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4화 아선의 고뇌 (3)
“교수님.”
우하윤은 아빠와의 짤막한 대화를 끝마치고는 곧장 수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상대로 수혁은 할 일을 마치고 논문을 뒤적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공부를 위한 논문은 아니었다.
이제 교수도 됐겠다, 레지던트들 논문 낼 것도 도와줘야 하지 않겠는가.
원래 이런 신규 교수에게 교신 저자를 부탁하는 일은 드문데, 수혁은 예외였다.
아이디어가 샘솟을 뿐만 아니라, 한번 쓰기로 해서 초안만 작성해서 오면 뚝딱 고쳐 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 하윤아. 웬일?”
딱히 아주 집중해서 할 만한 일은 아니어서, 수혁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하윤은 주변 소음을 통해 이 양반이 역시나 연구실에 있다는 걸 꺠닫고는 잠시 애도했다.
‘의학과 결혼하신 분…….’
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란 말인가.
최근에 또 마냥 안타까워할 만한 일도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이러다 60 넘어서 이현종처럼 운명적인 사랑을 하면 될 일 아닌가.
“다름이 아니라 저희 아버지가 뵙자고 해서요.”
“어……?”
하윤의 말에 수혁만 당황한 게 아니었다.
옆에 있던 우창윤은 소파에서 뛰어오고 있었다.
“야, 야! 그렇게 말하면 오해하지!”
“왜? 보자고 한 거 맞잖아?”
“아니, 야……. 하윤아.”
수혁은 당황했다가 배경음처럼 깔린 우창윤의 외침을 듣고 있었다.
‘뭐여?’
[예전 같았으면 김칫국 사발로 마셨을 만한 말인데 미동도 없군요?]
‘이상하게 요새는 그래. 쓸데없는 망상이 없어졌어. 완전히 포기했나.’
[그렇게 말하니까 저까지 안타까워지는데…….]
별생각이 들진 않았다.
방금 말한 대로 수혁은 이제 어떤 깨달음을 얻은 참이었다.
물론 현자 타임이라는 게 다들 그렇듯 시간이 지나면 또 달라지긴 하겠지만.
하여간 지금은 이런저런 일들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데다가, 그 일들이 다 잘되고 있다 보니 연애할 만한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이 교수.”
우창윤은 수혁의 상태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부리나케 전화를 바꿨다.
그 또한 수혁이라면 사윗감으로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기는 했지만, 지금이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하윤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랑 만나야 하지 않겠나.
오해 때문에 이수혁이랑 잘되는 건 아닌 거 같았다.
‘아닌가? 이수혁 정도면…… 애가 착한 거 같고 하여간 눈물 나게 할 일은…… 아니지. 아니야. 피가 어디 가나. 이현종 아들인데.’
수혁은 우창윤의 초조한 목소리를 들으며 입을 열었다.
우창윤과는 대조적으로 침착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네, 우 교수님.”
“어……. 놀랬지. 그게 그런 뜻이 아닌데.”
“아뇨, 뭐 괜찮습니다. 어쩐 일로 뵙자고 하신 건지요?”
그러다 보니 오히려 우창윤은 더 놀랐다.
‘아선과는 뭐 피의 전쟁을 한다 이건가. 아예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는 거야, 뭐야.’
오해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정말로 오해를 전혀 하지 않으니까 섭섭한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하여간 복잡한 심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제아무리 팔불출이라지만 미친 짓은 참아야 했다.
‘나는 이현종이 아니다……. 나는 이현종이 아니다…….’
다행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마냥 상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회상이 가능해서였다.
이현종이 팔불출 짓을 하는 게 남들 눈에 어떻게 보였나.
‘어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 그게 말야.”
물론 그런다고 입이 쉬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면 우창윤이 암만 젊은 나이에 기조실장을 달았다고 해도 나이가 50은 넘지 않았나.
그에 비해 수혁은 초임 교수였다.
그것도 이례적으로 군대도 안 갔다 오고, 펠로우도 안 한 새파랗게 어린 교수.
