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501화 (501/1,303)

501화 원격 발표? (3)

수혁은 여느 때처럼 유려하게 강연을 끌고 나갔다.

이게 장비가 후졌다면 좀 어려웠을 수도 있을 텐데, 과연 태화의 기술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양이 끼고 있는 안경이 대단했다.

현장을 그대로 모니터로 출력해 주고 있었다.

[스파이가 따로 없네요.]

‘그러니까 말야. 현장 분위기를 싹 읽어 낼 수 있잖아.’

덕분에 수혁은 현장에서 발표하는 듯한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Talaromyces marneffei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남아 등지에서 대표적인 기회감염원 중 하나입니다. 실제로 면역이 정상인 환자에게서도 피부염을 일으키곤 하죠. 그만큼 우리 싱가포르 대학 병원의 의료진들이라면 아주 잘 알고 있어야 하는 토착 감염병입니다.”

양은 그런 수혁의 말을 그대로 읊으면서 동시에 경외감을 느꼈다.

정말 싱가포르 대학 병원 의사가 된 듯 말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대본을 그대로 따라가지도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그게 더 좋게 들린다는 점이었다.

완벽하기 그지없다는 생각만 들었던 대본이었는데, 현장에서 슬쩍 바꾼 게 더 낫다니.

“지금까지는 주로 에이즈 환자에서 Talaromyces marneffei가 일으키는 감염에 대해서만 포커스를 맞춰 왔습니다. 하지만 사실 Talaromyces marneffei는 암 환자에서도 감염을 잘 일으킵니다. 특히 폐암 환자에서 폐렴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는 몇 가지 기전 때문인데…….”

어떻게 된 게 말 줄임표까지 완벽했다.

적절한 때 섞어 넣는 침묵은 오히려 사람들의 집중력을 끌어올리기 마련 아니던가.

지금이 그랬다.

양은 단 한 명도 졸거나 스마트 폰을 보지 않는 청중을 보면서 일견 두려움마저 느꼈다.

‘와……. 발표를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수혁은 그렇게 이목을 끈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우선 암의 발생 원인입니다. 최근 주류로 발돋움하고 있는 면역 항암제를 봐도 알 수 있듯, 암은 우리 면역 체계에 이상이 발생했을 때 보다 쉽게 발원합니다. 텔로미어의 에러로 인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암세포는 대부분 면역 세포에 의해 발각되고 또 파괴되지 않습니까? 노화로 인해 암 발생률이 올라간다는 건 결국, 텔로미어의 에러 개수도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러한 감시망 또한 느슨해진다는 것을 의미하죠.”

유려하기 짝이 없는 발표였다.

아마 암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이 발표를 들으면 관심이 생기지 않을까?

원래 지식이 있던 사람들은 행간에 위치한 배경 지식에 놀라 집중할 것이고.

‘와……. 사람들 눈 빛나는 거 봐라.’

아니나 다를까, 청중 모두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초롱초롱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듯, 잠시 강의실이 환해졌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특히 동기 녀석들의 눈에서는 레이저가 나올 듯했다.

‘저 새끼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지?’

그중 식당에서 시비를 걸었던 녀석은 손톱을 물고 있었다.

초조할 터였다.

딱 한 번 발표 잘했다고 무슨 대세에 영향이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이렇게 압도적인 발표를 하고 나면 영향이 있을 거 같았다.

“즉 암이 발생했다는 건 어느 정도 면역 체계에 이상이 생겼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는 뜻입니다. 기회감염이 발생할 여지가 있다고 봐도 좋겠죠. 또 다른 이유는…….”

그렇게 신들린 듯, 실제로 수혁이 빙의한 채로 발표를 이어 나가던 양이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수혁의 감미로운 목소리 대신 띠 하는 대기음이 들려와서였다.

이게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구나 싶었다.

하필 잘하다가 중간에 이럴 줄이야?

누군가 제밍(jamming: 전파 방해)이라도 걸었나 싶었다.

‘미쳤네? 시발?’

그 짧은 시간에 조상님부터 해서 아는 신 모두를 불러 재꼈으나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그때 수혁이 건네줬다던 종이 쪼가리 하나가 생각났다.

