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8화 천재를 쥐어짜면 (1)
이기원 의원은 두 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음료수니 뭐니 하는 것들이었는데, 꽤나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가 법이 바뀐지 몰라서……. 요샌 병원에서 이런 거 안 되나 보죠?”
보아하니 병동 스테이션 간호사들에게 갔다가 이미 한번 거절을 당한 모양이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보호자나 환자 본인이 고생한다고 주치의나 간호사들에게 이런저런 먹을 것을 쥐어다 주는 모습이 그리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청탁금지법이 생기면서 모두 불법으로 간주되었다.
구체적인 안이 있다지만 태화는 구설수에 오르는 걸 극도로 조심하기에 그냥 전면 금지해 버렸다.
하여간 이기원 의원의 질문만 듣고도 대략 사정을 파악한 수혁이 제일 먼저 답을 해 주었다.
“아, 네. 레지던트들 정도는 괜찮습니다.”
“아, 그래요? 주치의인데요?”
“4년 계약직이라…….”
“그렇군요. 계약직이군요. 그것도 몰랐습니다.”
이기원 의원은 그래도 잘됐다는 얼굴로 음료수 박스를 레지던트 중 하나에게 건네주었다.
수혁은 의국에 놓고 먹으라고 하고는 이기원 의원을 돌아보았다.
“환자분 때문에 오신 거죠? 조현희 님 때문에요.”
“네네. 그…… 얘기는 들었습니다. 저희 어머님이 좀 별나서,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아들은 엄마랑 영 딴판이라더니, 정말인 모양이었다.
이기원 의원은 정말 죄송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있었다.
이현종은 그런 이기원 의원이 마음에 들었는지, 허허 웃었다.
“아뇨, 아프면 그럴 수 있죠.”
게다가 이현종은 상대하기 싫은 것일 뿐, 조현희 자체가 싫은 것도 아니었다.
사람이 아프다 보면 좀 이상해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떄리거나 하는 건 용납할 수 없으나 싸가지 좀 없는 거 정도는 얼마든지 괜찮았다.
물론 자신의 힘이나 권세를 무기로 말도 안 되는 걸 요구하는 순간 딱 선을 긋기는 하겠지만, 하여간 이현종은 대개의 경우 환자에게는 오냐오냐하는 편이었다.
“아이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성에서는 도저히 처치를 못 하겠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그래도 역시 태화가 역사가 깊어 그런가 여기서는 좀 더 안정을 취하고 있는 거 같더라고요……. 왜 그런가 했더니 이현종 교수님 같은 분이 계셔서 그런가 봅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감사합니다. 아무튼, 어떤게 궁금하십니까?”
이기원 의원은 그 후로도 자연스럽게 이현종을 치켜세워 주고는 말을 이었다.
꽤나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저…… 저희 어머님 진단명이 바뀔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칠성에서 내린 진단이 바뀔 가능성이 있겠냐, 뭐 이런 얘기였다.
보호자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제 국내 메이저 병원들은 대부분 비슷한 수준에 오르지 않았나.
어느 한쪽에서 실수했을 것을 기대하기엔 다들 일류였다.
‘부정맥은 좀 어렵긴 하지.’
분야에 따라서는 가능성이 있기는 했다.
여전히 현대 의학에는 한계가 있어,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개인의 역량으로 커버해야 하기도 하니까.
‘근데 칠성에는 그 자식이 갔단 말이지.’
이현종은 잠시 잃어버린 제자 놈을 떠올렸다.
자리 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10억에 홀랑 넘어가서는 이제는 연락도 하지 않았다.
‘박국진 개새끼.’
이현종으로서는 후임도 잃고 제자도 잃은 셈이었다.
“가능성은 있죠.”
분하다 보니 말이 막 나왔다.
여느 때 같았으면 그래도 겸손을 떨긴 했을 터였다.
이현종이 자유분방한 사람처럼 보여도, 의학적인 상식을 넘어가진 않으니까.
하지만 칠성의 심장 내과는 논외였다.
그 새끼들은 아니, 그쪽은 원수였다.
“그래요?”
