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화 도와주세요, 교주님 (2)
우창윤 교수는 나름 명성이 있는 교수였다.
그냥 아선 병원 기조실장으로 빠른 출세를 하고, 그만큼 아랫사람을 쥐어짜서 그렇게 된 건 아니었다.
꽤 의미 있는 연구도 여럿 진행한 바 있으며 임상적인 능력도 인정받고 있었다.
애초에 그렇지 않고서는 나 잘난 맛에 사는 아선 병원 교수들이 말에 따를 리가 없었다.
‘근데 모른다, 이거지?’
[내분비 쪽이 좀 어렵긴 하죠.]
‘응, 그렇지. 감염 쪽 하고는 또 달라.’
[네, 매력 있는 학문입니다.]
내과라는 학문이 원래 어렵긴 했다.
사람 몸 전체를 봐야 하는 학문이니만큼 일단 범위부터가 장난이 아니지 않은가.
당연히 다른 과에 비해 어렵다, 힘들다는 말은 적어도 내과 내에서는 당당히 통용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또 난이도의 차이가 있었다.
내분비는 그중 꽤 상위에 존재하는 과였다.
그런데 우창윤 교수도 모르는 케이스가 있다고 하니, 이제 변태가 다 되어 버린 수혁과 바루다의 구미가 확 당길 수밖에 없었다.
‘역시 교주님……. 아닌 척하시지만, 교인이 어렵다고 하니까 관심을 보이시는구나.’
안대훈은 그런 수혁의 눈빛을 제멋대로 해석하며 탭을 꺼냈다.
그리곤 사진을 띄웠는데, 딱 그것만 봐도 이게 정식으로 요청된 의뢰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하윤이가 몰래 찍은 거야?”
“네? 아, 네. 몰래 찍어서 보냈습니다.”
이를테면 우하윤의 프락치 짓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자기 아빠가 서재에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뒤에서 찰칵찰칵 사진을 찍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사진 일부분에는 늘 우창윤 교수의 뒤통수가 박혀 있었다.
‘머리가 되게 없네.’
[괜히 이거 다 빠지기 전에 급히 결혼한 거란 얘기가 도는 게 아니군요.]
‘나는 그냥 교수님들이 아선 미워해서 그런 말 하는 줄 알았는데.’
[아무튼, 보시죠.]
그게 꽤 인상적이어서 수혁과 바루다 모두 잠시 정신이 팔렸다.
하지만 둘은 뭐가 되었건 흥미로운 케이스 앞에서 오래 망설이는 타입이 아니었다.
해서 곧 안대훈에게서 탭을 뺏어 들고는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인마 나는 수혁이네 집에서 잔 적도 있어.”
“그게 어떻게 더 친하다는 증거예요. 민폐지.”
“민폐라고? 인마. 아빠니까 아들 집에서 잠도 자고 하는 거지.”
“엎드려 절받기 식으로 아빠 된 거잖아요. 저한테는 알아서 삼촌이라고 하던데.”
“웃기지 마, 인마.”
수혁이 빠졌음에도 조태진과 이현종은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서로 누가 더 수혁과 친한가에 대한 대결을 펼치느라 여념이 없어서였다.
교수끼리 한다기에는 다소 어이가 없고 어떻게 보면 부끄럽기까지 한 대결이었으나, 둘은 진지했다.
‘일단 주소가 전신 쇠약감이야.’
[골 아픈 증상이군요.]
덕분에 수혁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케이스에 집중할 수 있었다.
우하윤이 비록 이제 2년 차긴 해도, 해당 연차의 에이스이지 않은가.
나름 성의 있게 자료를 첨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었다.
일부 빠진 것도 있기는 할 테지만, 하여간 한번 훑어보기엔 별문제 없었다.
‘그다음 주소는 체중 증가. 이것도…….’
[네, 어려운 증상이죠.]
전신 쇠약감.
이걸 달리 표현하면 피로감이지 않은가.
현대인치고 피로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만큼 너무 흔한 증상이라 할 수 있었다.
동시에 너무 많은 질환에서 발현될 수 있는 증상이기도 했다.
주소가 특징적일수록 쉬운 케이스란 말 또한 어불성설이긴 했으나, 전신 쇠약감이 주소라고 하면 한숨부터 나오는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60 넘은 노인에서 체중 증가 또한 까다로운 증상이었다.
