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3화 아선의 고뇌 (2)
“응? 웬일이야? 왜 집에는 안 와?”
우창윤은 머리가 다 빠져 없어질 거 같은 고민 끝에 전화를 걸었으나, 딸인 우하윤은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일찌감치 집에 들어와서 머리도 감고 발톱 깎으면서 BTS 노래를 듣고 있으니 천국이 이곳이구나 싶었다.
심지어 엄마랑 배달 음식까지 시켜 놓은 터라 가슴이 다 두근거릴 지경이었다.
“으음.”
그 밝은 분위기를 감지한 우창윤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아빠는 지금 태화 의료원 때문에 머리가 빠질 지경인데.
‘헐, 진짜 빠졌네. 안 돼…….’
우창윤은 잠시 손가락 사이로 비죽 튀어나온 소중한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이제 집에 가려고, 딸도 집이야?”
“어? 어. 오늘 좋았어. 빨리 일 끝나 가지고. 안대훈 선배도 잘해.”
“그래? 그래, 잘됐네. 음……. 그래, 가서 얘기하자.”
“올 거야?”
“그…….”
어쩐지 오지 말라는 투로 들리기도 해서 많이 섭섭했다.
우창윤은 간신히 내가 갈아 치운 똥 기저귀가 몇 갠데 라는 말을 집어삼킨 후 말을 이었다.
“왜? 뭐 하니?”
“아니, 더 시키려고. 안 오는 줄 알았지. 요새 맨날 또 늦잖아.”
“아……. 아아. 그래? 어디.”
“삼촌이 좋아하는 집이야. 60계.”
“아, 거기. 거기 기깔 나지. 알았어, 더 시켜, 바로 갈게.”
다행히 딸이 자기를 꺼리는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가면 치킨을 바로 뜯을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진 우창윤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환자에 대한 자료를 한 아름 들고서였다.
‘이거…… 이거 부탁하면 해 주려나?’
물론 확신이 들지는 않았다.
이현종보다는 이수혁이 나을 거 같기는 했다.
딸에게 전해 듣기로는 무슨 성자가 따로 없지 않던가.
슬프게도 딸은 이미 팬클럽 부회장인지 나발인지가 되어서 객관적인 시선을 잃은 지 오래인 모양이지만, 그래도 아예 없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닐 거라고 굳게 믿었다.
육아를 완벽하게 해냈다고는 말하기 어려워도 그래도 죽을 똥 싸면서 노력하지 않았나.
다른 녀석도 아니고 친구 녀석에게 너 열심히 한다고 인정받았으니 자부심을 느껴도 좋았다.
‘그래, 내가 딸을 허투루 키우지 않았지.’
해서 우창윤은 멈췄던 손을 다시 놀려 나머지 서류를 챙기곤 차에 탔다.
그리곤 곧장 태화 의료원 바로 앞에 위있는 집으로 향했다.
빵.
그렇게 집으로 가고 있는데 누가 경적을 울렸다.
어떤 놈인가 하고 고개를 돌렸더니, 웬 지프차가 서 있었다.
빨간색 지프차였는데, 다름 아닌 랭글러 루비콘이었다.
‘뭐여. 나 잘못한 거 없는데?’
안에 탄 사람이 누군지는 뵈지도 않았다.
하지만 차만 봐도 약간 두려움이 솟을 만한 외양인 데다가, 명백히 자기밖에 없는데 경적을 울리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자신을 점검했다.
위잉.
그때 창문이 내려갔다.
안에 탄 사람은 의외로 여자였다.
정장을 입은, 머리가 하얀.
“이기자 교수님?”
“아니, 나는 누를 이유가 없는데 옆에서 누르라고 해서.”
이기자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는 좌석 등받이에 최대한 몸을 붙였다.
그렇게 난 공간으로 이현종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여, 우창윤.”
손을 흔들면서였는데 어찌 된 게 이 사람은 무슨 표정을 짓건, 또 무슨 말을 하건 사람 기분 잡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아서 우창윤은 후 하고는 입을 열었다.
마음에 안 든다고 마냥 씹기엔 이현종이 너무 윗사람이었다.
“아, 네. 원장님.”
“센터장이야, 센터장. 통합진료센터장.”
“네에.”
그렇다고 고분고분하기는 싫어서 말끝을 흐렸다.
