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506화 (506/1,303)

506화 아선의 고뇌 (5)

결심이 선 수혁은 환자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환자야 어차피 침대에 누워 있었기에 바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환자분.”

그렇게 환자 코앞에 선 수혁은 진중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애초에 수혁의 연기력이 퍽 훌륭한 데다가 바루다의 도움까지 있어서 그런가,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목소리였다.

“아, 네.”

원래도 협조적이던 환자이지 않은가.

아무래도 아선 또는 의사라는 직종 자체에 신뢰도가 있는 모양인데, 수혁이 이렇게 나오자 마음이 확 열렸다.

어떻게 아는고 하니, 바루다의 분석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라포 형성이 참 쉽네요. 다 이런 식이면 좋을 텐데.]

‘그래도 나 정도면 첫인상에서 호감 꽤 얻는 편일걸.’

[그건…… 그렇긴 하죠.]

이상하게 이성에게는 그리 어필을 하지 못하는데, 환자들에게는 기깔 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단한 친화력을 뽐내고 있었다.

바루다도 연애 쪽에 대해서는 이제 어느 정도 측은한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별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환자나 보기로 했다.

이럴 때 놀리면 효과가 좋겠지만 숙주를 너무 괴롭혀서 또 뭐 하겠는가.

적당히 자극만 줘서 매너리즘에만 안 빠지면 될 일이었다.

[우선 골절에 대해서 묻죠. 지금 증상도 증상이지만……. 증후군과 연관된 증상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응, 증후군의 핵심이 될 만한 증상부터 물어야겠지.’

배꼽 주변이 아프고 배변이 잦다.

이것도 물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증상이기는 하겠으나, 생사에 영향을 미칠 만한 증상은 아니지 않은가.

그에 비해 골절은 아주 주요한 증상이었다.

수혁은 저도 모르게 환자의 다소 뒤틀린 하지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딱히 연기가 필요 없는 상황이라, 자연스레 안타깝다는 표정 또한 보일 수 있었다.

“이건 언제 부러진 거죠?”

“아……. 이거요? 열 살인가?”

“열 살. 음.”

열 살이면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또 잦은 골절을 동반할 수 있는 질환에서는 꽤 늦은 거라고 할 수 있었다.

골형성부전증이라는 병은 태어나면서부터 골절을 동반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뼈가 충분히 단단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질환은 당연히 어릴 때일수록 골절이 동반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무슨 소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어린 시절을 반추해 보면 될 일이다.

걸음마를 배우는 시점에서는 걸음이 서툴러서, 또 더 큰 다음에는 부주의해서 자주 넘어지지 않았나.

“그 전에는 어땠어요? 괜찮았나요?”

“그…… 너무 어릴 때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요.”

“괜찮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말씀해 주세요.”

괜찮다는 말도 빈말은 아니었다.

정말 그랬다.

기억이 없다는 것 또한 유추의 근거가 되니까.

인간의 기억이란 묘한 면이 있어서 즐거운 기억은 금세 잊히지만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오래도록 남지 않던가.

괜히 아이가 아프면 빨리 어른이 된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니었다.

인간의 성장이라는 것이 결국 기억의 축적이기에 그랬다.

“그냥……. 그즈음에 다리가 아팠어요. 전에는 괜찮았던 거 같아요. 1학년 때는 나름 고무줄놀이도 하고 그랬거든요.”

“흠, 그랬군요.”

대화를 하면서 수혁은 쉼 없이 바루다와도 떠들었다.

예전엔 바루다와 얘기를 하려면 무조건 허공을 봐야 했으나 이제는 익숙해진 지 오래 아닌가.

동시에 이런 식의 대화가 가능했다.

‘어릴 때는 괜찮다가 동통부터 온 모양인데?’

[열 살에 골절이라면…….]

‘하씨, 이러면 안 되는데. 너무 꽂혔나?’

[인간이야 습관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겠지만 저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맥큔 올브라이트 증후군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군요.]

‘그래?’

[네, 심지어 골절마저도 특징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습니까?]

바루다의 말대로 맥큔 올브라이트 증후군에서 골절은 그리 이른 나이에 찾아오지 않았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정상이다가 열 살쯤 되어서 첫 골절을 겪는 게 보통이었다.

