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9화 원격 발표? (1)
이현종의 말은 아주 그럴싸했다.
더불어 수혁은 지금 별로 할 일이 없기도 했다.
어려운 케이스가 없다는 얘기는 아닌데, 그렇다고 해결이 안 될 만큼 어려운 케이스는 아니어서였다.
진단명 두 개 중 하나가 맞는데 좀만 기다리면 답이 나오는 그 정도가 다였다.
“오케이, 그럼 도와줄까. 걔 전화번호 좀 달라고 해 봐.”
“네? 직접 전화하시게요?”
“그럼 어떻게 해?”
“아……. 그건 새 신자에게 너무 커다란 은혜…….”
“아빠 있는 자리에서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아, 네. 알겠습니다.”
수혁바라기 안대훈은 이현종을 힐끔 돌아보고는 다시 디엠을 보냈다.
사실 이현종은 수혁을 교주로 부르건 말건 별 상관 할 생각은 없었다.
그게 수혁에게 해가 된다면 또 모르겠는데, 지금까지는 득이 되고 있어서였다.
평생 하지 않던 짓, 그러니까 원내 평판을 조사해 봤는데 수혁에 대한 레지던트들의 지지도가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해서 폭발적으로 오르고 있었다.
‘그게…… 저놈이 교주님, 교주님 하면서야.’
합리적인 사고를 해 보면 오히려 반대가 되어야 할 거 같기는 했다.
하지만 기왕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왜 저항을 한단 말인가.
왜 그럴까 궁금해해 볼 수는 있지만, 대체 왜 이러나 하고 화를 낼 필요는 없다는 얘기였다.
“번호 알아냈습니다. 전화…… 제가 걸까요?”
“국제 전화비 비싸잖아. 내가 할게.”
“어…….”
“그 표정은 짓지 말았으면 좋겠다, 대훈아. 내가 진심으로 얘기하는 거야.”
수혁은 전화 자기가 건다는 말에 비련의 주인공 같은, 그러니까 사랑에 배신당한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대훈을 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하마터면 칠 뻔했다.
“어어, 수혁아. 주먹질은 좀.”
이현종은 수혁의 주먹을 풀어 준 후, 대훈을 나무랐다.
맞을 뻔한 사람을 나무라는 게 할 짓인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억울하면 아들이 되면 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였다.
“너도 인마 그런 표정이 뭐야. 나도 때릴 뻔했어.”
“아, 네. 시정하겠습니다!”
“그래, 하여간 전화해 봐. 수혁아. 번호는 여깄다.”
수혁은 편애로 가득한 이현종에게 전화번호를 받아 전화를 걸었다.
전화번호를 방금 알려 달라고 해서 그런가, 아니면 너무 어려운 케이스에 고뇌에 차 있어서 그런가 닥터 양은 바로 받았다.
“네.”
“안녕하세요. 태화 의료원 이수혁 교수입니다.”
“아, 교주님!”
“교주……?”
“네, 교주님!”
수혁은 저도 모르게 안대훈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안대훈이 뻔뻔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곧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외국인이라 교수라는 발음이 어렵나?’
[저도 모르죠, 그건. 싱가포르에서도 영어만 써서…….]
‘그러고 보니까 그냥 프로페서라고 하면 될 걸 왜 교주라고 해?’
[도와준다니까 너무 감사해서 그런 건 아닐까요? 최대한 한국어 써 볼라고.]
‘아……. 예의를 아는 친구로구만.’
바루다와의 대화를 통해 오해를 다진 수혁은 교주라는 호칭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기로 결심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 초기 폐암 환자에 병발 된 Talaromyces marneffei 감염 케이스 발표를 하게 됐죠?”
“네. 이게 시간도 촉박한데……. 흔치 않은 케이스라…….”
“그렇죠. 흔치 않죠. 감별점도 어렵고요.”
“네. 맞습니다.”
“일단 주된 요점은…… 암 환자에서 면역력이 흔들려서, 항암 치료가 없이도 기회감염 가능성이 올라간다 이거부터 시작해야 할 거 같습니다.”
닥터 양은 교수라 해도 이거 발표하라고 하면 일주일은 각 잡고 준비해야 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닥터 장이라면 틀림없이 그럴 터였다.
