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0화 천재를 쥐어짜면 (3)
수혁은 이현종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렷다.
그만 그런 게 아니라, 바루다도 비슷한 제스처를 취했다.
이현종이 지금 무슨 말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였다.
‘다른 방법이 있다고?’
[실수가 있었을 거 같지는 않지만……. 연산 과정을 점검해 보겠습니다.]
‘그래.’
수혁이 알기로 빈맥-서맥 증후군은 상당히 드문 형태의 부정맥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보지도 못할 정도로 희귀한 건 아니었다.
아마 칠성에서도 이걸 알았는데 말을 안 했을 수도 있었다.
어차피 단순 서맥이 아니더라도 페이스메이커를 달아야 하는 건 매한가지니.
[점검상 오류는 없습니다. 빈맥-서맥 증후군의 치료 원칙은 서맥에 대해서는 페이스메이커, 빈맥에 대해서는 부정맥약을 쓰는 것입니다.]
‘그래, 그렇지. 이거 말고 뭐가 있나?’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현종 고유의 이론일 수도 있죠.]
‘아. 그럴 가능성도 있겠네.’
눈앞에 선 사람이 어디 인턴이나 하다못해 그저 그런 태화 교수라면야 말도 안 된다고 하겠으나, 이 사람은 이현종이었다.
이미 한번 전 세계가 부정하던 이론을 증명한 바 있었다.
이번에도 또 해내지 못하리란 법은 없지 않은가.
해서 수혁은 저도 모르게 이현종에게 귀를 기울였다.
“자, 여기 봐 봐.”
수혁의 고민이 겉에서 보기엔 그리 길지 않았기에 이현종은 자연스레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방금 홀터에서 추출한 결괏값을 가리키면서였다.
다시 말하자면, 빈맥이 있다가 심전도가 멈추고 이내 서맥이 되던 바로 그 부위였다.
동시에 환자가 가장 심하게 증상을 호소했던 그 시점이기도 했다.
“여기 보면 빈맥이 있고 심전도가 멈춰. 이건 반동에 의한 거라고 봐야지?”
“네. 그렇죠.”
“그 후에 서맥이 왔어. 이 말은 곧 빈맥이 서맥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 말이야.”
“음……. 그렇네요. 이 경우에는 그렇게 볼 수 있겠어요.”
“그럼 빈맥만 제대로 조절해 주면 서맥도 조절해 줄 수 있다는 얘기야.”
“그…… 그렇죠. 근데 빈맥이 약에 잘 안 듣잖아요.”
실제 빈맥-서맥 증후군에서 약이 잘 듣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페이스메이커를 필수적으로 다는 것이었다.
빈맥이 조절되지 않는 거야 두근거림으로 인한 불편감으로 끝날 수도 있는 문제지만, 지속되는 서맥은 환자의 일상을 파괴할 수 있을뿐더러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어서였다.
이현종도 그러한 사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약으로 치료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 약을 안 쓰면 되잖아.”
“네?”
“지질 거야. 심방세동이 일어나는 이유는 전도로의 이상 때문이잖아. 여기 잘 봐.”
“아……. 여기를……?”
“그래. 이 길을 지지면 빈맥은 사라져. 그렇게 되면 아주 높은 확률로 페이스메이커가 필요 없어지겠지.”
“잠시, 잠시만요.”
잘못된 신호를 전달하는 곳을 지져서 없앤다.
아예 없는 개념은 아니었다.
실제로 많은 부정맥을 그렇게 처리하고 있었다.
다만 서맥에서 아직 시도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발상의 전환이라 이건데, 이 얘기를 듣자마자 수혁은 머릿속에 종이라도 친 기분이었다.
해서 바루다와 다시금 대화를 나누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
“어, 그래. 왔니?”
이현종은 그런 수혁을 보며 조태진의 말을 떠올렸다.
긴가민가했는데,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그분이 오셨어요 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갑자기 혼자만의 시간을 원한단 말인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괜찮아. 괜찮아.”
수혁은 오해라고 했으나, 이현종이 너무 열린 사람이라 별 소용이 없었다.