급이 다르다 이 말인데, 그런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심지어 같은 병원도 아니고, 라이벌 병원 사람이었다.
“네, 듣고 있습니다. 교수님.”
“내가…… 내가 요새 환자 하나가 고민이라서 말이야.”
“아, 환자 얘기군요?”
하지만 수혁이 환자 얘기라고 하자마자 화색이 도는 것을 보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하긴 얘가 어려운 환자 보는 걸 진짜 좋아한다고 했지.’
의사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냥 미친놈이었다.
물론 맨날 똑같은 환자만 보는 것보다는 당연히 고민거리가 있는 환자를 보는 게 더 의미 있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골 때리게 어려운 케이스는 늘 부담이었다.
수학 문제 같은 게 아니지 않은가.
의사의 실패는 곧 환자의 죽음이나 불행한 예후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어어. 환자 얘기야. 그래서 좀…… 집으로 와 줄 수 있나 해서. 내가 가는 건 좀 그렇고.”
“네, 뭐. 이사하셨죠? 병원 앞으로.”
“어, 주소가…….”
하지만 수혁이 이러니까 든든했다.
아선에서 이런저런 루트를 통해 입수한 수혁의 능력은 정말이지 대단하지 않던가.
과를 불문하고 탁월하다 못해 완벽에 가까운 진단 능력을 보이고 있었다.
흔쾌히 와 준다고 하자마자 체증이 좀 가시는 느낌까지 들었다.
‘아닌가. 방금 콜라 마셔서 그런가.’
우창윤은 내분비내과 의사로서 매일같이 환자에게 먹지 말라고 하는 음식 두 가지, 그러니까 치킨과 콜라를 잔뜩 먹어 놓고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베란다를 서성였다.
그런다고 무슨 대단한 칼로리가 소모되는 건 아닐 테지만.
그래도 먹고 나서 바로 쉬는 것보다는 10분 정도 걷는 게 당뇨 예방에 좋다는 보고가 쏟아지고 있지 않은가.
‘나는 훌륭한 의사다……. 나는 훌륭한 의사다…….’
우창윤이 자기 암시를 끝없이 걸고 있는 동안 수혁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
국내 세단 중에서는 제일 좋은 차라 그런가, 걸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부우웅.
우하윤의 집은 병원에서 걸어서 10분도 채 안 걸리는 곳에 있어서 차 타고는 정말이지 금방이었다.
해서 전화 끊고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수혁은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오, 어서 와요. 어서 와.”
다른 때 같았으면 너 같은 놈이 왜 우리 집에 오냐고 문전박대했을 텐데, 지금은 부탁할 게 있어서 그런가 우창윤은 아주 반갑게 수혁을 맞이해 주었다.
수혁은 그런 우창윤을 따라 집 안에 들어가면서 연신 두리번거렸다.
촌놈 같은 모양새였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님이 디자이너라고 하더니만…….’
[이쪽으로는 이현종, 이기자 커플 가구 골라 주려고 쌓아 뒀던 게 다인데 확실히 몇 수 위군요.]
‘그러니까. 소품 하나하나가 장난 아닌데?’
집 안 인테리어가 그야말로 인상적이어서였다.
이걸 꾸며 놓은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려 했으나 그건 실패로 돌아갔다.
파자마 차림으로 맥주를 홀짝이고 있다가 안방으로 피신한 탓이었다.
딱히 아쉽거나 하진 않았다.
환자를 보러 온 거지, 인맥 쌓으러 온 건 아니었으니까.
“자, 여기……. 이 환자인데 말야.”
우창윤 또한 급하면 잡설은 집어치우는 성미다 보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서재에 미리 준비해 둔 서류와 파일을 보여 주었다는 얘기.
“음.”
수혁은 금세 빠져들었다.
우창윤이 어려워할 정도의 케이스라면 일종의 보증 수표라 해도 좋지 않겠나.
이현종이야 어떻게든 우창윤을 깎아내리려 애쓰겠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우창윤 정도면 일류라 할 수 있었다.
“환자가 젊은데 골절 경험이 꽤 있네요?”
