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화 아직도 배워야 할 게 있다 (2)
혈소판 감소증의 원인이 되는 병은 아주 많았다.
그러나 바루다는 어렵지 않게 리스트를 추려낼 수 있었다.
[바이러스성 감염, 간 경화, 항암제로 인한 골수 억제, 특발성 혈소판 감소증, 급성 백혈병, 재생 불량성 빈혈 등이 있습니다.]
‘환자는 항암제 쓴 적 없어. 간 경화가 갑자기 오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고…….’
[간염도 가능성은 떨어집니다. 소아과에서 이미 혈청 검사를 했고, 음성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럼…….’
남은 질환은 특발성 혈소판 감소증, 급성 백혈병, 재생 불량성 빈혈.
모두 혈액종양내과에서 보는 질환들이었다.
이기자 교수가 괜히 환자를 조태진에게 보낸 게 아니란 얘기였다.
“흠.”
수혁은 엘리베이터에 오른 후,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특발성 혈소판 감소증을 제외하면 그리 예후가 좋은 병이 아니어서였다.
백혈병이야 혈액암이니 당연히 그랬고, 재생 불량성 빈혈은 빈혈이란 단어 때문에 가벼운 병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으나 골수에 생기는 병이니만큼 치명적이었다.
‘위 세 가지 병하고…… 클리페 파일 증후군이 딱히 연관이 있어?’
그런 만큼 수혁은 단정 짓기 전에 더 많은 토의를 해 보기로 했다.
바루다 또한 이런 종류의 대화라면 환영이었다.
최고의 의료 인공지능임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수혁을 내과 의사로 키워 내야 하지 않겠는가.
아예 감도 안 잡히는 질환을 접하는 일은 지금으로서는 달가운 일이었다.
[아뇨, 데이터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문헌을 놓쳤을 가능성은?’
[해당 질환에 대해 마지막으로 업데이트한 날짜가 3개월 전입니다. 3개월이면…….]
‘짧긴 해도 새로운 내용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시간이지.’
[그렇습니다.]
현대 의학은 이제 아무리 공부를 해도 부족한 학문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사람의 몸뚱어리는 한정되어 있으나 어떻게 된 게 하루가 지나면 지날수록 새로운 병과 치료법 그리고 약제 등등이 쏟아져 나와서였다.
심지어 그 치료에 의한 질환도 발생하고 있었다.
가령 암 환자나 에이즈 환자와 같은 면역 억제자들이 오래 살기 시작하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기회감염이 그랬다.
‘그럼 검색해 볼까. 레지던트들도 놀고 있으면 서치 해 보라고 하고.’
[네. 아마 클리페 파일 증후군이 뭔지도 모를 겁니다.]
‘음, 하긴. 그렇겠네.’
수혁은 숙제를 잔뜩 들고서 센터 안으로 들어섰다.
센터는 여전히 평화로웠다.
워낙 실력이 뛰어난 의사 둘이 있어서이기도 했으나, 춘계 학회에서 홍보 이후 반짝하던 전원 의뢰가 차츰 줄고 있어서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병원에 냅다 던질 만큼 심각한 케이스가 그리 많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현종이 별거 아닌 케이스를 의뢰하면 엄청 혼낸다는 소문이 퍼진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자, 다들 모여 볼래?”
이런저런 연유로 한가한 레지던트들이 우르르 몰렸다.
수혁이 또 뭘 사 왔나 하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수혁이 그들에게 안겨 준 것은 생소한 질환명이었다.
“클리페 파일 증후군에 대해 알아보고, 그 질환하고 혈소판 감소증이 연관이 있는지 알아봐.”
“아…….”
“왜.”
“아닙니다! 바로 찾겠습니다!”
“그래. 잘하면 이따 점심은 피자야.”
“네!”
레지던트들 중에는 수혁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었다.
현역인 데다가 유급도 안 했고, 펠로우도 없이 바로 교수가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교수는 교수이지 않은가.
게다가 별 볼 일 없는 사람도 아니고, 실력이 거의 개원 이래 최고라 평가받을 정도였다.
그냥 소문이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옆에서 보기에도 그랬다.
과장 조금 보태면 매일매일 기적을 경험하는 셈이었다.
수혁교가 괜히 음지를 통해 퍼지는 게 아니었다.