‘아예 다른 질환인데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일단 아선 내부 판단으로 내분비 내과로 협진 요청이 갔다면, 우리도 거기에 맞춰 생각할 필요는 있습니다.]
‘하긴 아선이 만만한 병원은 아니긴 해.’
[통계만 봐도 그렇습니다. 태화에 비하면 오진율이 다소 높으나……. 그건 수혁과 이현종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전반적인 시스템이나 실력 차는 없습니다.]
모든 병원의 모든 의사의 실력이 비슷하다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인재들이 대기업에 몰리는 것처럼 우수한 의사들 또한 큰 병원에 몰렸다.
동시에 큰 병원에 계속 있다 보면 원치 않아도 실력이 늘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환자도 몰리기에 다양한 케이스를 접하기 때문이었다.
또 워낙에 우수한 의사들이 많은 만큼,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도 치열했다.
심한 예로는 태화의 레지던트가 본 희귀 질환의 개수가 중소 병원 교수보다 많은 경우도 왕왕 있을 지경이었다.
‘요새 그쪽이 특히 좀 더하지?’
[네. 인턴 월급 올리고, 당직실 쫙 개선해서 그런가……. 1등 숫자가 그쪽이 더 많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태화와 아선 그리고 칠성의 규모는 비슷하지 않은가.
심지어 투자는 최근 들어 아선과 칠성이 미친 듯이 달리는 바람에 태화가 오히려 좀 처지는 느낌마저 있었다.
그렇다 보니 수혁이나 바루다도 칠성이나 아선의 실력만큼은 인정하고 있었다.
‘일단 2차 병원에서 당뇨로 진단 후에 의뢰가 된 거야. 이상하네. 당뇨가 이미 진단이 됐는데 왜 의뢰가 됐지?’
[더 읽어 봐야죠. 음…….]
‘뒤통수에 살짝 가렸어. 문맥상…… 아마 당 조절이 잘 안 돼서 보낸 거 같긴 한데.’
[이렇게만 봐서는 좀 어렵군요.]
‘안 되겠다.’
그냥 이렇게만 보면 특별할 거 하나 없는 케이스였다.
원래 당뇨가 흔하긴 해도 그리 만만한 병도 아니지 않은가.
특히 진단이 늦어진 경우라면, 이미 췌장이 뻗어 버린 지 오래일 테니 약이 더 잘 안 들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치료가 불가한 건 또 아니었다.
그런 경우라면 인슐린 보충을 해 주면 되었다.
하지만 우창윤 교수가 과연 이걸 못했을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흥미가 확 일었다.
“대훈아.”
“네 교주님.”
“이게 다 안 보이는데. 어떻게 해결 좀 해 봐라.”
해서 대훈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대훈이 기다렸다는 듯 껄껄 웃고는, 탭을 조작해 바로 영상 통화를 걸었다.
“뭐야, 이게.”
“하윤이에게 전화 걸었습니다. 지금 집이거든요.”
“집? 어떻게?”
9시가 넘은 시간에 집에 있다는 게 어떻게 놀랄 일인가 싶겠지만.
우하윤이 레지던트라는 걸 감안하면 그럴 만도 했다.
레지던트라는 말 자체가 거주민이라는 뜻 아닌가.
말 그대로 병원에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우창윤 교수님이 완전 딸 바보잖아요. 근처로 이사 오셨어요.”
“아선이랑 여기 멀잖아?”
“그래도 딸이 더 중한가 보죠.”
“와……. 대단한데.”
“아, 받았습니다.”
미쳤다 하고 있으려니 우하윤이 전화를 받았다.
씻고 난 후인지, 머리에 이상한 밴드를 감고 있었다.
딱히 얼굴 보려고 전화한 건 아니어서 괜찮았다.
“어, 하윤아. 교주님이 케이스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으시대.”
“아, 그래요? 잘됐다. 지금 아빠 자는데.”
“잔다고? 이 시간에?”
“엄마랑 술 먹고 뻗었어요.”
“아……. 어머니 빡세시더라.”
이건 수혁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우창윤 교수가 술을 진짜 못 먹는데, 그거 때문에 윗사람들이 뭐라고 했더니 아내가 흑기사를 자청해 내분비내과 교실을 초토화시켰다는 얘기는 딱히 아선에서만 유명한 얘기가 아니어서였다.
