸는지 반짝거림이 있었다.
그냥 안 뿌리는 게 나았을 뻔한 수준의 꾸밈이었다.
하여간 현직 원장인 신현태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건 심상찮은 일이었다.
“뭐야. VIP야?”
“응. VIP…….”
이현종이 그래도 전직 원장이지 않았나.
척하면 척이었다.
동시에 이현종은 정 있는 인간이었다.
제일 친한 동생인 신현태 얼굴을 보고서도 계속 틱틱 댈 수 있는 인간은 못 된다는 얘기였다.
“뭔데?”
“여당 원내대표…….”
“아, 당신한테 물은 게 아닌데.”
물론 진료를 방해하려고 드는 사람한테는 가차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옷깃에 금배지를 달고 있는, 그러니까 국회의원은 조금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자세히 보면 민망하다기보다는 조금 화가 난 듯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 오기 전에 들은 말이 있었다.
‘이현종이…… 심장에서는 진짜 최고라고 했지.’
그러니 반드시 이 사람에게 진료 청탁을 하라는 말도 들었다.
아무리 재선에 성공한 의원이라고 해도 라인을 제대로 타서 삼선, 그러니까 중진의원까지 올라가려면 원내대표 말은 정말이지 잘 들어야 했다.
해서 그는 별말 없이 뒤로 물러섰다.
덕분에 신현태는 곧장 환자에 관해 얘기할 수 있었다.
“마침 잘됐어. 수혁이도 있고 하니까…….”
“응, 얘기해 봐. 지금 급한 환자 없으니까.”
“어어. 69세 여자 환자야. 원내대표 어머니라니까 그쯤 됐지, 당연히.”
신현태는 이현종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둘이 붙어 다닌 세월이 벌써 몇 년이란 말인가.
해서 역린이라 할 수 있는 부분도 잘 알았다.
이 인간은 괴짜였다.
그중에서도 좀 좋은 괴짠데, 그래서 진료 부탁할 때 그 사람이 실은 누구 엄마고, 아빠고 하는 걸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도 까는 수가 있었다.
물론 원장까지 하고 난 후에는, 그리고 수혁을 밀어줘야겠다고 결심하고 난 후에는 좀 달라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굳이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었다.
“69세……. 나이는 애매한데.”
해서 신현태는 아주 자연스럽게 환자에 대한 신상을 흘렸다.
다행히 이현종은 나이에 꽂혀서 그냥 넘어갔다.
[원내대표면 뭡니까?]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엄청 높은 사람일걸. TV에 얼굴도 자주 나오고.’
[그럼 열심히 봐야겠네요?]
‘그렇지.’
그리고 속물인 수혁과 바루다는 마음을 다잡았다.
신현태는 그런 수혁의 눈빛을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심장에 있어서만큼은 아직 이현종이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수혁이 커다란 힌트를 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이놈의 최선을 끌어내는 건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한 2년 전인가…… 목욕탕에서 일어나면서 의식 소실이 있었대. 그때 칠성 병원 응급실에서 시행한 brain CT에서는 이상 없다고 들었고.”
“그것만 했대? 목욕탕에서 일어나면서 의식 소실이면……. 머리보다는 심장을 의심했어야 하는데? 2년 전이라 해도 67세면 나이 꽤 있잖아?”
요새 60대가 노인이냐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법이었다.
67세의 심장은 당연히 젊은이들의 심장보다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죠. 근데 그때는 그것만 하고 넘어갔다고 합니다.”
“하여간 칠성 놈들……. 병원만 삐까번쩍하지, 내실이 없다니까.”
“형……. 남들도 있는데 그런 말은 좀.”
“내 공간에 지들이 들어온 건데 왜 내가 조심해야 해.”
“아.”
듣고 보니 또 맞는 말인 거 같았다.
왜 침입자에게 맞춰야 한단 말인가.
어쩐지 저격당하는 기분이 든 재선 의원은 조금 더 뒤로 물러섰다.
보통 금배지 달고 있으면 제아무리 지역구 민원인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함부로 대하진 못하는데, 이 사람은 달라도 좀 다른 인간이었다.
압도적인 실력 덕인데, 재선 의원은 불행하게도 실력이 아니라 아부와 아첨으로 여기까지 온 인간이었다.
해서 이현종을 이해하지 못했다.
‘존나 무례하네? 두고 봐, 이 새끼.’
소인배라 그런지 원한도 빨리 품었다.
신현태는 그런 낌새를 느꼈기에 조금 불안했지만, 한편으로는 또 느긋하기도 했다.
태화 의료원의 전직 원장 그리고 현직 센터장이란 게 그리 가벼운 자리는 아니어서였다.
게다가 아들인 수혁 또한 엄청난 뒷배를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아재……. 아서요. 그러다 다칩니다.’
신현태는 잠시 기도를 한 후,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때 머리 괜찮다고 듣고 그냥 지내다가 최근에 두근거림이 있대. 하루 3, 4회 정도?”
“지속은 얼마나 되는데.”
“2에서 10초 정도.”
“음……. 부정맥일 가능성이 굉장히 큰데. 서맥 아냐?”
“어.”
신현태는 역시 이현종은 보통내기가 아니라 생각했다.
전해 받은 의뢰서에 적혀 있던 내용을 보지도 않고 읊어 대고 있어서였다.
“맞아. 서맥이래. 그래서 페이스메이커 달자고 했는데 거부해 가지고…….”
“뭐……. 나한테 설득해 달라 이거야? 나 그런 건 진짜 못하는데.”
“알지. 나도 알지.”
“너무 격렬하게 고개 끄덕이는 거 아니냐, 너? 기분 되게 나쁜데.”
