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7화 국제 진료소 (2)
“이따 제가 가면 환자분과 얘기해 볼 수 있을까요?”
“아……. 네, 될 겁니다. 그렇게 큰 수술은 아니라서요.”
“잘됐네요. 가서 보죠.”
“네.”
“아, 그리고…….”
닥터 장은 전화를 끊으려다가 말고 기다렸다.
리홍이 의원이 단순히 로열패밀리라서는 아니었다.
이수혁이라는 괴물 의사를 대체 어떻게 소개시켜 줄 수 있었을까, 그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다.
사실 말이 로열패밀리지, 싱가포르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아닌가.
‘아니…….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 화나려나?’
오버 한 감이 있었지만 하여간 여기만큼은 아닐 터였다.
“이수혁 선생님 말입니다.”
“어? 네.”
안 그래도 수혁 생각에 착잡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던 찰나에 수혁 얘기를 먼저 꺼내자, 장은 잠시 놀랐다가 애써 평이한 어조로 대꾸했다.
리홍이는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었지만 중요한 일은 아닐 거라 여기고 말을 이었다.
“사실 태화 의료원이 국제 진료소를 세우길 원하고 있어요.”
“아……. 국제 진료소를…… 싱가포르에 말입니까?”
“네. 싱가포르 대학 병원도 그렇고 우리 의료 수준이 낮지 않다는 건 저도 압니다만…….”
리홍이는 닥터 장의 위치를 생각하며 말끝을 흐렸다.
싱가포르 내과 학회의 전임 이사장이자, 현직 학술이사이기도 했다.
현직 이사장은 될 만한 사람이라 된 게 아니라 닥터 장이 물러날 때가 돼서 공석을 채운 사람일 뿐이었다.
그 말은 곧 닥터 장이 지금 싱가포르 내과 학회의 실세란 얘기였다.
“예전보다 위상이 내려간 것도 사실입니다.”
싱가포르 자체의 위상이 내려가기도 하지 않았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니 뭐니 하고 떠들어 대기엔 대한민국이 너무 위로 치고 올라가 버렸다.
사실 한국이야 인구도 그렇고 땅덩이도 그렇고 도시 국가와 비교되기엔 너무 큰 나라니 그렇다 쳐도, 대만에 밀리고 있는 건 뼈 아픈 일이었다.
세상에 대만에서 세계 제일의 반도체 회사를 만들어 대한민국과 엎치락뒤치락하게 될 줄이야.
물론 그와는 별개로 싱가포르 의료계 자체의 경쟁력이 하락한 것도 있었다.
아무래도 영국식 의료를 지향하다 보면 바닥이 높아지는 대신 천장도 낮아지기에 그랬다.
“네, 부자들이 더 이상 싱가포르 병원에서 진료 보기를 원하지 않죠. 외국에서 오는 환자 수도 매해 줄고 있어요.”
“음……. 맞습니다.”
다른 사람이 상대였다면 빽 하고 화라도 내겠지만 리홍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아까야 속으로나마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했으나, 안에서는 아니지 않나.
당장 집에 가면 싱가포르의 왕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아버지가 있을 터였다.
따르는 가신 격의 의원들까지 하면 그 힘은 그야말로 무소불위라 할 수 있었다.
“학회랑 정부랑 얘기를 많이 했는데……. 의료계 내에서는 해결이 어렵겠죠?”
“대규모 투자가 없는 한 어렵습니다.”
“여력이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병원에 투자만 들어오면 아마 타개할 수 있을 터였다.
인력 유출 문제도 문제지만, 설비 문제도 심각하니까.
하지만 싱가포르 정부 경제 회복에 열을 더 올리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여태까지 금기시했던 도박, 그러니까 카지노 사업까지 열어 주었을 정도였다.
아마 다른 사업을 육성하겠답시고 하고 있으면 학회에서도 몇 번 더 강하게 나갈 텐데 카지노를 들입다 파고 있으니 입이 차마 안 떨어졌다.
오죽하면 이놈들이 이럴까 싶어서였다.
“태화에서 내건 조건이…… 단독으로 설립을 원하고 있진 않아요. 그건 그 사람들도 무리한 요구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외국계 병원이 어디 들어오는 게 정말이지 쉬운 게 아니었다.
멀리 갈 것도 없고, 대한민국만 해도 그러지 않았나.
