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500화 (500/1,303)

500화 원격 발표? (2)

양은 곧 수혁이 만든 PPT와 기타 자료 그리고 원격 강의를 위한 기구까지 전달받을 수 있었다.

상상하기론 뭔가 은밀한 일이니만큼 시커먼 정장 차림의 누군가가 올 줄 알았는데, 태화 직원은 그냥 반바지에 반팔 차림이었다.

“어……. 이거면 됩니까?”

“네? 네. 그거면 되죠. 아, 참 하나 빼먹을 뻔했네.”

한국의 여름도 만만치 않은 편이지만 동남아시아 국가의 진짜배기 더위에 비교하면 별거 아니라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평범한 한국인에게 싱가포르의 더위는 정신을 혼미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그런가 반팔 반바지 차림의 직원은 다소 프로답지 못한 얼굴을 한 채 허둥댔다.

“여기요. 이거 전달하라고 하셨어요.”

“이건 뭔가요?”

말만 들었을 땐 되게 중요할 거 같았는데, 막상 받고 보니 종이 쪼가리였다.

그것도 땀에 젖어서 그런가 축축했는데, 신뢰도가 뚝뚝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행동 지침이라던데요? 발표 전에는 까 봐야 소용없을 거고……. 발표 시에 당황할 만한 일이 생기면 열어 보라고 했습니다.”

“아니, 무슨 제갈량도 아니고.”

심지어 전설 같은 얘기인 만큼 사실이 아닐 공산이 컸다.

세상에 제갈량이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어찌 앞일을 점칠 수 있단 말인가.

양이 보기에 옛사람들은 허언증을 기본으로 탑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주는 건데 안 받기도 뭐해서 받아다 주머니에 넣었다.

열어 보진 않았는데, 수혁이 발표 전엔 까 보지 말라고 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땀에 젖어 있다 보니 찜찜해서였다.

“야, 발표 준비는 잘돼 가냐?”

땀에 젖은, 그대로 더 두었다가는 땀 자체가 될 거 같던 직원을 보내고 병원 식당에 들어오니 누군가 어깨를 툭 하고 쳤다.

뒤를 돌아보니 동기 녀석이 징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려운 발표를 맡게 된 것이 꼬신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이놈이 나쁜 놈이란 건 아니었다.

원래 누군가의 불행은 내 행복이 되지 않던가.

샤덴프로이데라는 말이 괜히 나오고, 또 현대 심리학의 연구 대상이 됐을까.

‘개새끼.’

물론 이해한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양은 속으로 욕을 주워 넘기면서도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

비록 조상 때 이미 대륙을 떠나 작디작은 도시 국가에 자리했지만 본성이 어디 갈까.

양은 대륙인 특유의 만만디를 뽐내며 대꾸했다.

“그냥저냥이지.”

“나는 그거 이름 처음 들어 봤는데……. 그냥저냥이 아니겠는데?”

“뭐……. 그렇지? 어려워.”

“가뜩이나 너 저번에 발표 조져서 부담일 텐데……. 하필 이번 발표는 주제부터 어려워서 안됐다.”

안됐다는 말을 입에 담으면서 이런 표정이라니.

양은 잠시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일단은 참았다.

그저 참고 넘기는 게 이기는 거란 생각 덕은 아니었다.

‘이수혁 교수님이 도와주겠지.’

아직 PPT는 보지도 못했지만, 수혁이 발표하는 모습은 여러 차례 보지 않았나.

팬 계정인지 종교 홍보 계정인지 모를 인스타 계정을 수도 없이 들락거리다 보니 안 보기가 더 어려웠다.

‘거의 발표장을 씹어 드시던데…….’

영어 발음부터가 예술이었다.

본토 발음 그 자체인데, 톤도 좋고 무엇보다 속도도 좋았다.

그걸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다면 먹고 들어가는 바가 아주 클 터였다.

‘내용은 또 어떠냐.’

간결하면서 동시에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어쩌다 한 번씩은 그럴 수도 있겠는데, 모든 발표가 다 그랬다.

그렇다 보니 한번 틀어 두면 발표가 끝날 때까지 멍하니 있게 되기 일쑤였다.

양이 그렇게까지 학구적인 사람이 아님에도 그랬다.

“괜찮아. 이번엔 느낌이 좋아.”

