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505화 (505/1,303)

505화 아선의 고뇌 (4)

우창윤의 등이 축축하게 젖어 가는 동안 수혁은 환자 자료를 쭉 훑었다.

애초에 수혁에게 보여 주기 위해 긁어 와서 그런가, 전에 몰래 봤을 때보다 훨씬 자료가 방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완벽하지는 않았다.

‘사진만으로는 판단이 어려워. 뭔가…… 성장 호르몬에도 이상이 있었을 거 같은데 말야.’

[네,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만, 사진만으로는 저도 분석이 완전하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으실 거면 좀 잘 찍지. 의료 사진 촬영팀 있지 않나?’

[있기는 할 텐데, 태화도 주로 수술방에서나 찍지 않습니까? 논문 용도가 아닌 이상 제대로 찍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일단 사진의 질이 개판이었다.

아무리 봐도 우창윤이 그냥 핸드폰 가지고 찍은 거 같은데, 그러다 보니 상태가 별로였다.

“음……. 이렇게만 봐서는 환자가 골이형성증이 있고, 갑상선 기능항진증이 있다는 것 정도만 확인이 가능한데요? 사진에서 보면 일부 성장 호르몬 이상도 있었던 거 같기는 한데……. 이것도 명확하지는 않아요.”

“아, 그럼 진단이 어렵나?”

“이것만 가지고는 그렇죠.”

“그럼?”

“지금 환자를 보러 갈 수 있을까요?”

수혁은 시계를 돌아보았다.

이제 9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꽤 늦은 시간이긴 한데, 그렇다고 환자 보러 가면 안 되는 시간도 아니긴 했다.

대학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라면 더더욱 그랬다.

24시간 잠들지 않는 곳이지 않은가.

당장 우창윤만 해도 기조실장임에도 불구하고 환자 안 좋아지면 새벽에도 불려 나갔다.

“음…….”

다만 우창윤이 고민하게 된 것은, 아무리 그래도 다른 병원 사람을 자기 병원으로 부르는 게 온당한가에 대한 회의가 들어서였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뭐 이런 종류라고 보면 되었다.

“아빠. 불러 놓고 이게 뭐야. 같이 가.”

“어, 어? 그럴까?”

하지만 딸의 말을 듣고 보니 또 생각이 달라졌다.

기왕 불렀으면 끝을 봐야 하지 않겠나.

아무리 봐도 혼자서는 해결이 불가했다.

그렇다고 아선에 어디 비빌 구석이 있나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내분비 쪽으로 궁금한 게 있으면 다 우창윤한테 오는데, 그가 대체 누구에게 물어야 한단 말인가.

“그래, 그럼 가지. 음……. 어차피 주차증도 그렇고 차는 내 차 타고 가죠.”

“네. 그게 좋겠네요.”

“나도 갈래.”

“너도?”

우창윤은 눈을 빛내고 있는 딸을 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다른 병원 사람을 둘이나 데려가는 게 맞나 싶었다.

이번엔 수혁이 구원 투수로 나섰다.

“어려운 케이스니……. 진단 과정을 보는 게 도움이 될 겁니다. 제가 못 맞힐 수도 있지만, 그래도 추론 과정 자체는 완벽할 테니까요.”

“아.”

논리가 좀 재수 없기는 한데, 그럴 거 같긴 하지 않은가.

아직 대외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진 않지만, 아는 사람은 수혁의 우수함을 다 알았다.

최근 1, 2년간 진단 실적으로는 수혁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터였다.

이게 이현종처럼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수혁은 아직 의사로서 전성기라고 할 만한 나이에 접어들지도 않지 않았나.

괜히 앞으로 10년, 어쩌면 20년은 태화의 시대가 올 거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란 얘기였다.

“그, 그래. 그럼 같이 가지.”

해서 우창윤은 재수 없음을 애써 뒤로하고 셋이 함께 가기로 했다.

“오, 차가 좋네요.”

“응? 아, 이거. 좋지. 이 교수는 뭐 모는데?”

“저는 제네시스요.”

“오……. g70?”

“아뇨. g90.”

“젊은 사람 몰기엔 너무 크지 않아? 그거 살 생각은 어찌했대?”

