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1화 도와주세요, 교주님 (5)
조태진이 비록 혈액질환을 주로 보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고형암이라고 아예 모르는 건 또 아니었다.
요즘에야 분과 내에서도 또 각기 보는 사람에 따라 세분화되지만 조태진이 할 때만 해도 1, 2년 차 땐 어지간히 다 알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유암종이라는 것이 희귀 질환은 아니었기에 더더욱 자신 있게 나설 수 있었다.
“기관지 유암종이면…….”
“이소성 ACTH 증후군을 일으킬 수 있죠.”
“음. 주로는 소세포암종처럼 빨리 자라는 악성 암이 주로 일으키기는 하지.”
“하지만 유암종도…….”
“응. 천천히 자라는 놈이라 더 헷갈려. 나도 이 사진만 봐서는 정상 소견 줄 거 같은데…….”
이소성 ACTH란 건 부신과 뇌하수체가 아닌 다른 공간에서 스테로이드 분비를 일으키는 일종의 자극 호르몬을 내뿜는 증후군을 말했다.
50%가량이 흉부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의심하면 일단 엑스레이를 찍는 게 보통이었다.
아마 우창윤 교수도 엑스레이를 반드시 확인하기는 했을 터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 보니 그냥 그런갑다 했을 게 뻔했다.
그냥 그가 보기에만 그런 게 아니라 떡하니 영상의학과 판독까지 박혀 있지 않은가.
어디 작은 병원에서 판독이 나온 것도 아니고, 아선 병원에서 판독이 나온 거기에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네, 원래 유암종이 좀……. 증상을 작을 때도 일으킬 수 있으니까 헷갈리죠.”
“음……. 근데 네 생각에는 있을 거 같다 이거지?”
“네.”
“확률은?”
“95% 이상이요.”
“아, 오셨구나. 그럼 가야지.”
조태진은 익숙한 병명에 술까지 깬 모양이었다.
나름 유의미한 토의를 이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깬 건 아니어서, 여기가 어딘지는 명확히 알지 못했다.
아마 남의 병원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면 당연히 코멘트만 남겨 놓자고 했을 텐데, 오히려 부추기고 있었다.
“찍자는 얘기죠?”
“응. 찍자.”
“네. 그러죠.”
펄쩍 뛴 것은 신현태였다.
“어어. 조 교수. 수혁아. 여기 아선이다. 태화 아냐.”
남의 병원에서 허락도 없이 진료를 한다?
쪽팔리는 걸 넘어서 의료법 위반이었다.
불법으로 걸면 여기 있는 다섯 명 모두 걸릴 수 있었다.
보통 인원도 아니고, 각 과의 중추들 아닌가.
심지어 자긴 원장이었다.
“아니.”
해서 필사적으로 말리려는데, 이현종이 나섰다.
마스크를 두 개 끼고 있음에도 술 냄새가 났다.
하여간 술도 잘 못 먹으면서 와인도 아니고 맥주로 달려?
“형은 끼지 말고…….”
“아니, 네 말 틀렸어.”
“뭔…… 뭔 소리야. 왜 눈이 이상해.”
“우리가 있는 곳이 태화야. 여긴 아선이 아니라 태화야.”
“뭔…… 미친…….”
그것도 모자라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있었다.
일이 이쯤 되자 수혁도 슬슬 걱정이 되긴 했다.
‘음, 그만하고 튈까?’
[근데 너무 궁금하지 않습니까?]
‘궁금하긴 해.’
[CT 찍고 문제가 생길까요? 조영제 안 써도 될 텐데도?]
‘음…….’
하지만 악마의 속삭임 버금가는 바루다의 말을 듣자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바루다는 그냥 막 말을 던지는 게 아니라, 수혁을 분석해서 제일 홀릴 만한 말을 할 수 있지 않은가.
[환자 나이를 고려하세요. 고혈당 더 지속되면 케톤혈증이나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합병증이 빠르게 올 겁니다.]
‘그것도 그래.’
[그걸 오늘 종식 시킬 수도 있는 겁니다. 누가?]
‘내가.’
[네, 이수혁이.]
‘그래, 찍자.’
결국, 수혁은 홀랑 넘어갔다.
동시에 반쯤 돌아간 눈이 되어 신현태를 바라보았다.
신현태 입장에서는 이현종, 조태진 그리고 이수혁 셋의 비슷한 눈빛에 휩싸인 셈이었다.