“느낌이 좋아? 뭔 이상한 말을 하네. 우린 의학자야, 양. 점쟁이 같은 게 아니라고.”

“잘할 거 같다, 이런 뜻이지.”

“그래? 으음…….”

양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어깨를 쳤던 동기는 찜찜한 표정이 되었다.

의대 동기라는 게 학창 시절에 비유하면 같은 반 친구 정도는 될 터였다.

여기서 말하는 친구가 진짜 친구를 의미하진 않는 것처럼, 동기라 해서 다 같이 친하게 지내는 건 아니었다.

‘너도 장한테 추천장 받고 싶지? 나야 뭐 거의 나가리지만……. 그래도 못했으면 싶고?’

반 친구는 성적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라면 여기는 자리를 두고 경쟁했다.

오히려 더 치열한 편이었다.

성적은 1등이나, 2등이나 절대적 차이가 적다면 대학 진학에는 문제가 없지만, 이곳에서 두고 경쟁하는 자리는 누군가 차지하면 2등은 의미가 없어지니까.

그런 의미에서 싱가포르 대학 과장의 추천장은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학계에 남는 게 아닌 이상에야 졸국 하는 순간 의국과 얽힐 일이 있기는 해도 적은 대한민국과는 달리 싱가포르에서는 학회 유력 인사의 추천장이 곧 취직과 즉각적으로 연계가 되어서였다.

“아무튼, 뭐 잘해 봐라. 어려울 거 같던데.”

그렇다 보니 동기들끼리도 자연스레 교수들의 눈에 들기 위한 경쟁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병원이라면 그래도 좀 덜할 수도 있겠지만 싱가포르 대학 병원은 싱가포르 내의 병원 중 최고라 더했다.

여기 교수들의 추천장은 심지어 영국이나 미국 등에서도 일부 통할 정도로 강력했다.

“그래, 먹었으면 가.”

양은 외국에까지 나갈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싱가포르 도심에 있는 병원에 취직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장이나 다른 교수들의 눈에 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이전까지는 그것도 반쯤은 포기 하고 있었다.

동기 녀석의 말대로 저번 발표를 완전히 조져 버린 탓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케이스도 아니었는데 그래 놨으니, 눈에 들었을 턱이 없었다.

아마 이번 발표도 시간만 있었다면 양에게 떨어지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기회인가.’

처음엔 그저 일이 늘어서 짜증만 났는데, 동기 녀석이 와서 불난 데 부채질을 하고 난 뒤라 그런가, 오히려 머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 이거 잘하면…… 만회는 되겠지.’

잘하는 게 불가능했으면 이런 생각도 불가능했겠지만.

무려 이수혁이 도와주겠다고 나선 상황이었다.

양이 볼 때 이수혁은 장 따위는 상대로 되지 않는 훌륭한 인물이었기에 기대가 되었다.

‘그래, 준비할 필요 없다고 했지만…… 최선을 다해 볼까.’

마침 장이 양에게 발표하라고 해서 당직도 바꿔 준 참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시간이 많은 건 결코 아니었으나, 원래 병원일 중 진료 외적인 일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하는 게 정석이었다.

해서 양은 우걱우걱 밥을 쑤셔 넣고는 당직실로 돌아왔다.

별로 아쉽지는 않았다.

한국 사람들처럼 밥에 목숨 거는 사람들은 세계적으로도 드물어서, 병원 밥치고 맛있단 생각이 드는 곳은 없어서였다.

그나마 미국보다야 낫겠지만 이곳도 그저 그렇기는 마찬가지였다.

“와…….”

그렇게 도착해서 PPT를 켠 양은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간결하기 짝이 없지만 딱 PPT만 봐도 흐름이 대강 보였다.

심지어 대본도 따로 작성이 되어 있었다.

‘성인군자가 따로 없네……. 이걸 생판 남인 날 위해 만들어 줬다고?’

양은 이 발표가 가지는 대외적인 의의를 전혀 알지 못하기에 그저 수혁의 호의에 감사하단 생각만 들었다.

수혁바라기안처럼 신앙이 단숨에 생기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하여간 인간적인 호감은 맥스치를 단번에 돌파해 버렸다.

열심히만 하고 잘 못 했다면 또 얘기가 달라질 텐데, 이 인간은 그런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일주일은 밤낮없이 매달렸어야 가능했을 정도로 완벽한 PPT와 대본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거의 뭐 1시간도 안 걸렸을 거 같은데…….’