“아……. 제가 산 건 아니고요. 받았어요.”

“아……. 아빠?”

“아뇨, 다른 사람이요. 말씀해도 모르실 겁니다, 하하.”

차에 오르고 난 후에도 짧은 대화가 이어졌다.

‘병원에서 사 줬나? 하긴 태화에서 공들여야지.’

아무리 프락치를 동원한다 해도 어찌 수혁이 두바이에서 쌓은 인맥까지 파악하겠는가.

기업 차원에서 뒷조사를 했다면야 얘기가 좀 달랐겠지만, 기조실장으로서는 이게 한계였다.

‘새끼들……. 이현종 교수님 나가시면 어떻게 꼬셔 볼라고 했더니 기초 공사를 아주 탄탄히 하네.’

우창윤이 오해로 인한 한숨을 푹 하고 쉬면서 단지를 빠져나가 병원 앞을 지날 때쯤, 안대훈은 교단 사람들을 이끌고 잠시 뭐라도 주워 먹으러 병원 뒷골목에 있는 먹자골목으로 가고 있었다.

수혁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공부를 하고 난 참이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꽤 빠른 속도로 지나친 차 안에 탄 수혁을 알아볼 수 없었을 상황이라 이건데, 안대훈은 괜히 수제자를 자처하는 게 아니었다.

“어?”

“왜 그러세요, 형?”

보통 학교 선후배끼리는 친해지면 형 동생을 하다가도 레지던트가 되면 칼같이 선생님 소리를 붙이는데, 안대훈이 교단 사람들끼리는 다 형제라고 하는 바람에 호칭이 바뀌어 있었다.

수혁이나 이현종에게 안대훈은 열심이지만 어딘가 나사 빠진 놈일 뿐이지만.

레지던트들 사이에서 안대훈은 죽을힘을 다해 공부하고 있는 동시에, 무려 수혁에게 허물없이 다가갈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교주님을 본 거 같은데.”

“교주님이요? 이 시간에? 아, 퇴근하시나.”

“아냐, 아냐. 하윤이네 차 타고 계시던데.”

“네에?”

그런 안대훈이 하는 말은 다 무게가 있었다.

지금 같이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나 누구도 그럴 리가 있냐는 말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게다가 병원이라는 곳이 원래가 심심한 곳이다 보니 루머에 취약하지 않던가.

다들 눈이 초롱초롱한 것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너무 힘이 드니 빨리 먹고 자자는 말이나 하던 사람들 같지가 않았다.

“따라붙을까요?”

그중 하나가 마침 신호에 걸린 흰색 아우디 차량과 다가오는 빈 택시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쩐다? 부회장이 감히 교주님을 유혹했을 리는 없는데……. 그렇다고 믿음이 부족한 평신도들을 데려갔다가 괜한 소문이라도 나면…….’

안대훈은 찰나에 여러 생각을 했다.

몇몇 충심이 깊은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자신과 비교하면 다 가짜였다.

안대훈은 정말이지 수혁이 원장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되는 날까지 그만 따를 생각이지 않는가.

심지어 수혁이 의학과 결혼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자신도 수절하리라 마음먹었을 지경이었다.

우하윤조차 수혁이랑 선배 수절하는 게 뭔 상관이냐고 했으나 그냥 마음이 그랬다.

“내가 대표로 다녀올게. 너네는 내일 회진 준비해야지.”

“아, 네.”

다행히 안대훈의 조직 장악력은 수준급이었다.

원래 넉살이 좋은 것도 있거니와 수혁의 위세까지 빌려올 수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현재 안대훈은 3년 차이면서 동시에 의국장.

아래 연차들은 같은 교단이 아니라 해도 도저히 안대훈의 말을 거절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저 차 따라가 주세요.”

“어, 손님?”

“어, 기사님?”

“저 새끼도 돈 안 갚았어요?”

“어……. 네.”

“개새끼네. 빌린 돈은 안 갚고 외제 차를 몰아?”

타고 보니 전에 그 택시 기사였다.

운전 실력이 꽤 뛰어났다는 기억이 있었는데, 착각은 아니었다.

게다가 나름 사명감도 있어서 그런지 어렵지 않게 차를 따라붙었다.