제아무리 싱가포르 내과 학회장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거라 믿었다.
교수면 교수지 저가 뭐라고.
다 같은 사람 아닌가?
사실 입학 결과만 놓고 보면 아마 닥터 양이 더 높을 터였다.
장이 학교 들어갈 때만 해도 싱가포르는 세계 금융 허브였고, 의사보다 잘나가는 직업이 수두룩했으니까.
‘어……. 이게 이렇게 바로 나와?’
근데 이수혁은 전화를 걸자마자 대번에 흐름을 잡고 있었다.
심지어 그냥 툭툭 던져 대는 제안이 아니라 반드시 이걸 따라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말이었다.
이래서 신으로까지 불리는구나.
양은 설마 아까 구글링하다 찾은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라는 만화 모티브가 수혁이었나 하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정말 좋은 의견이십니다.”
“예전에는 완전히 무시 되던 개념인데 이제는 그렇지가 않으니까…… 충분히 화두가 될 거 같아요. 이 케이스도 그 개념이 없이는 해결이 불가했고요.”
“네. 맞습니다.”
“하지만 이것만 물고 늘어져서는 얘깃거리가 적을 겁니다. 원래 어떤 걸 진단할 때는 감별점이 더 중요할 때가 많죠. 특히 이 케이스는…… 양성 소견보다는 음성 소견이 많았고, 실제 진단에도 음성 소견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으니 더더욱 그렇죠.”
“아……. 네.”
대단한 사람이라서 그런가 분명 통화를 하고 있고, 그리 어려운 말로 떠드는 게 아닌데도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사고의 회전이 휙휙 바뀌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너무 빨라서였다.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찢고 계시네.’
‘찢네 찢어. 내 새끼 저러는 걸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봐야 되는데.’
비단 양만 아니라 안대훈과 이현종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현종은 심지어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고 있었다.
누구 보여 줄 사람도 없으면서였다.
별로 상관은 없었다.
소장용이었다.
“그러니 Talaromyces marneffei가 제일 호발하는 상황도 언급하는 게 좋겠습니다.”
“네, 그게 어떤…….”
“아, 모르나.”
“네?”
이런 것도 좋았다.
무심한 말투로 넌 이것도 모르냐, 뭐 이런 느낌.
어깨 위에 달고 다니는 건 대체 뭐냐.
이현종과 안대훈은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통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수혁은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여전히 무심한 말투 그대로 말을 이었다.
“모를 수도 있지. 에이즈 환자에서 호발하죠, 이건 알아야 하는데 사실.”
“아, 네네.”
“특히 그쪽 지방에서 호발한다고. 임상 특징도 언급해야겠죠.”
“그…….”
“이것도 모르나?”
수혁은 후 하고 한숨까지 쉬었다.
안대훈과 눈을 마주치면서 얘기하고 있어서 더 그랬다.
절로 한숨이 나올 만한 모습을 하고 있다, 뭐 이런 얘기는 아니었다.
도리어 안대훈이라면 알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긴 쟤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도 드물긴 하지.’
[수혁이야 제가 있어서 더 그랬다고 치지만……. 안대훈은 진짜 대단한 겁니다.]
‘응. 거의 뭐 예배드리듯 공부한다며.’
[맞습니다. 그렇게 보면 교주라고 부르는 게 순기능이 지대하군요.]
‘그래도 그건 좀…….’
말 그대로 경건한 자세로 공부를 하는 놈이었다.
사실 레지던트라는 게 따로 시간을 내서 공부할 수 있을 만큼 널럴한 사람들이 아닌데 공부를 한다는 건 그 자체로 대단한 것이었다.
근데 공부를 그냥 하는 것도 아니고 목욕재계를 하고 수혁의 일거수일투족이 녹음된 자료와 함께해?
실력이 안 늘기가 더 어려웠다.
닥터 양도 개판 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안대훈에 비하면 개판이라는 말을 들어도 싼 상황인지라 수혁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차라리 증례 토의에서 타는 게 났겠는데?’
종래에는 이런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도움받으려고 전화번호를 알려 줬더니만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태울 줄이야?