골절 자체만 놓고 보면 아주 전형적인 질병 경과란 얘기였다.

뒤를 돌아보니 우창윤 또한 묘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아마 이 정도의 문진은 했을 테니 처음 들은 정보는 아닐 터였다.

다만 당시의 황당함을 다시금 복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씨……. 맥큔이 아니면 대체 뭐냐고.’

증후군 형식의 병들이 이게 문제였다.

다운 증후군처럼 유전자 변이가 아예 명확한 증후군은 얘기가 다른데,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러이러한 특징을 갖는 질환을 이제부터 이런 증후군으로 부르자고 한 경우엔 이게 맞는지 틀리는지 긴가민가해지는 경우가 생겼다.

“음, 그럼…… 다른 질문을 해 볼게요. 괜찮아요? 시간이 좀 늦었는데.”

수혁은 시계를 돌아보고는 물었다.

벌써 열 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정상적인 몸 상태인 사람이라면 별문제 없는 시간이지만 이 환자는 어떻게 봐도 정상은 아니었다.

애초에 아픈 데다가, 지금 얼굴에도 피로함이 쓰여 있을 지경이었다.

“아……. 괜찮아요. 병만 나을 수 있으면요.”

“네, 음.”

해서 물었더니 환자가 상당히 부담을 주는 방향으로 답을 해 왔다.

약간 아차 싶은 상황이었으나, 어찌 되었건 치료는 해 줄 생각이지 않는가.

조금이라도 엮인 이상 우창윤이 말을 바꾸건 말건 어떻게든 계속 볼 생각이었다.

여차하면 하윤에게 시켜서 카드 훔치라고 할 생각도 있었다.

“그래요. 이건 좀 애매할 수 있는 질문인데…….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네.”

“혹시 성조숙증이라는 진단명을 들어 보신 적이 있나요?”

“아……. 여기 와서요.”

“여기 와서? 그 전에는 전혀 없어요?”

“네.”

아, 이러면 나가린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색소 침착뿐 아니라 성조숙증 또한 맥큔 올브라이트의 주요 증상 중 하나여서였다.

하지만 희망을 완전히 버리진 않았다.

환자는 서른이 넘은 상태.

옛날엔 성조숙증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더랬다.

의학계에서야 차츰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때긴 했으나, 일반인들 사이에서의 인식은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럼 혹시 유두의 돌출이 언제쯤 있었는지 기억하시나요?”

“어. 음.”

유두 돌출이라는 단어는 생소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민망하기까지 한 단어이지 않은가.

환자랑 수혁은 나이 차도 별로 나지 않는 상태라 환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영영 다물어지지는 않았다.

뭐가 되었건 진단을 위해서이지 않은가.

수혁의 표정만 봐도 그런 건 알 수 있었다.

꽤 절실해 보였다.

“정확하지는 않은데…… 특별히 빠르진 않았어요.”

“골절과 비교하면요?”

“아, 그거보단 느려요.”

“음……. 초경은요?”

“그것도 뭐……. 친구들 한다고 할 때쯤이었어요. 반에서 줄 세우면 빠른 편이었지만, 특별히 뭐 제일 빠른 건 아니었어요.”

“그렇군요.”

하긴 키가 작은 건 유전적인 영향일 거라고 우창윤도 얘기를 하지 않았던가.

저 양반이 괜히 맥큔 올브라이트를 배제한 게 아니라는 뜻도 되었다.

제일 중요한 증상 두 개가 없지 않나.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러게요. 대체 뭘까요?]

‘네가 그러면 어떡하냐.’

[질병 데이터베이스에 없으면 저도 별 뾰족한 수는 없죠.]

‘이 대화 토대로 가능성 있는 질환 추려도 그래?’

[네, 도저히 나오는 게 없어요.]

그 결과 수혁 또한 아까 우창윤이 연구실에서 고뇌하다가 지었던 표정이 되고야 말았다.

‘아, 나가린데?’

우창윤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이나 명확한 얼굴이었다.

하윤도 당황할 지경이었다.

‘교주님?’

이랬던 적이 아예 없는 건 아니긴 했다.