전화 끊고 직원이 찾아온 게 기껏해야 전화 끊고 2시간이 채 지나기 전이었다.

그 말은 곧 1시간 안에 만들었단 뜻이었다.

미쳤구나 싶었다.

실제로 걸린 시간은 타이핑 하는 시간뿐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본인이 미쳤을 텐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거기까지는 알 길이 없어서 수혁이 미쳤다고만 여겼다.

‘그래, 이거면…… 된다.’

하여간 양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PPT에 맞춰 대본을 달달 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발표 날이 되었다.

그제야 이 새끼가 저번 발표를 조졌었다는 게 생각난 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리홍이한테 큰소리 탕탕 쳐 놨는데 꼴 우습게 되면 어쩌지?’

개인적인 보복이 있거나 하진 않을 터였다.

하지만 호의를 거두는 것만으로도 두려워지는 게 바로 로열패밀리였다.

이런저런 혜택이 사라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

가령 출퇴근 시간에 제한 없이 도로에 차를 끌고 나올 수 있는 것도 특혜였다.

싱가포르는 대강 보기엔 왜 저렇게까지 하나 싶을 만큼이나 빡빡한 법률이 많아서, 그 법률에서 한두 개만 빗나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삶의 질이 팍 올라갔다.

“너 자신 있어?”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튀어 나간 말은 단순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감도 좋네.’

[그러니까요, 잘 들리네요. 지연도 없는 거 같고.]

이미 양은 건네받았던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다.

대본을 다 외우긴 했지만, 발표라는 게 어디 준비한 대로만 흘러가던가.

어려운 케이스 발표일수록 이놈 저놈 다 끼어들 수 있는 게 레지던트 발표였다.

“자신 있습니다.”

하여간 수혁은 이렇게 말했고, 양도 딜레이 없이 그의 말을 좇아 답했다.

“자신 있습니다.”

최대한 목소리 톤과 말투까지 따라 했기에, 장은 조금 어색한 느낌을 받았다.

원래 표정을 여유롭게 짓고 있으면 목소리도 비슷하게 따라가는 법인데, 그 반대도 가능하지 않겠나.

때문에 장은 어딘지 모르게 건방져 보이기까지 한 양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러니까 똑똑해 보이네.’

장은 의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잘할 수 있겠다는데 뭐라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발표가 한참 남은 상황이라면 점검이라도 할 텐데, 현생이 바빠서 챙기지 못한 상황이라 자격도 없다 할 수 있었다.

“그래, 잘해라.”

“네, 교수님.”

사소한 답이었지만 양은 수혁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그래야 오늘 발표에서 아주 강력한 인상을 줄 수 있을 거란 조언을 따른 것이었다.

아마 발표하는 걸 못 봤다면 무시했을 텐데, 한 번 본 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아직도 수혁이 발표했던 내용은 뇌리에 깊숙이 남아 살아 있는 지식이 되어 있지 않은가.

단지 강의만으로 그럴 수 있다니.

정말이지 대단한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자, 다들 모인 거 같으니 시작하겠습니다. 닥터 양 올라와요.”

단상 위에 선 사람은 장이 아니라 다른 교수였다.

장이 맡았던, 그마저도 외국인 의사에게 도움받았던 케이스를 발표하는데 좌장을 장에게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해서 장은 초조한 얼굴로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분위기를 연신 살피면서였는데, 당연히 그리 좋진 않았다.

장이 학회 내에서도 그렇고 원내에서도 꽤 높은 편이라 대놓고 수군대는 사람은 없었으나 하여간 내키지 않아 한다는 것 정도는 느껴졌다.

‘대체 왜 외국인 의사한테 도움받은 케이스를 낸 거야?’

‘그보다 왜 도움을 받은 거래?’

‘모르지. 노망 날 나이는 아닌데.’

노골적이면서도 적대적인 시선은 그대로 양에게도 쏟아졌다.

‘윽.’

저도 모르게 당황하고 있으려는데, 평온한 수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은 내 말만 따르면 됩니다.”

목자 되신 수혁 같았다.

순간 마음이 편해진 양은 수혁의 말을 그대로 읊었다.

“안녕하십니까, 닥터 양입니다. 이제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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