지금도 몇몇이 수혁이 가끔 그러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보며 수멘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휴.’
그 꼴을 본 3년 차가 잠시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수멘이라니.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자, 그럼 나도 찾아볼 테니까, 힘내 보자.”
“네!”
하여간 교수도 솔선수범해서 나선 상황이었다.
달리 할 일이 지금 당장은 없기도 했고.
레지던트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검색에 착수했다.
[클리펠 파일 증후군.]
수혁도 검색창에 단어를 써넣었다.
펍메드라 하는 사이트에 접속해서였는데, 아무래도 논문 찾는 데는 여기가 제일 나았다.
물론 최근에는 구글 학술 검색도 만만치 않게 좋아진 터라 다른 모니터에는 구글을 띄웠다.
‘음…….’
[최신으로 정렬해야죠. 뭐 하는 겁니까.]
‘아.’
잠시 다 읽은 것들만 떠서 당황하던 수혁은 바루다의 일침을 듣고서야 최신으로 정렬시켰다.
그러자 6개 정도의 논문이 떴다.
3개월 동안 이렇게 드문 질환에 대한 논문이 6개나 뜨다니.
요새 의사들은 다 미쳐서 논문만 쓰나 싶을 지경이었다.
‘오.’
[하나도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군요.]
‘바로 읽어 보자.’
[네. 근데 하나는 중국어 논문입니다. 이건 바로 읽기는 무리입니다.]
‘너 안 돼?’
[중국어 공부 한 자라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음.’
[양심 어디 갔습니까.]
하여간 잘된 일이었다.
뭐라도 읽을거리가 더 있다는 건 몰랐던 것을 한 자라도 배울 수 있다는 얘기였으니까.
해서 수혁은 기쁜 마음으로 슥슥 읽어 내려갔다.
바루다가 비아냥거려도 괜찮았다.
다만 읽으면 읽을수록 다시 기분이 가라앉기는 했다.
‘재탕하네, 이 인간들…….’
[논문을 위한 논문이 적지 않죠.]
‘이걸 대체 누가 궁금해하냐고.’
[그러니까 아무도 모르는 학회지에 실렸죠.]
‘흐음…….’
일단 논문의 질부터가 문제였다.
특히 중국 로컬 학회지에 실린 것으로 보이는 논문은 어디서 본 듯한 내용들이 짜깁기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인용 점수는 그리 낮지 않았다.
중국에서 나오는 논문에서 이 논문을 인용해서였다.
학자로서의 양심이 있나 싶은 상황인데, 사실 아주 드문 경우는 아니었다.
최근엔 어느 정도 나아졌다고 하지만 학회 등록만 해 놓고 학회장에 나타나지도 않고 관광만 다니는 이들도 꽤 있었다.
‘에이…….’
[새로운 내용이 없군요.]
‘그러니까. 혈소판 얘기는 아예 없어.
‘이쯤 되면 아무 연관이 없다고 봐도 좋을 듯합니다.’
[그럼 새로운 질환이 생겼다는 건가.]
‘좋은 일은 아니군요.’
혹 레지던트들은 뭔가 다른 결괏값을 얻었나 해서 돌아보았으나 딱히 소득은 없었다.
원래 학술지 검색은 아는 만큼 범위를 좁혀 가면서 제대로 된 검색을 할 수 있는 거라 수혁이 검색한 만큼 해낸 사람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수혁이 클리펠 파일 증후군에 대한 짧은 렉쳐(lecture: 강의)를 해야 했을 지경이었다.
그 후로는 달리 시간이 없었다.
오후엔 외래를 봐야 해서였다.
대부분이 입원했다 퇴원한 환자들이긴 했으나, 그래도 신경은 써야 했다.
혹 경과가 잘못되거나 하는 환자가 있으면 큰일이니까.
“덕분에 살았습니다. 교수님.”
“아뇨, 뭘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닙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물론 대개는 감사 인사가 주를 이루긴 했다.
수혁과 이현종이 같이 내린 진단의 경우 빗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였다.
설령 있다 해도 입원 기간 중 시정이 되지, 퇴원까지 하는 경우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다음 환자는 신환입니다.”
“신환?”
“네. 다른 병원에서 외래로 다니다가 의뢰하는 경우는 외래로 오기로 했습니다.”