수혁이라고 해서 역사적으로 처음 발견되는 질환마저 알아볼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이토록 모르겠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는 건 또 오랜만이었다.

“교수님?”

환자 또한 급격히 변해 버린 수혁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등장했을 땐 구세주 같은 느낌을 주더니만 지금은 쭈구리가 되지 않았나.

자기 질환이 뭔지 몰라서 이러는 거 같기는 한데, 하도 반응이 뚜렷하다 보니 웃음이 나올 거 같았다.

“어, 아니. 음. 제가 잠깐 자료를 정리하고 오죠. 뭔가…… 실마리가 있습니다. 아예 모르겠는 건 아니에요.”

그만큼 수혁이 당황했다는 얘긴데, 하는 말을 들어도 알 수 있을 지경이었다.

[방금 모르겠다는 말을 돌려서 말한 거 같은데, 하나도 안 돌아간 거 같습니다.]

바루다도 그런 수혁 때문에 놀랐다.

이 자식이 다른 건 몰라도, 둘러대는 건 처음부터 잘했는데 왜 갑자기 이런단 말인가.

‘이, 일단 가자. 와……. 내가 요새 너무 자만했나. 진짜 모르겠으니까 너무 당황스럽네?’

[우창윤이 모르겠다고 들고 온 건데 어려운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저 사람이 내는 논문만 봐도…… 만만치 않잖아요?]

‘그렇지. 근데 내가 아빠 때문에 우창윤 교수님을 알로 봤나 봐.’

[음……. 핑계라고 하기엔 거의 세뇌를 하긴 했죠.]

바루다는 잠시 이현종을 떠올렸다.

천재라는 말이 실로 아깝지 않은 사람인 동시에 정말 이상한 인간이었다.

호오가 명확하다고 해야 할까?

하여간 적이라고 규정되면 까는 데 인색함이 없었다.

한때 이기자 교수 덕에 다른 사람이 되는가 싶은 시절도 있었으나, 60 넘어 살아온 사람이 갑자기 변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 옆에 있다 보면 태화 말고 다른 병원들, 그러니까 칠성이나 아선은 근본 없는 상것들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때? 전혀 모르겠어?”

그렇게 쫓기듯 방에서 나온 수혁에게 우창윤이 달라붙었다.

표정만 봐도 대강 예상은 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못한 탓이었다.

다행인 것은 그 잠깐 사이에 바루다가 어느 정도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아니, 상황을 정리했다는 건 좀 너무 거창하고 해야 할 일을 하나 정해 주었다.

“아뇨, 말했듯……. 실마리가 하나 있습니다.”

“실마리가 있어? 어떤?”

“교수님은 이 환자 진단명 중 가장 가능성 있어 보이는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아니, 그런 게 없는데…….”

“그나마 가까운 거.”

“그건 맥큔이지.”

우창윤은 결정적인 거 두 개가 소거된 맥큔을 떠올렸다.

다른 질환은 가능성이 아예 없기에 배제했고, 맥큔은 두 가지 주요 증상이 없어서 배제했다.

그걸 떠올리고 보니 다시 한숨이 튀어나왔다.

“저도 맥큔이 떠올라요.”

“아니, 그건 아니라니까.”

“원인 불명의 증후군이잖아요? 형태가 어떻게 나타날지는 모르는 거죠.”

“그…… 아니, 그래도 너무 주요 증상이…….”

“일단 이 질환의 이유로 가장 최근에 의심되는 게 뭔지는 아시죠?”

“응? 모르는데?”

수혁이야 당연하다는 듯 물었지만, 아는 게 당연한 건 또 아니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임상 의사들에게 분자 또는 DNA 단계의 이상은 그리 중요치가 않아서였다.

하지만 진단 과정에서는 필수적인 경우도 많았다.

“Gs 알파 단백질 유전자 돌연변이가 아마도 범인일 거란 얘기가 있어요.”

“G 뭐? 다시 말해줘.”

“Gs 알파 단백질.”

“음……. 그래서?”

“여기에 이상이 생겼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형질을 역으로 보면 이게 정말 맥큔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죠. 어쩌면 맥큔의 원인이 이거일 거라고 단언하게 될 수도 있고요.”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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