“다 왔네.”

우창윤이야 누군가에게 미행당해 본 일이 있지도 않고, 앞으로도 그러리란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별 의심도 없이 차를 세웠다.

수혁도 하윤도 마찬가지였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안대훈만이 첩보 요원이 된 기분이었다.

‘우창윤? 저 인간이 여기서 왜 나와?’

그는 택시 기사의 파이팅을 받은 채 차 뒤에 숨어 셋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봐도 묘한 조합이다 보니,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하윤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혈육의 정이란 게 또 만만치 않지 않은가.

‘설마…… 하윤이랑 저 양반 둘이 짜고 교주님을 아선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수혁은 태화의 미래이자 등불이니까.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룹 차원에서도 밀어주고 있었고.

‘아, 그게 아니라……. 우창윤 교수가 또 모르는 게 생겼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해 보니 더 그럴싸한 가설이 떠올랐다.

이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두 번째이지 않은가.

하윤의 보고에 따르면 수혁이 도움 준 후로 환자가 살았다고 했다.

우창윤이 어디 이상한 사람도 아니고, 그래도 제대로 된 의대 교수라면 그 일을 반드시 기억했을 터.

모르는 환자가 또 생겼다면 수혁을 부를 수도 있었다.

다른 이에게 비밀로 하고 몰래 데려온 것도 이해가 갔다.

‘옳지. 우리 교주님이 어떤 사람인데…… 태화를 배신할 리가 없지.’

덕분에 안대훈은 다소 편해진 마음으로 뒤를 밟았다.

수혁 일행은 전혀 뒤를 경계하지 않아서 깨나 쉬웠다.

아니, 아예 서두르고 있어서 뒤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병실은 어디죠?”

“여기. 같이 들어갈까?”

“네, 그게 좋죠.”

“소개는…… 음, 동료 교수라고 해도 될까? 근데 이 교수 TV에 나오는 사람이라…….”

“마스크 끼고 들어가면 누군지 모를 겁니다. 그렇게 해 주시죠.”

“아, 그렇지. 그런 방법이 있었어.”

우창윤은 역시 수혁은 이현종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스크를 씌워 주었다.

여사님이 병동에서 나온 물품을 밖으로 내보내려 문을 연 사이 안대훈이 슥 하고 들어왔으나, 누구도 그가 누군지 알아보진 못했다.

잠깐 병원 앞에 나오는 참이라 가운을 옆구리에 끼고 있던 게 주효했다.

외모부터 나는 의사요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안대훈이 딱 그래서 더했다.

“환자분, 우창윤입니다. 늦은 시간인데 죄송합니다.”

“네? 아뇨, 아뇨. 저는…….”

우창윤은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수혁을 가리켰다.

“동료 교수인데, 이런 질환 쪽으로 경험이 많아서요. 한번…… 진료를 같이 보시면 어떨까 해서요.”

“저는 좋죠. 아유, 감사합니다.”

누구라도 늦은 시간에 교수가 와서 다시 보겠다고 하면 좋아하지 않겠는가.

성의의 문제였다.

수혁은 환자의 밝은 미소를 보면서 앞으로 살짝 나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이낙준 교수라고 합니다.”

가명을 쓰면서였는데, 말해 놓고 보니 아차 싶었다.

너무 특이한 이름이다 보니 괜히 기억에 남을 거 같아서였다.

우창윤도 머리를 짚었으나, 지나간 일 아닌가.

해서 수혁은 그저 환자를 살폈다.

‘목이 돌출되어 있어. 이건 갑상선이야. 하루 이틀 된 게 아냐.’

[우측 상악부 부위가 돌출되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코가 휘었습니다.]

‘안구 돌출은? 내가 볼 땐 없어 보여.’

[정상 범위입니다. 손발도 그렇고요.]

‘성장 호르몬이 과다 분비되긴 했지만……. 기간이 짧거나 정도가 약하다는 건가?’

[그렇게 판단할 수 있겠습니다.]

벌써 사진만으로 봤을 땐 몰랐던 정보를 어느 정도 확인한 참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좀 부족했다.

이제부터는 대화도 나눠야 했다.

필요하다면 더 관찰도 해야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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