무슨 일이 생기면 펴 보라고 했었다.

‘도움이 될까?’

의심이 불현듯 일었으나, 실제로 지금까지는 도움이 되지 않았나.

게다가 달리 뭐 돌아볼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해서 양은 떨리는 마음으로, 직원의 땀에 젖은 채 가운에서 숙성되고 있던 종이쪽지를 들여다보았다.

중간에 망했다를 연발하면서였으나, 남들이 보기엔 대본을 보나 싶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사실 발표 중간에 대본을 보는 게 그리 좋은 행위는 아니었으나 이렇게 발표를 잘하고 있으면 어느 정도 용인이 되는 법 아닌가.

때문에 교수들 중에는 누구 하나 나무라는 얼굴이 없었다.

[이 쪽지를 꺼내고 펴는 동안 통신은 재개될 것.]

쪽지에는 그저 이렇게 쓰여 있었다.

뭐야, 하는 사이 삐 소리가 사라지고 다시 수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면 멈췄었는데 말 하나도 안 들어갔죠? 다시 갑니다.]

양은 하마터면 큰 소리로 수멘이라고 외칠 뻔했다.

정말 신의 응답이 따로 없었다.

“폐암은 폐를 파괴하는 병입니다. 파괴된 조직인 상대적으로 감염에 취약해지죠. 이미 방어막이 손상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폐암이 있는 사람은 폐렴의 형태를 띠는 기회감염에 취약해집니다. 이러한 기전으로 인해 이 환자는 Talaromyces marneffei에 이환 되었을 거라는 걸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양은 다시 들려오는 수혁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그대로 전했다.

그 후로는 통신이 끊기는 일이 없어서 끝까지 수월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중간에 수혁이라는 태화 의료원 의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내용이 나왔을 때 잠시 술렁거림이 있었으나, 양은 그 또한 부드럽게 넘겼다.

“싱가포르에서는 Talaromyces marneffei가 토착병이라는 인식이 강해 도리어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 비해 한국에서는 기회감염을 주로 일으키는 진균이라 아무래도 더 도움이 되었던 거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수혁이 자신을 조금 낮춘 덕이었다.

그런다고 정말 수혁이 아무것도 아닌 의사라고 생각하게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하여간 수혁이 이쪽을 올려 주는 시늉이라도 해 준 덕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는 질문이 있었는데 이 또한 수혁이 안경에 달린 캠으로 현장을 다 보고 있던 덕에 더 자연스럽게 대처할 수 있었다.

‘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은 말없이 감탄하고 있었다.

발표만 봐도 훌륭했다.

질문이 나와서 버벅거리면, 그때는 자신이 일어나 대신 답해 줄 생각을 하게 되었을 지경이었다.

실제로 대기 중이던 인턴을 불러다가 마이크도 건네받은 참이었다.

하지만 마이크를 쓸 일이 없었다.

그저 민망스레 손에 쥐고 있을 뿐이었다.

‘질문에 답하는 건 더 어려운데…… 게다가 질문 난이도가 이런데도 막힘이 없어?’

어떻게 폐암과 진균 감염으로 인한 종괴를 구분했냐부터 해서 암 종류 중에 어떤 게 더 진균 감염을 잘 동반하냐, 이유는 뭐냐, 그럼 이제 치료는 어찌할 거야 등등.

레지던트 수준에서는 답변하기 곤란한 질문만 쏟아지고 있었다.

아마 질문하는 사람들도 닥터 양을 엿 먹이려고 저러는 건 아닐 터였다.

태화 의료원과는 달리 싱가포르 대학병원의 증례 토의의 분위기는 모탈리티 컨퍼런스, 즉 사람이 죽거나 잘못된 경우만 제외하면 꽤 훈훈하기에 그랬다.

그저 장이 답하라는 뜻일 텐데, 그걸 양이 제 선에서 다 처리하고 있었다.

‘음……. 치료를 그런 식으로 계획한다? 괜찮은데. 음.’