윗사람한테 딸랑이 흔들어서 기조실장이 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마냥 웃어넘기기 어려웠을 만큼이나 윗사람들에게 잘하는 우창윤으로서는 이게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그런 것을 알 리도 없고, 알았다 해도 딱히 고마워할 사람도 아닌 이현종은 그저 하고팠던 말을 이었다.
“전에 한번 우리 도움받았잖아. 이제 허심탄회하게 털어놔 봐. 어려운 환자 있으면 보내라고.”
“하아.”
그렇지 않아도 고민하고 있던 우창윤에게는 꽤 타격이 있었다.
‘이수혁 선생한테…… 신신당부해야지.’
하지만 중간에 태클이 있었다고 도움 요청하기로 했던 것을 철회하기엔 케이스가 너무 어려웠다.
‘이현종 귀에만 안 들어가게…… 제발…….’
해서 우창윤은 따로 수혁을 만나 부탁할 생각을 하면서 이현종을 바라보았다.
병원에서 훈련된 포커페이스 덕에, 또 어둑한 조명 덕에 침착하기 그지없어 보일 따름이었다.
“제가 그럴 일이 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할까요, 하하.”
게다가 최근 기조실장을 하면서 단련된 정치 감각 또한 한몫하고 있었다.
‘테레비에서 본 거 같은 얼굴을 하고 있네, 정치인이야 뭐야.’
다만 이현종도 날카로운 사람 아닌가.
우창윤의 얼굴을 보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뻔한 여유로움을 가장하고 있는데, 그 뒤에 뭔가 더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하여간 놀리던 와중이라 이거나 마무리하자는 생각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 그래. 능력 벗어나는 환자 있으면 사고 치지 말라고!”
“아유. 저치도 이제 50인데 고만해. 너는 곧 고희야, 고희.”
“어? 그럴까? 그래, 알았어. 하하.”
아마 이기자가 말리지 않았다면 더 했을 터였다.
우창윤에게는 이현종이 이기자에게 완전히 쥐여살고 있는 게 다행인 셈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늦은 시간에 병원 뒷골목 후미진 차도에서 계속 붙들려 있었을 테니까.
“그럼 가십쇼, 센터장님.”
“그래그래.”
우창윤은 눈인사로 이기자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 후, 부리나케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다.
정말 태화 가까운 것만 보고 들어간 단지여서 그런가 단지 자체는 좋은데 정이 안 들었다.
게다가 이렇게 이현종까지 마주치다 보니 더더욱 화가 뻗쳤다.
‘하윤이 전문의 따면 바로 이사하자…….’
해서 우창윤은 결심을 단단히 한 후 집으로 향했다.
“아빠 왔다.”
“오, 마침 음식도 왔는데. 빨리 와.”
“오……. 어쩐지 엘리베이터 안에 냄새가 뱄더라.”
그리곤 딸이 시켜 둔 치킨을 죄 뜯은 후, 타이밍을 엿보았다.
원래 같았으면 피곤해서 먹고 바로 눕거나, 잡일이나 했을 하윤인데 이번 파트가 진짜 잘 풀렸는지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천운이었다.
“저기, 딸.”
해서 우창윤은 슬그머니 옆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둘이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하윤은 딱히 자리를 피하거나 하지 않았다.
“왜?”
다만 수상하게 볼 따름이었다.
우창윤이 이런 은근한 말투를 쓸 때는 다 꿍꿍이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 이수혁 교수하고 친하지?”
“응? 친하지. 근데 아빠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는 절대 아냐. 이수혁 교수님은 의학이랑 결혼했대.”
“어?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
우창윤은 영 엉뚱하게 알아먹는 하윤 때문에 잠시 당황했다.
‘근데 의학이랑 결혼했다고?’
그러면서도 궁금증이 일긴 했다.
이상한 말을 들어서였다.
“그런 얘기가 아냐?”
“어, 근데 의학이랑 결혼했다는 건 또 뭔 소리야.”
“아……. 이현종 교수님이 그랬어. 수혁이는 의학이랑 결혼했으니까 딴마음 먹지 말라고. 나야 뭐 딴마음 먹은 적도 없는데, 딴마음 먹었던 애들은 단념했지.”
“그래……?”
정확히 그 같은 말을 본인이 하지 않았나?
그래 놓고 아까 보니까 이기자 교수랑 같이 있던데.
‘그러고 보니까 이기자 교수님이 돌싱 아닌가……?’
태화 사람이었으면 벌써 알았을 텐데, 아무래도 아선에 있다 보니까 제아무리 우창윤이라 해도 모든 걸 알지는 못했다.