“네, 그래서 검사는 다 해 볼 겁니다.”
“제가 듣기론…… 기분 나빠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식 된 도리로 이것저것 찾아보기도 하고, 여기저기 물어보기도 해서…….”
“아, 네. 얼마든지요.”
그것과는 별개로 이현종은 보호자 상담에는 꽤 열심을 내는 편이었다.
신현태에 비하면 잘 못하는 편이긴 하지만, 태도는 더 좋다고 자부했다.
실력 좋은 의사가 진짜 의사라고 노선을 변경하긴 했어도 아예 포기한 건 또 아니어서였다.
게다가 지금은 옆에 수혁도 있었다.
여느 아버지가 그러하듯 이현종도 자식 앞에서만큼은 최고이고 싶었다.
“서맥이…… 우리 어머니 나이 때는 그렇게 드문 게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맞나요?”
“맞죠. 페이스메이커까지 달아야 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진 않은데……. 그래도 심심치 않게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 어머님 증상이 서맥이랑 거의 맞지 않나요?”
“그렇긴 하죠. 저도 서맥이 가장 가능성이 큰 진단명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음.”
이기원 의원은 다소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현종이라는 사람도 서맥에 무게를 두고 있다면 역시 서맥이 맞을 터였다.
문제는 어머님이 전혀 페이스메이커를 달 생각이 없다는 데 있었다.
‘우리 엄마가 갑자기 말을 들을 가능성은…….’
이기원 의원은 잠시 조현희를 떠올리다가 이내 고개를 털었다.
작고하신 아버님도 보통 분은 아니었는데, 단 한 번도 조현희를 이긴 적은 없었다.
그걸 아들인 자신이 이길 수 있을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기원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머니를 이긴 적이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기원은 우려스러운 얼굴 그대로 입을 열었다.
“혹시 서맥이 맞다면……. 페이스메이커를 달지 않았을 때 많이 위험할까요?”
“증상이 있는 서맥은 위험하죠. 특히 노령 인구에서는…… 목숨을 잃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
“왜요. 이런 말을 들어도 안 하실 거 같아서요? 걱정 마세요.”
“네?”
“노인분들 충분히 살았다, 살았다 해도. 당장 죽는다 그러면 뭐든지 합니다.”
이기원 의원은 이현종의 얼굴을 보면서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아뇨.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저희 어머님은 그냥 죽을 사람이에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고집을 굽힌 적이 없습니다.”
“죽는다고 해도요?”
“네. 칠성에서도…… 제 입장 많이 생각해서 그렇지 사실 반쯤은 포기한 거 같아요.”
“으음…….”
이현종은 ‘이상한데’라고 중얼거리다 말고 말을 이었다.
“아직 낙담하시긴 이르죠. 진단이 된 건 아니니까요.”
“그…….”
“칠성에서 한 검사가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같은 검사도 반복하다 보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어요. 특히 영상이 아닌 부정맥 검사는 더 그래요.”
“그…… 그렇습니까?”
“네. 부정맥이라는 게 이벤트가 있어야…….”
보다 설명을 이어 나가고 있으려는데 또 다른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애초에 병실에 위치한 방이다 보니 유리로 안팎이 훤히 내다보이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해서 그저 고개를 슬쩍 돌리는 것만으로 누가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병동 간호사였다.
“네.”
“조현희 환자……. 증상 호소합니다. 어지럽다고 합니다!”
“아, 그래? 그럼 가 보지. 수혁아. 보호자분.”
이현종은 조현희라는 말에 즉시 몸을 일으켰다.
그 환자 때문이 아니라, 부정맥이기 때문이었다.
부정맥은 지나가면 또 멀쩡해지는 그 특성상 이상이 있을 때 바로 봐야 했다.
“인턴샘, 심전도 끌고 와 줘요.”
같은 심정인 수혁도 이현종의 뒤를 따르면서 같이 앉아 있던 인턴에게 심전도를 부탁했다.
“네!”
인턴은 대답과 동시에 심전도를 향해 내달렸다.
아직 5월이니만큼 어리바리하려면 얼마든지 어리바리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그러면 안 되었다.
