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8화 국제 진료소 (3)
수혁은 묘한 미소를 지은 채, 혈액종양내과를 돌고 있는 주제에 매일 통합진료센터로 출근하다시피 하고 있는 안대훈을 내려다보았다.
와서 일을 하나 했더니만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누군가랑 톡인지 뭔지 모를 것으로 대화 중이었다.
‘연애하나?’
[연애요? 안대훈도 수혁 못지않게 인기 없을 상인데요.]
‘굉장히 상처다 된다, 그 말은.’
[누구에게 말인가요?]
‘나, 나! 이 새끼야, 나.’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버럭 하는 수혁을 보며 바루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참 순진무구해 보이기도 하고, 또 귀여워 보이는 얼굴이기도 한데 늘 화가 나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후.’
화를 내 봐야 수혁만 손해 아닌가.
이러다가 화병이라도 나면 큰일이었다.
[그러지 않게 제가 잘 조절하고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오.’
별 소용은 없었지만.
하여간 한숨을 연달아 내쉬고 있으려니 인기척을 느낀 안대훈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영어로 무언가를 치면서였는데,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아니, 아까보다 한층 진해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 교주님.”
“오, 교주님? 아니, 넌 왜 자꾸 여기 와 있어. 혈종 널럴해? 그럴 리가 없잖아.”
“하하. 제가 누굽니까. 교주님의 첫째 제자 아닙니까.”
“제자가 없는데 뭔…….”
“아뇨, 아뇨. 제가 얼마나 많이 배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교주님. 레지던트실 때도 저는 단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주말 강의 빠진 적이 없습니다.”
“그…….”
부정하고 싶었다.
이런 게 욕망이라는 걸 바루다까지 느꼈을 정도로 강렬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정말 안대훈은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레지던트다 보니 물리적으로 몸이 없었던 적은 있는데, 그때는 늘 동료에게 부탁해 카메라로 수혁의 강의를 녹화했다.
정말 다시 봤을까 싶어서 다음에 물어보면 곧잘 대답했던 것까지 기억났다.
“맞죠?”
“그래, 뭐……. 그래.”
“그래서 제가 돌면 교수님들이 좋아하셔요. 빈틈없이 딱딱 보니까요.”
“그래? 음…….”
수혁은 다시 한번 안대훈을 바라보았다.
1년 차 때부터 별로 없던 머리숱이 이제는 전멸해 버린 지 오래였다.
아무리 조상님들의 공격이 거세다고 해도 이 나이에 이렇게 되는 건 참 드문 일인데.
‘대머리에…… 교주님이라고 부르는 이상한 놈이지.’
그래서 그런가, 이게 수혁의 대훈에 대한 일차적인 평가였다.
물론 조금 깊게 들어가면 열심히 하고 또 충성심도 있는 기특하면서도 고마운 친구긴 했지만.
앞서 말한 특징이 너무 인상적이다 보니 더 깊게 생각할 겨를이 적었다.
하지만 대훈이 이렇게 어필을 하자 이참에 안대훈에 대한 여러 교수들의 평가를 떠올려 보기로 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바루다는 진료에 필요한 지식만 저장해 놓는 것이 아니라, 원내 인사에 관한 것들도 데이터화를 해 두고 있으니까.
잠시 이렇게 많은 걸 데이터화하려면 용량이 부족할 수도 있을 텐데 어떻게 충당하고 있나 하는 궁금증이 일었으나, 바루다가 그런 틈을 주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 조태진이 이런 말을 했군요.]
‘오……. 진짜 잘 돌고 있기는 한가 보네? 병동에서는 딱히 신경 쓸 게 없게 한다……. 이건 극찬인데.’
[그러니까요. 신현태도 그렇고. 일단 지금 3년 차 중에서는 에이스인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안대훈이 의국장이죠. 실력이 좋다고 다 의국장을 하는 건 아니지만…….]
‘잘 못 하는 놈을 시켜 주진 않지.’
의국장, 병원에 따라서는 수석 전공의나 치프라 불리는 자리는 사실 귀찮은 자리기도 하지만 명예로운 자리기도 했다.
권한도 작지 않았다.
지금이야 병원 문화도 많이 민주적으로 변했다지만, 여전히 벌당 같은 걸 줄 권한은 의국장에게 있었다.