심지어 어떤 답은 자신보다도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 의학이라는 건 일정 부분 과학이기도 하지만 또 일정 부분 통계이기도 하기에 제아무리 경험이 쌓이고 공부를 많이 해도 결론이 무 자르듯 나지는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다학제니 뭐니 하는 논의 체계를 만들어 놓은 것인데, 양의 답변은 장의 고민을 한 큐에 해결해 주는 느낌이 있었다.

‘쟤가 이렇게까지 똑똑했던가?’

너무 우수하게 잘하고 있다 보니 사람에 대한 평가마저 바뀔 지경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좌장 자리에 앉은 사람도 그랬다.

‘흐음……. 양이라고?’

다른 교수들도 그랬다.

‘양…… 이름 기억해 둬야겠는데.’

그렇게 인상적인 발표를 마친 양은 당연하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대부분은 축하하거나 칭찬하러 왔지만 어떤 이는 의심을 품고 다가왔다.

제법 날카로운 질문을 사석에서 날렸다는 얘기.

하지만 아직 양은 수혁과 이어져 있는 상태인지라 그 어떤 질문에도 거침없이 답할 수 있었다.

‘허……. 이거 봐라.’

덕분에 의심을 품고 다가왔던 이들조차 돌아갈 때는 감탄만 해 댔다.

“근데, 닥터 장.”

일부는 장에게도 갔다.

이들은 양보다 이수혁이라는 의사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참이었다.

발표를 듣기 전에도 까다로운 케이스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발표를 듣고 나니 진단이 진짜 더럽게 어려웠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걸 몇 번 통화하더니 맞혔다고?

한국에서는 기회감염원으로 Talaromyces marneffei가 많다는 말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했다.

기건 이수혁이라는 사람이 괴물이라야 가능한 일이었다.

“네.”

“이수혁이라는 사람이 정말 그렇게 결정적으로 도움이 됐어요?”

“네.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 사람 없었으면 환자 아마 죽었을 겁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완치는 꿈도 못 꾸겠죠.”

“허……. 어찌…….”

“혹시 모르겠는 환자 있으면 원격으로 물어보세요. 아직 그쪽도 정규 시스템이 아니라 돈도 안 들고 뭐……. 원하면 기록도 안 남겨도 됩니다.”

“그래요?”

몇몇은 솔깃한 얼굴이 되었다.

그냥 일방적인 도움만 준다는데 안 써먹으면 바보가 아닌가 싶었다.

[양, 장에게 가 봐요. 뭔가 흥미로운 대화 중입니다.]

[네? 엿들으라고요?]

[아뇨. 양은 그냥 서 있어요. 듣는 건 제가 합니다.]

[어…… 그게 더…….]

[이렇게까지 도와줬는데 프락치 노릇도 못 해요?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아, 그건……그건 그렇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건 안 되지 않나.

수혁은 양에게 은인이었으니 뭘 시키건 일단은 따라야만 했다.

해서 양은 슬그머니 장에게 다가갔다.

당연히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 닥터 양. 오늘 발표 정말 잘했어!”

“그러니까 말야. 나는 이렇게 똑똑한 친구가 우리 병원에 있는 줄은 몰랐네.”

칭찬만 이어졌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하지만 은인이 시키는 일은 해야만 했다.

“하여간…… 모르는 거 있으면 연락해 봐요. 그쪽은 환영이라니까.”

“그래요? 사람이 착하네.”

“그렇다니까요.”

“흐음……. 알겠습니다. 어려운 환자 있으면 연락하죠.”

“그래요, 고려해 봐요. 나도 종종 그러려고.”

“네. 장 교수님도 그러는데 제가 뭐라고, 하하.”

해서 묵묵히 서 있었는데, 그사이 대화가 이루어졌다.

수혁은 물론이거니와 현종도 듣고 싶어 했던 내용이었다.

“잘했다, 수혁아.”

“된 거 같죠?”

“어, 됐지. 이제 싱가포르도 우리가 접수하게 생겼다.”

“접수…….”

“전화 오면 나도 같이 봐줄 테니까…… 너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열심히 보자고. 국제 진료소 생기면 그쪽에서 걸러 줄 거야.”

“네,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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