송도 경제 특구가 지정되었을 당시 몇몇 세계 유수의 대학 병원에서 관심을 보였더랬다.
빅 3라 불리는 태화, 칠성, 아선은 모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이 나오는 병원 중 어느 하나라도 들어오면 타격이 될 테니까.
다행한 것은 그 세계 유수의 대학 병원에서 먼저 발을 뺐다는 점이었다.
막상 들어오려고 보니, 미국 의료 보험 체계에 비해 한국의 건강 보험 제도는 이용자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어 병원으로 큰돈 빨아먹기가 어렵단 계산이 서서였다.
“아, 그럼 합작인가요? 어디랑…….”
하여간 의료는 다른 나라에 넘기긴 껄끄러운 분야였다.
한번 비슷한 일을 겪을 뻔한 태화는 합작을 내걸었다.
명분을 만들어 주기 위함이었고, 아주 잘 먹혀들어 갔다.
“당연히 싱가포르 대학 병원이죠.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 병원이 싱가포르 대학 병원이니까요.”
“그렇군요. 음……. 확실히 이수혁 교수의 이번 진단이 대단하기는 했습니다. 도움이 될 거 같기는 한데…….”
“한데요?”
“저는 찬성한다고 해도, 나머지 회원들이 문제입니다.”
“닥터 장이 제일 윗사람 아닙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움직일 수 있는 표가 제일 많기는 하지만…… 이런 건 여지를 남기면 안 됩니다.”
“음.”
학회 내에도 정치가 있기 마련이었다.
어디 국회에서 벌어지는 정치에 비하면 정말이지 소꿉놀이 같아 보이는 아무것도 아닌 정치긴 하지만.
하여간 고려해야 할 것이 있기는 했다.
특히 지금처럼 점차 가라앉고 있는 집단 내의 정치는 예민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어떻게?”
“몇 번 더 케이스가 쌓이면 어떨까요? 그럼 설득이 훨씬 쉬울 거 같습니다.”
“아……. 이런 식의 원격 진료를요?”
“네. 이번엔 의원님 부탁이라 사실 알음알음 넘어간 면이 있습니다만 병원 차원에서 하게 되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이 될 겁니다.”
“그건 저항이 없을까요?”
“있기는 할 테지만 본격적으로 국제 진료소를 짓는다고 하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겁니다.”
“흐음.”
리홍이는 닥터 장의 말을 들으며 그가 지금까지 한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의지가 있기는 하네.’
결과, 닥터 장은 이수혁에게 어떤 식으로든지 간에 넘어갔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진단이 됐는데도 모르겠다는 어려운 질환을 단박에 진단을 해냈다지 않는가.
‘그래, 뭐. 아주 급할 건 없어.’
이 건도 성공적으로 끌어낸다면 리홍이에게는 도움이 되긴 할 터였다.
하지만 이제 갓 의원이 된 몸인데 서두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아무것도 아닌 놈이라면야 얘기가 다르겠지만.
배경이 리홍이처럼 든든한 사람이라면 빠르게 가는 거보다는 확실한 길을 가야 했다.
그래야 면이 서니까.
괜히 이거 하겠다고 했다가 엎어지면 얼굴 들기 창피할 터였다.
“좋아요, 그럼 그렇게 한번 해 보시죠.”
“네. 어려운 케이스 있으면 일단 취합하라고 해 보겠습니다.”
“자존심을 너무 건드는 건 아닐까요? 그렇게 될 거 같으면 제 이름 정도는 얼마든지 파셔도 좋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단 이번에 본 케이스를 토대로 발표를 하도록 할 겁니다. 그럼 뭐 관심이 더 생기겠죠.”
“그것 묘수로군요. 아무튼, 이따가 얼굴 뵙도록 하겠습니다.”
“네, 의원님.”
닥터 장은 리홍이와의 인사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한숨을 한차례 내쉬었다.
‘국제 진료소라.’
한때는 이런 논의 자체가 필요 없었던 적도 있었다.
근처 나라에서 싱가포르에서 진료 보겠다고 너무 몰려와서 힘들었던 적도 있었고.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는 물론이고 꽤 떨어져 있는 필리핀이나 태국, 베트남의 부호들도 죄 이리로 몰려왔더랬다.