‘아……. 태화의 미래는…….’
그 순간 신현태는 떠올렸다.
이현종에게 지배당했던 공포를.
“웁.”
이현종의 지시에 따라 덩치가 좋은 조태진이 신현태를 제압했다.
신현태도 체격이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나, 전문적으로 운동했던 사람에게는 비할 바가 아니지 않은가.
거의 순식간에 무력화되고야 말았다.
그사이 수혁은 우하윤의 도움을 받아 CT 처방을 내렸다.
조영제를 사용하지 않는 CT다 보니 딱히 동의서도 필요 없었다.
“응? 우창윤 교수님 집에 안 가셨나?”
처방이 우창윤 이름으로 나갔기에 간호사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기조 실장이 된 후론 매일 집에 늦게 가기는 했다.
하지만 환자를 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였기에 처방이 이 시간에 난 건 처음이었다.
그때 스테이션 시니어 간호사가 그럴 수도 있다는 얼굴로 답했다.
“어디, 7호실? 그 환자분 때문에 골머리 썩는 거 같긴 했어.”
“아, 맞네. 하긴 아직도 진단명 R/O로 붙어 있죠?”
“응. 오죽하면 맨날 스테이션 와서 잘난 척하던 양반이 쥐 죽은 듯이 딱 환자만 돌고 가겠어.”
“그렇네……. 그래도 그 교수님도 열심이구나.”
“안 그러면 아선에 못 있지. 나름 논문도 많이 쓸걸?”
“저는 하도 주변에서 너무 밑에 사람 부려먹는다, 뭐 이런 말만 들어 가지고.”
“기조 실장 되고 그러긴 하는데……. 뭐 교수님들 위에 올라가려고 아랫사람 조지는 게 하루 이틀이야? 아무튼, 찍자. 그거 바로 될걸.”
“네. 선생님.”
우창윤이 진짜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는 한 모양이었다.
처방은 일사천리로 실행되었다.
곧 이송 요원이 오고, 환자는 침대에 실린 채 검사실로 향했다.
아선 병원이 워낙에 큰 만큼 검사실도 잘 구비가 되어 있어서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영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떴다.”
“어디, 어디 봐.”
“저도.”
“그래, 뭐. 어차피 찍었는데 이제 어쩔 거야.”
“하…….”
수혁이 팩스를 눌러 영상을 띄우는 동시에 모두가 몰려들었다.
그리고 한마음 한뜻이 되어 흉부를 살폈다.
우하윤은 출구 쪽을 힐끔거렸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그대로 튀어야 해서였다.
“여기. 이거 유암종이네요.”
“아…….”
다행히 그럴 일은 없었다.
작은 유암종이 기관지에서부터 자라나 있었다.
소세포암종이라면 절대 이소성 ACTH 증후군 따위 일으키지 않을 만한 크기였다.
하지만 유암종은 좀 다른 성격을 띠고 있었고, 그래서 오진이 흔했다.
물론 이렇게까지 작은 놈이 증상을 일으키는 건 더 희귀했지만 하여간 수혁은 마침내 원인을 잡아냈다.
“랩도 나가자.”
“네……. 혈중 ACTH, 코르티졸……. 그리고 24시간 소변 유리 코르티졸, Hydoxyindoleacetic acid, 17-ketosteroid, 17-hydrocycorticosteroid, 혈청 serotonin……. 이렇게 낼게요.”
“음, 좋아. 완벽하네. 우창윤 그놈 놀라겠는데. 머리 더 빠지는 거 아니냐, 허허.”
이현종은 정말로 기분 좋다는 듯 껄껄 웃었다.
안 그래도 아선이 너무 가파르게 쫓아오고 있어서 언짢았는데, 그 선봉에 있는 우창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준 셈이니 기분이 안 좋을 수가 없었다.
“자자, 이제 나가자고요. 원인도 알았고…….”
신현태도 기분이 좋기는 했다.
하지만 불안하기도 했다.
걸렸다간 좆 된다는 게 딱 지금 상황이지 않은가.
“그래, 그래.”
“나갑시다.”
“네.”
다행히 검사가 진행된 이상 누구도 고집을 부리진 않았다.
해서 일행은 서둘러 병동을 빠져나와 크나큰 비밀을 품에 안은 채 각기 집으로 흩어졌다.