“암튼…… 컴터 켤게요.”
잠시 기다리자, 우창윤 교수의 컴퓨터가 켜졌다.
비번도 있기는 한 모양인데, 우하윤은 고민도 없이 뚫고 들어갔다.
“어떻게 알아?”
“제 생일이에요.”
“널 정말 아끼시는구나.”
“네, 귀찮아요.”
하윤은 아빠가 들으면 피눈물 흘릴 말을 하면서 자료를 찾아 들어갔다.
아예 바탕 화면에 나와 있어서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아마 최근 매일같이 이걸 들여다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여기……. 일단 2차 병원 의뢰서예요. 저도 같이 본 적은 있는데, 도통…….”
“음. 잘 비춰 봐. 약간 번져.”
“네.”
하여간 수혁은 덕분에 의뢰서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아까 안 보이던 부분까지 다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긴데 과연 혈당 조절이 잘 안 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경구 혈당 강하제에 안 듣는다라……?’
[그 외에는 체중 증가, 전신 부종 등이 있군요.]
‘단순 당뇨는 아닐 수도 있겠는데.’
[네. 2차 병원에서는 당뇨라 판단한 모양이지만……. 우창윤 교수 메모를 보니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하긴 이 사람이 그래도 내분비내과에서 구른 게 몇 년인데 단순 당뇨 하나 처리 못 하겠냐.’
수혁은 필요하면 화면을 넘겨달라고 하면서 계속 케이스를 들여다보았다.
중간에 하윤의 엄마가 오는 바람에 살짝 위기가 있었으나, 이미 하윤의 어머니는 남편보단 수혁이라는 교수가 더 능력이 있을 거라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어, 그래? 그래, 괜히 끙끙대다가 머리만 더 빠져. 빨리 알려 달라 그래라.”
해서 이 말만 남기고 다시 혼술 하러 총총 사라졌다.
‘바이털이 이상하네. 60 노인이 혈압이 150에……. 90. 심장박동 수도 90회. 음.’
[고혈압이 있을 수 있죠.]
‘뭐 그거야 그런데……. 2차 병원에 다니다 온 거잖아. 혈압도 조절이 안 된 거면 의뢰를 했겠지.’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어쩌면 최근에 발생한 문제 목록일 수도 있겠습니다.]
수혁은 문제 목록에 하나하나 환자의 증상 또는 소견을 더해 가면서 계속 자료를 살폈다.
다음은 검사 결과지였다.
‘칼륨이 좀 낮네.’
[네, 저칼륨혈증이 있습니다.]
‘인슐린 치료는 했나?’
[다음 페이지를 보시죠.]
‘응.’
경구 혈당 강하제가 듣지 않으면 다음은 인슐린을 써야 했을 터였다.
이거 한번 쓴다고 하면 계속 쓸 거라 걱정하는 수가 많은데, 반드시 그런 건 또 아니었다.
완전히 뻗은 췌장이 돌아올 때까지만 써 주면 먹는 약만으로도 조절이 되는 수도 왕왕 있었다.
하여간 이렇게 약이 안 들을 땐 인슐린을 써야 했다.
‘썼네. 근데…….’
[안 듣는군요.]
‘정확히 말하면 반응은 좋아. 확 떨어지잖아. 근데…….’
[지속 시간이 짧습니다.]
속효성 인슐린을 썼는데, 금세 당이 떠 버렸다는 보고가 있었다.
당직의가 그거 때문에 다음번엔 양을 늘렸더니만 저혈당이 왔다가 당을 주자 또 미친 듯이 솟았다는 보고도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지금 우창윤 교수는 그 오랜 경험과 명성에도 불구하고 당뇨 환자 하나 처리를 못 하고 있단 얘기가 되었다.
며칠 동안 끙끙거린 것도 이해가 됐다.
남들에게 말 못 한 것도 이해가 됐고.
문제가 있다면 수혁 또한 이 정보만으로는 잘 분간이 안 간단 점이었다.
‘환자를…… 직접 보는 게 좋겠는데.’
[네. 한번 봐야 진단이 가능하겠습니다. 이 정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근데 그래도 되나?’
[우하윤을 이용하면 어떻게 안 될까요?]
‘음. 지금?’
[이거 해결 못 하면 잠이 올까요?]
‘안 오겠지. 오케이. 질러 보자.’
[네, 가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