“아……. 그거 원래 안 받았었는데, 외래 열리니까 상관없겠네요.”
“네. 첫날이라 이분 한 분뿐입니다.”
“뭐, 상관없죠. 미리 의뢰서 받은 거 있어요?”
“네.”
외래 막바지에 이르자, 사원이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의뢰서였는데 로컬 의원이 아니라 꽤 큰 병원이었다.
수혁도 이름을 들어 봤으니 2차 병원 중에서는 유명한 병원이라고 보면 되었다.
[여자 19세 환자로 미열 및 전신 부종, 가려움증 동반하는 피부병변을 주소로 본원 내원 후 시행한 검사상 Eosinophila 소견 보였고, parasite anti body는 음성이었습니다. hypereosinophilic syndrome 의심 하에 steroid 및 albendazole 투약했습니다. eosinophila는 호전 중이나 피부 병변 지속되고 환자 귀원에서의 진료 원하여 진료 의뢰 드립니다. 삼가 고진선처 부탁드립니다.]
환자를 본 의사는 이제 보니 태화 의료원 내과 선배였다.
류머티즘 전공이었을 터였다.
실력이 썩 나쁘지 않았는데, 전임 못 받고 나가더니만 이 병원에 자리한 모양이었다.
하여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호산구가 증가 되어 있는데, 이를 주로 증가시키는 기생충에 대한 항체는 없었다.
-그렇다고 기생충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니, 그에 대한 약인 알벤다졸과 더불어 과다호산구증후군에 잘 듣는 약인 스테로이드를 썼다.
-호산구는 줄어들었으나 피부 병변은 유지 중이다.
아무래도 과다호산구증후군은 아닐 가능성이 컸다.
수혁은 바루다와 이런저런 의견을 교환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원은 그것을 신호로 마지막 환자를 불렀다.
“신지원 님, 들어오세요.”
그러자 기다리다 지친 얼굴의 여자 환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수혁은 우선 들어서는 환자의 얼굴부터 유심히 바라보았다.
[양측 볼, 광대 근처로 붉은 구진이 있군요.]
‘호전되지 않았다더니, 꽤 심하네.’
머리를 길러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확연히 보일 지경이었다.
“네, 신지원 환자분. 의뢰서는 읽어 보았습니다.”
“네, 선생님. 그…… 선생님 TV에서 봤거든요. 고칠 수 있겠죠?”
“일단 차차 알아봐야죠. 음.”
이미 꽤 고생을 한 환자인지라 초조해 보였다.
수혁은 바루다의 도움을 받아, 가장 신뢰를 줄 수 있는 표정과 말투 그리고 목소리 톤을 이용해 말을 이었다.
“이 피부 가려운 거 언제부터 그랬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 몇 개월 됐어요.”
“정확히 얼마나 됐나요?”
“반년?”
“얼굴만 그래요?”
“그……. 아뇨. 다른 곳도.”
“그런가요? 어디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수혁의 말에 환자는 조금 망설이다가 우선 바짓단을 걷어 올렸다.
발목 주변으로도 붉은 구진이 보였다.
긁기도 했는지 손톱자국도 있었다.
얼굴은 그나마 주의를 한 모양인데, 발목 쪽은 그러기가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여기 말고는 없나요?”
“배도 그렇습니다.”
“볼 수 있어요?”
“아, 네.”
환자는 티셔츠를 살짝 위로 올렸다.
그러자 복부에도 그득한 붉은 구진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얼굴과 몸통 그리고 발목에도 구진이 있군요.]
‘거의 전신이라고 봐도 좋겠는데. 이거 때문에 처음부터 내과를 갔을까?’
[그럴 가능성은 적습니다.]
‘그렇지?’
예전 같았으면 이런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을 터였다.
의학적인 지식이 아무리 쌓인다 해도 환자의 행태를 예상하기 위해서는 경험이 필요하니까.
수혁은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며 입을 열었다.
“혹시 이 병원 가기 전에 다른 병원 간 적은 없나요?”
“있어요. 다른 내과.”
“내과? 그전에는요? 피부가 가렵기 시작했을 때 제일 처음 간 병원이 내과예요?”
“아, 아닙니다. 처음엔…….”
환자는 어딘지 눈치를 보며 말을 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