“사실이니까 그렇지.”
“근데 왜 왔어, 이 사람들은.”
이현종은 역시나 언짢다는 얼굴로 양복쟁이들을 돌아보았다.
병원인데 칙칙하게 새카만 양복 입고 있는 것도 이젠 마음에 안 들었다.
누구 하나 죽으라고 고사 지내는 것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게다가 나한테 설득을 하라고?
이현종은 물론 좋은 의사고 환자와 보호자를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천재라 일반인과는 조금 많이 엇나가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어릴 땐 이 인간들이 왜 이러나 했지만, 연륜이 쌓인 지금은 자기한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렇다고 고치려는 노력을 하진 않았다.
대신 좋은 의사는 착한 의사가 아니라 뛰어난 의사라고 생각을 바꿨다.
“왜 왔냐고. 난 안 한다는 사람 하게 하는 재주 없어.”
덕분에 이렇게 뻔뻔해질 수 있었다.
신현태는 잠시 좋아하는 형의 아주 부끄러운 모습에 입을 벌리고 있다가, 부탁받은 말을 간신히 건넸다.
“당연히 나도 그런 건 형한테 안 바라지.”
“그럼 뭔데.”
“혹시 다른 병일 가능성은 없을까? 한번 봐줘 봐.”
“병력만 들으면 그냥 서맥인데. 나이도 그렇고…….”
“아, 그래도. 원장 체면 한번 살려 주라. 이거 김다현 사장이 직접 전화한 사안이야.”
“그래?”
이현종에게 김다현은 일종의 은인이었다.
본인 때문이 아니라 수혁 때문이었다.
김다현을 먼저 도와준 게 수혁이기는 하지만, 은혜를 베풀었다고 다 갚는 세상은 아니지 않은가.
그랬다면 배은망덕이라는 말이 없었을 터였다.
‘그 사람 부탁이면 들어주긴 해야지. 우리 수혁이 바로 교수 만들어 주고…… 센터까지 만들어 줬는데.’
다 수혁의 능력을 봐 가면서 한 일이겠지만 하여간 도움이 된 건 사실이었다.
해서 이현종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면 한번 봐야지. 서맥은 진단 어디서 됐는데.”
“그것도 칠성이지. 지금 여당이 칠성 쪽이랑 사이가 좋잖아.”
“칠성이 봤어? 그럼 틀릴 가능성이 크지.”
“그…… 그래. 그렇지.”
태화와 칠성은 서로 적인 건 맞았다.
하지만 구성원끼리도 원수는 아니지 않은가.
특히 신현태는 선비 스타일이라 다른 병원 사람이라고 해도 이유도 없이 비난하는 건 좀 아니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현종의 눈치를 살펴야 하기에 맞장구를 쳤다.
“칠성 오진율이 우리보다 높기는 하잖아.”
“태화에 오진이 있어?”
“이, 있지. 없는 병원이 어딨어, 형.”
“오진 한 새끼들 다 오라고 해.”
“어…….”
물론 대화가 의도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이현종은 기인열전에 나가도 좋은 사람이기에 그랬다.
“일단 그럼 환자 오라고 할까요?”
다행인 것은 신현태 말고도 제정신인 의사가 하나 더 있다는 점이었다.
“어, 그러자.”
신현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수혁을 돌아보았다.
하여간 요새 얘 없으면 무슨 낙으로 사나 싶었다.
원치도 않던 원장직을 맡게 되어 지금과 같은 이상한 일도 하게 된 마당인데, 그나마 수혁이 있어 좋았다.
‘심장아, 나대지 말고.’
신현태는 잠시 왼쪽 가슴을 쓸어내린 후 재선 의원을 돌아보았다.
불만 어린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던 그는 급히 표정을 고치고 신현태를 마주했다.
“아, 네. 원장님.”
“오시라고 해 주세요. 바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근데…….”
“근데요?”
“들으셔서 알겠지만 아주 협조적이진 않습니다. 일단 안 한다고 하는 경우가 많으세요.”
“뭐……. 그런 건 걱정 마십쇼. 익숙합니다.”
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정말 별별 사람을 다 만나기 마련이었다.
그중에서는 아주 협조적인 환자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아니, 비협조적인데 그치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우스갯소리로 내과 의산데 나이 50 넘도록 멱살 안 잡혀 봤으면 진료 열심히 안 본 사람이라는 말도 할 정도였다.
수혁이야 아직 그런 경험이 없었지만, 학생 때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채 강의실에 들어섰던 교수가 아직도 눈에 선했다.
‘나이 50에 양복 입고 일하는데 멱살 잡히는 직업도 흔치는 않죠.’
교수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해서 더 인상 깊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별일도 아니었다.
그저 응급실에서 진료 보던 환자가 의사 늦게 온다고 화를 내다가, 좀 높아 보이는 사람이 오니까 멱살을 잡았던 것.
덕분에 진짜 급한 환자를 못 보게 되었을 수도 있다고 들었다.
“그래, 뭐. 익숙하지. 특히 심장 보다 보면……. 하여간 오라고 해요. 한번 봐 보지 뭐.”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보니 신현태나 이현종 정도 되는 의사들은 이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지간 하면 대처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아, 하기 싫다는데 왜 자꾸 사람을 귀찮게 해!”
“윽.”
하지만 어지간하지 않은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그걸 잠시 망각했던 둘은 곧 센터에 모습을 드러낸, 드러내면서 동시에 함께 온 비서인지 누구인지 모를 사람의 뺨을 날린 노인을 마주했다.
‘형 어쩌지? 나 맞는 건 좀.’
‘나라고 좋니?’
‘하.’
‘좆 됐네. 명색이 의산데 환자한테 화는 못 내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