그러던 것이 상해가 발전하고 또 서울이 발전하면서 많이도 달라졌다.
특히 한국은 기업 병원들이 활성화되면서 엄청난 경쟁 상대가 되었다.
‘아니지. 경쟁 상대라고 하기도 뭣하지.’
이제는 한참 뒤에서 따라가는 입장이지 않은가.
싱가포르의 부호들이나 유출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한국의 시스템을 합작이라는 이름하에 들여와서 나눠 먹는 게 나아 보였다.
‘그래. 양부터 부르자.’
리홍이와의 통화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한 장은 양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교수님.”
“뭐 해?”
“일반 병동에 있습니다. 환자는 잘…….”
“그래, 잘했고. 연구실로 와 봐.”
“아, 네.”
양은 떨떠름했으나 겉으로 티는 내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
‘또 뭘 시키려고?’
교수가 까까 사 주려고 연구실로 부르는 경우는 아예 없다고 해도 좋을 터였다.
교수가 물론 레지던트를 가르치는 사람이니 고마운 존재인 것은 맞지만, 그런 생각이 좀체 들지 않을 정도로 혹독하게 일을 시키는 이들이지 않은가.
양은 툴툴거리며 연구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장이 미리 프린트해 둔 자료를 건넸다.
‘이거냐?’
역시 하면서 받고 보니, 바로 아까 본 환자에 관한 내용이었다.
“어…….”
“폐암 환자에게서 병발한 Talaromyces marneffei 케이스. 이거 희귀하잖아. 잘 해결되기도 했고.”
“그렇긴…… 하죠.”
“이번 증례 토의에 올렸어. 이거 발표해.”
“어…….”
의아함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케이스 자체만 놓고 보면 이보다 더 그럴싸한 케이스도 사실 드물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할 생각이 없다면, 발표 도중에 이수혁 얘기가 안 나올 수가 없는 케이스이기도 했다.
해서 어, 어 하고 있으려니 닥터 장이 말을 이었다.
“이수혁 교수한테 도움 요청한 것도 넣어.”
“네?”
“뭘 그렇게 놀라?”
“아니, 그게.”
“왜 나 기분 나쁠까 봐.”
“그, 그건 아니고.”
“처음엔 나쁘긴 했는데……. 맞았잖아. 그럼 할 말 없지.”
“아……. 네.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대신 잘해야 해. 쪽팔리지 않게.”
“네, 교수님.”
레지던트는 고개를 숙이고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곤 병동으로 돌아와 자료를 보는데 보면 볼수록 한숨이 나왔다.
아까 넙죽 하겠다고 한 게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 새끼는 왜 이렇게 멍청할까?’
생각해 보면 케이스 해결에 도움을 받은 게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도움이 필요했을 만큼 어려웠던 게 문제였다.
그 어려운 케이스를 뭐? 잘해야 한다는데 네, 교수님 하고 나와?
‘아이고……. 병신.’
보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달력을 보니 심지어 발표가 이틀 후였다.
‘아니, 이 개새끼가. 이렇게 어려운 케이스를 날짜도 안 주고 줘?’
양은 저도 모르게 욕을 하다가, 진동이 울려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환자 진짜 좋아졌다면서요?]
수혁바라기안이었다.
디엠을 문자처럼 보내는 사람이구나.
양은 난감하던 찰나에 누구한테라도 털어놓을 생각으로 답장을 보냈다.
[아, 네. 일반 병동으로 갔습니다.]
[그래요? 하긴 아까 의원님인가? 누구한테 전화 왔었어요. 수술만 하면 된다고.]
[아……. 네.]
[이게 다 수혁 교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수멘 하시죠.]
[그.]
근데 이놈이 말할 틈도 안 주고 수혁 찬양만 하고 있자 짜증이 났다.
양이 하나 생각 못 한 것은 안대훈이 생긴 것과 다르게 눈치가 빠르다는 것이었다.
특히 수혁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혹시 무슨 곤란한 일 있어요?]
[어……. 네.]
덕분에 양은 이놈이 점쟁이 빤스라도 입었나 하면서 답장을 보냈다.
[뭔데요?]
[아……. 별건 아니고, 이 케이스로 발표를 하라고 해서요. 근데 아시겠지만 보통 어려운 케이스가 아니라.]
[교주님께 말씀드려 볼까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