교수에 레지던트 1년 차부터 3년 차까지 주르륵 있지 않은가.
특히 인턴에게는 3년 차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인턴 점수를 치프가 주기에 그랬다.
대학 병원이라면 인턴 성적보다는 학교 성적으로 미리 줄세우기를 하겠지만, 태화는 기업 병원이지 않은가.
‘피부과 가려면…….’
인턴장이 나름 중재를 해서 되도 않는 지원은 막지만, 그럼에도 매년 열 명 가까이 되는 떨턴이 발생하곤 했다.
떨턴이 되면 남자들은 무조건 중위 군의관으로 가야 했고 여자도 일 년 그냥 쉬어야 했다.
불상사를 피하려면 최대한 인턴 점수를 잘 받아 두는 것이 필요했다.
드르륵.
해서 인턴은 필사적으로 심전도를 끌고 왔다.
물론 인턴 생각만큼 그렇게까지 사람들이 거기에 관심을 두진 않았다.
지금 모두는 환자만 보고 있었다.
“어지러워요?”
“네? 아, 네. 으…….”
당당하다 못해 비서를 때리고, 싸가지 없는 모습만 보이던 조현희는 없었다.
대신 눈앞이 캄캄해지는 듯한 어지럼증을 겪는 병든 노인만 보일 뿐이었다.
조현희는 병실 침대 난간을 붙잡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현종은 그런 환자를 잠자코 보고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드륵 거리며 이 사건을 기록하는 홀터를 보고 있었다.
‘유의미한 결과를 볼 수 있겠어.’
성질 같아서는 지금 당장 심전도를 찍고 싶지만, 증상이 한창 있을 때 심전도 찍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심장 때문에 힘들어하는 환자에게 이것저것을 갈기가 쉬울 턱이 없지 않은가.
“여기, 심전도 왔습니다.”
그때 심전도가 들어왔다.
이현종은 저도 모르게 심전도 대신 수혁을 돌아보았다.
‘찍어 보죠.’
‘그래, 너도 같은 생각이지?’
눈이 마주치자마자, 둘이 한마음 한뜻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찍자.”
“네!”
해서 찍으라는 명을 내렸다.
여전히 환자는 어지러워하고 있었다.
그 말은 곧 장치 다는 게 어렵다는 얘긴데, 인턴은 호기롭게 달려들었다.
착.
착,
그리곤 베테랑 선수처럼 심전도 기기를 달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조현희가 나이에 비해 근육이 좀 있다는 점이었다.
뼈만 있는 사람은 심전도 붙이는 게 정말이지 쉽지 않은데, 조현희는 젊은 사람처럼 툭툭 붙었다.
띠띠.
곧 심전도 기기 모니터에 환자의 심전도가 떴다.
느린 심전도였다.
어떻게 봐도 서맥.
하지만 이현종과 수혁은 서맥이 나타나기 직전의 상태를, 찰나에 지나간 상태를 엿본 참이었다.
“어…….”
“이거.”
이현종은 습관처럼 심전도 모니터를 뒤로 문질렀다.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건 터치 스크린이 아닐뿐더러 스마트 기기도 아니니까.
단지 심전도를 나타내는 모니터일 뿐이니까.
“너도 봤어?”
“네.”
“분명…… Sinus pause(동휴지: 심전도가 없어지는 것)가 있었어. 한 2초? 그것도 앞이 잘렸을 수도 있고.”
“네. 어지럼증과 연관이 있다면 적어도 10초 이상입니다.”
“그럼…….”
“단순 서맥이 아닐 수도 있겠는데요?”
“그래, 서맥이 아닐 수도 있겠어.”
둘은 지금 심전도 기기를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말은 곧 심전도 기기에 나타난, 명백한 서맥을 보면서 얘기를 하고 있단 말이었다.
‘뭔 소리를 하시는 거야. 분당 50회도 안 뛰는데…….’
때문에 레지던트들은 단체로 멘붕이 왔다.
오히려 심전도 기기를 어설프게나마 볼 수 있어서였다.
반면 이기원 의원과 조현희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정말입니까?”
“그게 정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