우하윤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돌아올 때까지도 우창윤은 인사불성이었다.
“어떻게 됐어?”
어머니는 오자마자 질문부터 던졌다.
아무리 의사 아내로 살았고 이제는 의사 엄마가 되어서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고 해도, 궁금하기는 해서였다.
우하윤은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다소 황당했던 일을 떠올리고는 미소를 머금었다.
“잘됐어요. 진단 됐어요.”
“그래? 잘했네.”
“제가 한 건 아니고요.”
“그럼 뭐. 또 그 이수혁인가 뭔가 하는 선배야?”
“네.”
“그 사람은 진짜 대단하네.”
“네, 진짜 똑똑해요. 전문의 돼도 밑에서 배워야지.”
“그래 뭐……. 정말 잘해 볼 생각은 없고?”
“그런 느낌은 아니에요.”
그리곤 좀 더 엄마와 수다를 떨다가 잠이 들었다.
집이 가깝다고 해 봐야 6시까지는 출근을 해야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끄응…….”
우창윤은 그런 딸보다도 더 일찍 눈을 떴다.
애초에 일찍 잠들어서인 것도 있지만, 요즘 들어 그 환자 생각 때문에 깊은 잠을 자기 어려워서이기도 했다.
감히 아내에게 술 대작을 요청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글라스로 줄줄이야. 아무튼, 덕분에 잘됐지.’
바람대로 순식간에 뻗어서 어제는 그나마 잘 잤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개운하다거나 하는 느낌은 없었다.
‘7호…….’
환자 생각이 아른거려서였다.
그와 더불어 딸내미 생각도 났다.
‘아빠, 정 모르겠으면 통합진료센터 의뢰해 봐.’
딴에는 생각해서 하는 말일 터였다.
하여간 하윤에게 이수혁은 전 세계 최고 천재니까.
우창윤이 보기에도 그 녀석은 천재였다.
맡길까 하는 생각이 잠깐씩 들 정도로.
하지만 어른에게는 어른의 사정이 있는 법 아니겠는가.
‘아선 병원 기조실장이 태화에 진료 의뢰를 넣는다?’
아직까지 태화와 칠성은 단 한 건도 넣지 않은 거로 알고 있었다.
아니, 넣기는 하는데 그건 모두 환자의 요청이 있을 때에 한했고 그렇기에 이현종이 원하는 케이스가 아니라 성사되지 못했다.
그걸 기조실장씩이나 되어 가지고 깨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다녀올게.”
“어, 가.”
우창윤은 아직 침대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아내를 뒤로하고 차에 올랐다.
딸 때문에 아선보다 태화 가까운 곳에 이사를 하는 바람에 원래 나왔던 시간보다 더 빨리 나와야만 했다.
빵.
막히기 전 시간이라는 얘긴데 마주 오는 차가 클랙슨을 울렸다.
새카만 세단이었다.
“뭐야?”
마침 신호에 걸려 서 있던 우창윤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려니, 천천히 뒷좌석 창문이 내려갔다.
그리고 이현종의 얼굴이 보였다.
옆에는 신현태가 앉아 있었는데, 원장 차인 모양이었다.
이제 이기자 교수와 같이 출퇴근하는 게 일상이 된 이현종이지만 어제는 과음도 했겠다, 밤도 늦었겠다 신현태 집에 가서 자는 바람에 같이 타게 되었다.
“이현종 교수님?”
내막을 알 리 없는 우창윤은 그저 떨떠름한 얼굴로 인사를 했다.
편한 사이는 아니더라도 학회 어른이지 않은가.
반면 이현종은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아, 형. 주책 떨지 마.”
“가만 있어 봐 인마.”
옆에서 신현태가 말려도 별로 소용없었다.
“우 교수. 요새 낑낑대는 환자 있다며.”
“네? 아니, 그걸 어떻게…… 아니, 아니요. 없는데요?”
“에이. 다 알지. 하여간……. 그래. 앞으로도 어려우면 우리한테 물어보라고.”
“네? 이게 뭔…….”
“으하하하.”
“뭐야, 왜 웃어요?”
“으하하하하하하.”
쌔한 느낌에 재차 물었으나, 마침 반대편 신호가 바뀌는 바람에 이현종의 웃음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뭐지, 시발?’
우창윤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뒤에서 빵 하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다시 출발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아까보다 액셀 밟는 발에 힘이 더 들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