별당이 뭐냐면 당직이 아닌 레지던트에게 벌로 당직을 서게 만드는 것이었다.
크게 잘못하면 하루 정도는 당직 설 수도 있지 뭐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별당은 보통 이번 주, 또는 2주, 심하면 이번 달 주말 내내 같은 식으로 나갔다.
그야말로 엄청난 권한인데,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 시켜 주진 않았다.
후배들이나 동기들이 믿고 따를 만한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기는 해야 했다.
“잘하고 있긴 하더라.”
“앗, 아아.”
“울지 말고. 왜 이렇게 기복이 심해?”
“기쁨의 눈물입니다.”
“좋은 쪽으로 기복이 심한 것도 병이야. 알지?”
“명심하겠습니다. 저, 근데…….”
별안간에 눈물을 흘리던 안대훈이 수혁을 불렀다.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아랫사람인데, 이럴 땐 정말 무서웠다.
하지만 수혁은 표정 연기의 달인이니만큼 티를 내지 않고 무심한 듯 고개를 쳐들었다.
“왜?”
“제가 사실 지금 연락하고 있는 사람이…… 싱가포르 의사거든요.”
“싱가포르 사람이랑 연애를 한다고?”
“네? 연애요?”
수혁은 되묻은 안대훈의 얼굴에서 황당함과 비애가 동시에 서린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이현종이 이기자 교수와 잘된 나머지 기분이 너무 좋아 슈크림을 사 주면서 레지던트들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여자친구 있어?’
나이 60 넘어서 처음으로 연애하는 주제에 뭔가 조언이라도 해 주려고 했던 모양인데, 본의 아니게 몇몇에게는 상처를 주었다.
‘아뇨, 없습니다.’
‘헤어졌어?’
‘그냥 없어요.’
안대훈도 그중 하나였다.
모태 신앙도 아니고 모태 솔로라니.
의사가 학생 때부터 바쁜 직업이긴 하지만 그래도 연애할 시간은 다들 내는데, 이건 좀 심한 거 아닌가 싶은 순간이었다.
하여간 수혁은 아차 싶어서 말을 재빨리 돌렸다.
“농담이야. 왜? 누군데?”
다행히 안대훈은 상대가 수혁이라면 무슨 말이건 인내할 믿음이 있는 사람이기에 별 타격 없다는 얼굴로 즉시 답했다.
“양즈이라고, 닥터 양입니다. 그…… 지금 싱가포르 대학 병원에서 교주님이 진료 봐주신 환자 주치의예요.”
“어……. 그래? 그걸 대체 어떻게.”
“교주님의 명성이 외국에서도 자자한 모양입니다. 인스타로 먼저 연락이 왔어요.”
“아…….”
대체 왜 내 명성이 자자한데 너한테 연락이 갔냐는 말이 막 나올 때쯤, 안대훈이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수혁바라기안이라는 아이디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뭐냐.”
안대훈이 보여 주고자 했던 건 그게 아니었기에 대화는 자연스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 친구가 그 케이스로 증례 토의를 하게 된 모양이에요.”
영 재미없는 주제였다면 싹 무시했을 텐데, 그렇지는 않았다.
도리어 흥미가 싹 동했다.
“이 케이스로? 이거 그럼 내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러니까요.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게 워낙 어렵…….”
“잠깐.”
안대훈이 신이 나서 말을 더 이으려는데, 누군가 끼어들었다.
이현종이었다.
이마에 자국이 나 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기에 이제 막 심혈관 중재시술실에서 나온 모양이었다.
진단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애초에 심혈관 중재 시술의 아버지이지 않은가.
여전히 수술복 위에 납복을 걸쳐 입을 때면 심장이 두근거린다는 양반인 만큼 센터에 와서도 시술은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어, 원장님.”
“원장은 현태고. 나는 센터장이지.”
“아, 네. 센터장님.”
“근데 넌 왜 여깄니? 이번 달 여기 아니잖아.”
“그게…… 의뢰했던 환자가 혈종이라서요. 저도 혈종이고.”
“음.”
이현종은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하다 여겼지만 대강 넘어가기로 했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현태가…… 이번에 처음으로 원격 진료했다고 했지?’