“어? 어어. 아무래도 이건 다발성 섬유성 골병변 때문인 거 같아. 여기 엑스레이를 보면…….”
“그렇네요, 꽤 여러 곳에서 이상이 보여요.”
정확히 말하면 대퇴부나 골반골, 상완골 등에서 골피질이 눈에 띄게 얇아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동시에 골경화성 변화와 다발성 낭종 등의 섬유성 골이형성증의 소견이 보였다.
이건 꽤 심각한 질환이었다.
‘선천성 이상인데…….’
[주소는 배꼽 주위의 통증과 잦은 배변입니다.]
‘그럼 다발성 섬유성 골이형성증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거겠지.’
[선천성 증후군의 일종이겠군요.]
바루다의 말대로 선천성 증후군의 일종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수혁은 굳이 그런 말까지 입에 담지는 않았다.
우창윤이 설마하니 이것도 모르겠는가.
“그리고 피부가 아주 축축해. 물어보니까 심장도 좀 두근댄다고 하고, 그래서 초음파 보니까…….”
“갑상선이 커져 있네요?”
“응. 아직 검사가 안 나오긴 했는데, 아마 기능 항진증이 있겠지.”
“흐음…….”
심장이 두근대는 증세, 즉 심계항진을 일으킬 정도의 감상선 기능 항진이라면 꽤 심각한 상황이라고 보면 되었다.
거기에 다발성 섬유성 골이형성증까지 있어?
드물겠지만, 알려진 증후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환자 혹시 성조숙증은 없었나요?”
“응? 아……. 맥큔-올브라이트 증후군을 의심하는 거야?”
“아, 네.”
“으음.”
우창윤은 역시 꽤 대단한 사람이었다.
이 대화를 토대로 바로 수혁이 어떤 질환을 생각하는지 떠올리다니.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질환의 정의를 벗어나는 특성이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말하는 투를 보아하니 꽤 회의적이었다.
우창윤은 말없이 마우스를 투닥거리더니 곧 사진 하나를 보여 주었다.
환자 사진이었는데, 상의를 탈의하고 찍은 사진이었다.
“아…….”
“얼룩 반점이 없어. 성조숙증도…… 음. 정의하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있었다고 해도 애매한 정도야. 키가 작은 편이긴 한데, 부모님도 작더라고.”
“그렇군요. 흠.”
맥큔-올브라이트 증후군은 인구 10만 명당 하나 발생할까 말까 한 아주 드문 질환이었다.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다발성 섬유성 골이형성이고 또 다른 하나가 바로 담갈색 색소 침착이었다.
가장 중요한 정의 두 가지 중 하나가 없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맥큔 올브라이트 증후군일 가능성은 크게 떨어졌다.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외의 특성은 상당히 가까워요.]
‘응, 애초에 맥큔 올브라이트 증후군은 원인도 잘 모르잖아? 그럼 색소 침착이 없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창윤과는 달리 수혁과 바루다는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맥큔 올브라이트 증후군과 같이 지나치다 싶게 드문 병들조차 완전히 숙지하고 있어서였다.
특히 임상과 의사들이 무시하기에 십상인 분자 또는 DNA 수준의 원인도 알고 있었다.
해서 수혁은 아직 이 질환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만 있을 뿐이라는 걸 떠올렸다.
‘Gs 알파 단백질 유전자 돌연변이가 제일 유력한데……. 이게 있을 때 반드시 색소 침착이 생기는가 여부도 알아봐야겠네.’
[이따 하죠. 지금은 환자 파악이 우선입니다. 하여간 색소 침착이 없는 이상 가능성은 떨어졌어요.]
‘응, 그렇지.’
수혁은 생각을 정리한 채, 우창윤이 가리키고 있는 자료를 들여다보았다.
짧은 시간 동안 수혁이 어떻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우창윤으로서는 조금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역시나 환자에 대한 걱정이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모르면…….’
또 하나는 괜히 수혁에게 치부를 드러냈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이 친구가 괜찮은 친구긴 한데……. 이현종한테 가서 말하면…… 나는 환자도 못 고치고 무능한 사람 되는 거 아냐?’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