이현종은 진짜로 그의 아들이 접신을 하건 말건 별 상관없다고 믿었다.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성과만 낼 수 있다면, 그리고 그걸 통해 행복해질 수 있다면 뭐가 문제란 말인가.
‘하.’
수혁은 이현종의 따뜻하면서도 찜찜한 배려를 받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계속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금은 이현종이 새롭게 창시한 이론을 검증해야 할 시간이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의견을 물어?’
[이건 세상에 없던 개념이니까요. 상상은 인간 고유의 영역입니다.]
‘그런가. 너 아직 상상은 못 하냐?’
[글쎄요. 시도해 본 적은 없습니다.]
수혁은 점점 인간 같아져만 가는 바루다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이현종이 말한 이론을 머릿속에서 재구성했다.
과정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았다.
그가 요청하는 그림을 바루다가 즉시 내놓아 주었기에 그랬다.
‘그래……. 여기를 지진다……. 그럼 심방세동은 해결돼. 이런 모양의 세동이면…… 지져서 어느 정도 차단할 수 있지.’
[그렇게 되면 이후에 발생하는 동정지가 예방되겠군요.]
‘응. 그럼 서맥이 없어지지. 완전히 없어지진 않겠지만……. 증상은 없어질 거야. 그렇게만 되면 지금 당장 페이스메이커 달 필요는 없어.’
[이런 걸…… 어떻게 지금 당장 생각해 낼 수 있는 거죠?]
‘지금 보고 그런 건 아닐 거야. 아마…… 평소에도 심장 쪽으로는 고민을 하고 계셨겠지.’
수혁은 생각을 정리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셨나.’
이현종은 그런 이수혁을 보다가 잠시 수혁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뭐라도 보이나 해서였다.
아지랑이 같은 게 보이면 확신할 수 있을 텐데.
아쉽게도 그런 건 없었다.
“교수님?”
“아, 어어. 이 교수.”
이현종은 수혁이 부르는 말에 속내를 들켰나 해서 황급히 답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수혁은 지지는 것에 정신이 팔려서 이현종의 태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이현종의 이론에 대해 덧붙일 뿐이었다.
“될 거 같습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여요. 말씀하신 대로 페이스메이커…… 안 할 수도 있을 거 같고요. 안 되더라도 시기를 확 늦출 수 있겠죠.”
“그렇지? 음……. 그래. 음. 맞아. 네가 그렇게 얘기해 주니까 용기가 나네.”
“네. 적어도 해가 될 일은 절대 없을 거 같아요.”
“좋아. 음. 다시 가자.”
“네.”
그 말에 용기백배한 이현종은 보무도 당당하게 환자에게로 돌아갔다.
그동안 이런저런 기대를 하면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환자와 이기원 의원은 거의 동시에 이현종을 향해 돌아보았다.
“흠.”
이현종은 그런 둘을 마주한 채 잠시 목을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회의를 해 봤는데, 다행히 페이스메이커 없이 치료를 시도해 볼 수 있겠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거봐라. 칠성에 후원하지 말고 태화에 하라니까.”
반응은 당연하게도 좋았다.
페이스메이커가 문제였는데, 그걸 안 해도 된다고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조현희 환자는 아들의 어꺳죽지를 팡팡 때리며 한 적도 없는 말을 해 댔다.
물론 이기원 의원도 기분이 좋은 참이기도 했거니와 정치를 하는 사람인 만큼 눈치가 있는 편이었다.
해서 여기서 언제 그런 말을 했었냐는 말을 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맞장구를 쳐 줬다.
“아유, 어머니 말씀 들을 걸 그랬네요.”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 올해부터는 태화에 해라.”
“네네.”
의사도 사람 아닌가.
병원에 후원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래도 더 신경을 쓰게 되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그 사람이 원래는 칠성에 했다가 태화로 전향했다?
기분이 안 좋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특히 이현종은 칠성에 원한 비슷한 게 있어서 더 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칠성하고 태화가 비슷한 건……. 부지 면적뿐이죠. 하하.”
해서 껄껄 웃음을 터뜨리고는 다시 진중한 얼굴로 돌아왔다.
기분 같아서야 계속 웃고 싶었지만, 지금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지 않은가.