심지어 그 자존심 높은 싱가포르 대학 병원에서 의뢰를 받았다고도 했다.
이현종은 돌연 대견한 마음이 들어 일단 수혁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아, 아빠. 감사해요.”
다른 사람 같았으면 이 인간이 왜 이러나 싶기도 했겠지만, 이현종의 기행은 하루 이틀이 아니기에 수혁은 자연스레 화답했다.
안대훈은 그 모습을 보며 또 눈시울을 붉혔다.
교주님의 행복한 가정을 보고 있으려니 자신이 다 뿌듯해져서였다.
‘그 케이스로 증례 토의를 한다……? 지금 태화에서 국제 진료소를 일단 싱가포르 대학 병원이랑 합작해서 하려고 하는데 이 타이밍에?’
그사이 이미 이현종은 다시 아까 생각으로 돌아가 있었다.
평생 의학적으로만 굴려 왔던 머리를 수혁을 위해 정치적인 계산을 위해 굴리기 위함이었다.
보통 영 생소한 분야를 생각하게 되면 머리가 잘 안 돌아야 하는데 이현종의 머리는 워낙 좋아서 그런가 예열이나 연습이 필요 없었다.
“옳거니.”
“네?”
남들은 예열이나 연습이 필요하기에 당장 이현종의 생각을 따라가기는 어려웠다.
수혁도 마찬가지였다.
해서 이 양반이 왜 이러나 하고 있으려니, 이현종이 껄껄 웃었다.
‘기복이 심한 게 안대훈뿐이 아니로구만.’
다들 조증이 생겼나 하는데 이현종이 웃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수혁아, 이거 도와줘라.”
“네? 왜요?”
“이 케이스 얘기할 거면 무조건 네 얘기해야 해. 그거까지는 너도 알겠지?”
“아무래도 그렇죠.”
“이거 기깔 나게 하면 거기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음……. 뭐 어려운 케이스를 의뢰해서 잘 진단했네?”
“그렇지, 그렇지. 이건 내 생각인데 말야.”
이현종은 후후 웃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방금 떠올린 추론이 너무나 대견해서였다.
이 정도 기행은 옳거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수혁은 그저 보고 있었다.
약간 기대도 했다.
이현종이 이럴 때 또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기도 해서였다.
“네가 리홍이랑도 엮여 있고 하잖아.”
“네. 우연히 그렇게 됐죠.”
“실력이 좋아서 그렇게 된 거지. 하여간 압력이 있을 수밖에 없어. 태화에서 싱가포르에 투자하겠다고 한 돈이 적지가 않거든. 거기 지금 경기 맛탱이 가고 있는데 지역구 의원으로서는 거기에 병원 지어 준다고 하면 무조건 좋지. 일단 짓는 것부터가 호재야.”
“어……. 네.”
이현종의 말은 아주 그럴싸한 면이 있었다.
평생 병원 안에서만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게 다 이수혁을 향한 사랑 때문에 가능한 일인데, 수혁도 그걸 알기에 집중해서 들었다.
“그런데 리홍이는 개인적으로 은혜도 입었고 네 실력도 알잖아. 강력하게 원할 거야.”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럴 거 같아요.”
“문제는 반발인데. 우리도 그랬었거든 존스 홉킨스 병원 들어온다고 할 때. 솔직히 지금 같으면 그냥 실력으로 발라 버릴 수 있지만……. 그래도 이게 이름값이라는 게 무시 못 하는 거라. 아, 얘기가 잠깐 샜는데……. 하여간 싱가포르 쪽에서도 기존 의사들이나 병원에서 저항이 있을 거란 말야.”
“네. 엄청나겠죠.”
“설득하려면 뭔가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이 케이스를 시작으로 여러 케이스를 원격 진료했는데 성공적이면 할 말이 있겠지?”
“아…….”
“그래서 증례 토의에 내게 된 거 같아. 그러니까 도와줘. 닥터 양인지 쉽인지 나발인지 똑똑하진 않겠지만 네가 도와주면 잘하겠지.”
“음. 알겠습니다. 제가 해 볼게요.”
“그래. 도움 필요하면 싱가포르 주재원한테도 말하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나야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