상대는 방금 요청을 받았을 뿐, 사전에 공지된 사항이 하나도 없었다는 걸 생각하면 무서울 정도로 집요했다.
“발표가 언제라고요?”
“내일모레입니다.”
“거기 지금 몇 신데요?”
“이제 오후 12시입니다.”
“세 시간 늦구나. 그래도 대세에 영향은 없을 거 같은데, 어쩐다.”
반면 수혁도 이후 질문에도 연달아 답하지 못하거나 어설픈 답만 하고 있는 양을 보고 있으려니 걱정이 태산 같아졌다.
‘아빠 말이 진짜 그럴싸한데.’
[그럴싸한 게 아니라 합리적입니다. 이 발표를 기점으로 일이 더 수월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다고 나한테 뭐가 떨어지기는 하나?’
[더 어려운 환자들이 몰리겠죠? 태화의 이름이 올라가면 그건 따라오는 겁니다.]
‘오호. 아니, 내가 왜 이걸…… 하.’
어려운 환자가 몰린다는 말이 이렇게까지 매력적으로 들릴 일인가.
수혁은 잠시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 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이미 바루다 때문에 더럽혀진 정신 아닌가.
이젠 어려운 케이스 없이는, 그러니까 의학적 자극이 없이는 즐겁게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동떨어져 보이는 단서를 모으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유추해서 올바른 진단을 내렸을 때 오는 쾌감, 그리고 그로 인해 환자가 좋아지는 것을 보는 쾌감은 가히 마약과도 비견될 만했다.
돌이킬 수 있을까?
이러한 즐거움을 몰랐다면 몰라도, 알게 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안 되겠는데, 이틀은 촉박해요.”
“어……. 어어……. 그럼 지금까지 해 주신 말이라도 다시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녹음을…….”
“발표를 포기하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 네?”
“닥터 양을 포기하겠다는 말이에요.”
“네?”
닥터 양은 장과는 좀 다른 의미로 기분이 상했다.
이 새끼도 교수라더니 나쁜 놈이지 않은가.
눈앞에서 어떻게 사람을 두고 포기하겠다는 말을 이렇게 냉혹하게 할 수 있을까?
어이도 없고, 진짜 포기해 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사이 수혁은 이현종을 돌아보았다.
“어, 왜. 아들. 왜.”
“주재원한테…… 원격 스피커랑 마이크 구해다 이 친구한테 주라고 해 주실 수 있어요?”
“응? 그건 왜?”
“발표…… 제가 불러 주는 대로 하게 하려고요. 배경 지식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이해시키는 건 불가해요. 그래도 불러 주는 거 그대로 따라 하는 건 되겠죠.”
“아하. 그래. 근데…….”
“응? 왜요?”
“너 지금 그거 영어로 왜 말하니?”
“아.”
바루다 덕인지 뭔지 영어도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보니 저지른 실수였다.
‘와 개새끼. 사람 무식하다는 말을 이렇게 길게 풀어서 자세하게 해 주네? 강의를 이렇게 해 줬으면 벌써 Talaromyces marneffei 다 이해했겠다.’
쌍욕보다 더한 소리를 들은 양은 어깨가 축 처진 채 병원 벽에 기대고 있었다.
지나던 간호사들이 이렇게 소곤댈 정도로 정신이 나가 보였다.
‘누가 돌아가셨나?’
‘그러게……. 사람은 착한데…….’
‘어휴.’
수혁이야 그런 모습이 보이는 게 아니니 그렇게까지 미안하단 생각이 들진 않았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 여겼다.
그리고 도우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정말 뻔뻔하군요, 수혁.]
‘내 장점이지.’
[와우.]
재빨리 자기합리화를 시전한 수혁은 수화기에 대고 입을 열었다.
“기다리면 PPT 자료랑 물품 갈 거예요. 그거 달고 하면 될 거야. 모르는 거 있으면 대훈이한테 보내고……. 저랑은 발표 당일에 봅시다. 내가 거기 있는 사람들 다 놀라게 해 줄게.”
싸가지 없기는 한데 동시에 믿음직스럽기 그지없는 발언이기도 했다.
이게 안대훈이 말하던 조련이라는 건가 혹시.
양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수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