두 사람은 페이스메이커 안 한다고 웃고 있는데, 사실 심장 지지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이제 기술이 워낙에 발달했고 이현종이 그 기술의 선봉장이기도 해서 가슴 여는 일 없이 해낼 수야 있겠지만.
그렇다고 심장에 대한 시술이 간단해지는 건 아니었다.
“아무튼, 페이스메이커 대신 다른 시술을 하긴 해야 해요.”
이현종이 이렇게 운을 떼자, 마냥 웃고 있던 둘의 얼굴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던 일이긴 했다.
아무렴 페이스메이커를 고려했던 병인데 아무것도 안 해도 될 리가 있는가.
어제 겪은 증상만 생각만 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시술이라는 말이 직접 나오자 긴장이 되었다.
“뭘 다는 건 아닙니다, 참고로. 이건 뭐……. 그런 건 아니에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래요, 얘기해 보세요.”
조현희는 불행 중 다행이라는 얼굴이었다.
하여튼 간에 뭘 다는 건 싫은 모양이었다.
유별난 편이었으나, 비난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미국 같은 데서도 이건 절대 안 된다고 하는 이들이 꽤 있었으니까.
곧 죽어도 자석에 닿으면 멈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걸 감안하면 뭐 참아 줄 만했다.
“고주파로 심장에서 잘못된 전기 신호를 보내는 곳을 지질 겁니다.”
“네? 심장을 지져…… 지져요?”
“네.”
해서 이현종은 여상한 말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맨날 하는 시술이라 그런가, 정말이지 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이 자식이 남의 심장 지진다는 말을 이렇게 해? 뭐 이런 생각도 들었다.
“교수님. 이 시술이…… 많이 하는 시술인가요?”
이기원 의원은 자신의 어머니가 필경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 여기고는 급히 질문을 던졌다.
어머니가 이상한 말 하기 전에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이현종은 이번에도 덤덤한 얼굴로 답했다.
“아, 네. 많이 하죠. 어제도 하나 지졌죠.”
“네, 그렇군요.”
여전히 심장에 뭘 하겠다면서 이렇게 담담한 말투를 고수하는 건 이상하게만 느껴졌지만, 어제도 하나 했다니 적잖이 마음이 놓였다.
게다가 이현종은 이기원 의원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국내 최고의 심장 전문의였다.
아니, 어쩌면 세계 제일일 수도 있었다.
여전히 관련 논문을 가장 많이 내는 사람이기도 했고 케이스도 가장 많이 접하고 있었다.
“말 나온 김에 내일 하죠. 오늘 밤부터 금식하고…….”
“아, 그냥 이렇게 결정해도 되나요?”
“초음파 봐야 되는데, 그건 이미 봤잖아요. 혈전 없는 거 확인했으니 바로 가죠, 뭐.”
“아…….”
혈전을 왜 봐야 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그저 바로 하자는 말부터 나왔다.
이현종에게 이 시술은 그리 특별할 거 없는 시술이기도 했거니와, 정말 빈맥-서맥 증후군에 이론처럼 효과가 있을지 궁금하기도 해서였다.
“아, 혈전이 없어야 시술할 수 있거든요. 또 심방세동이 그렇게 심하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고주파 시술만으로 해결할 수 있고, 또 수월할 거란 지표라고 보시면 됩니다.”
허점은 수혁이 메워 주었다.
그 덕에 이기원 의원이나 환자는 조금 더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럼 저희끼리 좀 더 얘기해 볼 수 있을까요? 심장이다 보니…….”
“아, 그러시죠.”
그렇다고 덥석 지지라고 가슴을 내밀진 못했다.
제아무리 이현종이 믿음직스러워 보인다고 해도, 그럴 수는 없는 법이었다.
물론 아무리 얘기를 해봐도, 또 여기저기 문의를 해 봐도 페이스메이커 없이 치료할 방법은 이뿐인 거 같았다.
‘야, 그게 말이 되냐? 아……. 이현종 교수님? 그럼…… 뭐 믿을 만한데.’
심장 지지는 일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의사 지인이나 친구들도 이현종 이름이 나오자 꼬리를 말았다.
“하겠습니다. 해 주세요.”
해서 시술이 바로 잡혔다.
결전의 날은 다음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