염탐하라고 섭외한 친구들이 몇 있기는 하지만 걔들이 왜 전 원장의 열애설을 알려 주겠는가.
“하여간 그 얘기가 아냐.”
“그럼 뭔데.”
“통합진료…… 센터 얘기야.”
“응? 환자 보내려고?”
하윤은 우창윤의 말을 듣다가 반색했다.
우창윤으로서는 배신감이 사무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지금은 태화에 몸담고 있다고 해도 자신은 아빠지 않은가.
한데 고개 숙이고 들어간단 말에 이렇게나 좋아할 줄이야.
“그…… 어.”
하지만 일단 숙이긴 해야 해서 그렇다고 했다.
그러자 하윤은 더더욱 좋아했다.
“오, 잘됐다. 그래, 어려운 환자 볼 때마다 아빠 머리가 빠지더라. 통합진료센터가 진즉 있었으면 지금보다 훨씬 숱도 많았을걸.”
“음.”
우창윤이 이게 딸의 디스인가 걱정인가 헷갈려 하는 사이 하윤이 말을 이었다.
“하여간 뭔데? 무슨 환잔데?”
어쩐지 너무 신나 보여서 더 말하기가 싫어졌지만, 그 순간 하필이면 환자 얼굴이 생각났다.
‘그래……. 참자.’
그 환자는 살려야 하지 않겠나.
본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볼 때마다 고쳐 줘야겠다는 생각이 물밀 듯이 밀려오게 하는 그런 환자였다.
“내분비 환잔데……. 어려워.”
“어렵겠지. 아빠가 그래도 천잰데 모르겠다며.”
“그래도는 왜 붙여?”
“대놓고 천재라고 하기엔 조금.”
“후.”
“이거 그럼 이수혁 선생님한테 말씀드려?”
하윤은 우 교수가 한숨을 푹 하고 쉬는 사이,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서류를 챙겼다.
우창윤은 그런 하윤의 손을 붙잡았다.
“어어. 이렇게 바로 하지는 말고.”
“응?”
“비밀…… 비밀로 해야 해.”
“비밀? 왜?”
“이현종 교수님이 알면 또 뭐라고 하겠어. 내가 전에 말했지? 지나가는데 갑자기 비웃고 갔다고.”
“아.”
“오늘도 그러더라. 근데 정식으로 부탁해 봐라……. 아빠 체면 좀 살려 줘.”
“음…….”
우하윤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태화의 영원한 기인 이현종을 떠올렸다.
‘그 교수님이면…….’
아마 우창윤이 대머리가 될 때까지 놀려 먹을 터였다.
같은 편이거나, 인정받은 사람이 되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제자라도 되면 우산이 되어 주는 사람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밉상도 그런 밉상이 없지 않던가.
태화 사람이지만 그래도 아빠를 좋아하는 딸로서 그건 좀 곤란했다.
“알았어.”
“역시 우리 딸.”
“근데 어떻게 비밀로 해? 이수혁 교수님은 낮에 늘 이현종 교수님이나 아니면 신현태, 조태진 교수님이 붙어 있어. 아니면 우리 교단 사람들. 아니, 팬클럽 사람들이 있고.”
“교단?”
“말이 헛나왔어. 넘어가.”
“어…….”
교단이라는 말이 헛나올 만큼 자주 쓰는 단어던가?
우창윤은 마음이 좀 걸렸지만 그렇다고 거기게 집중하기엔 환자 문제가 훨씬 시급했다.
“그럼 어쩌냐?”
“음……. 이건 어때?”
“뭐가 어떄.”
“집으로 부르자. 여기는 안 따라올 거 아냐. 이 시간이면 뭐…….”
“아, 이수혁 교수를 우리집에?”
우창윤은 상당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말하는 투로 봐서는 딸이 이수혁에게 이성적인 감정이 있는 거 같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외간 남자를 들여?
그것도 이현종의 아들을?
“어. 여차하면 병원 가야 할 수도 있잖아.”
“음…….”
하지만 다른 수가 없을 거 같긴 했다.
해서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알았어. 몰래 오라고 해. 차 있지?”
“차 있지. 그럼 지금 전화 드릴게.”
“근데 시간 늦었는데……. 올 수 있나?”
“병원이실걸. 별로 저녁엔 따로 할 일이 없으신 거 같아.”
“아, 그래.”
우창윤은 안됐다는 말을 애써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