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508화 (508/1,303)

508화 아선의 고뇌 (7)

“아……. 그럼…… 저 낫는 거예요?”

“낫는다기보다는…… 이게 유전자 레벨에서의 질환이거든요. 어느 정도 보완이 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소마토스타틴 유사체를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어느 정도 호전이 있으실 거예요.”

“아…….”

수혁은 그 외에도 이 치료가 평생 가야 한다는 것, 그러나 치료를 하게 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되리라는 것을 천천히 시간을 들여 설명해 주었다.

이 정도의 설명은 사실 우창윤에게 맡겨도 되었겠지만, 갑자기 자리를 바꿔 주기가 애매해서 그냥 그대로 밀고 나갔다.

“그렇구나. 이해했어요.”

어설프게 아는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설명이 너무 어려웠을 텐데, 수혁은 맥큔 올브라이트고 뭐고 하여간 거의 모든 질환에 대해 줄줄이 꿰고 있는 사람 아닌가.

생략할 건 과감히 생략하고, 비유로 들어야 할 것은 또 적절히 들어서 환자를 잘 이해시켰다.

덕분에 환자는 웃는 낯으로 둘을 배웅할 수 있었다.

밖에 있던 우하윤 또한 웃으며 둘을 맞이했다.

“어떄, 아빠? 부르길 잘했지?”

“어? 어……. 확실히 이수혁 교수는…… 진짜 대단하다.”

“하하, 저야 뭐. 희귀한 케이스를 잘 진단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수혁 또한 방금 막 업적을 세운 참이라 기분이 좋아 웃었다.

‘이 친구…… 어떻게 하면 꼬실 수 있지?’

웃을 수 없는 건 오직 하나 우창윤뿐이었다.

눈앞에서 괴물을 본 참 아닌가.

아마 연배가 비슷했다면 섭외할 생각보다는 어떻게 하면 밟을 수 있나를 떠올렸을 수도 있었다.

싸가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보는 눈이 그것밖에 안 돼서였다.

하지만 이젠 기조실장이 된 참 아닌가.

심지어 차기 원장이었다.

태화와의 간격을 좁혀 가고 있다가 다시 벌어지고 있다 보니 아선에서도 젊은 원장단을 출범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받아서였다.

‘아니 근데…… 너무 잘해 주잖아, 태화에서.’

기업 규모로 따지면 아무래도 아선이 태화에 비하면 좀 처지는 게 사실이었다.

아선은 건설과 자동차 등으로 큰 기업인 데 반해 태화는 건설도 잘하긴 하지만 반도체로 세계를 석권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기업에서 저렇게까지 잘해 주고 있으면 방법이 없었다.

“어이, 우창윤. 음흉하게 웃는 거 스탑.”

그래도 좀 고민은 해 볼 수 있으니,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는데 누군가 그를 불렀다.

‘또 잠들었나? 나 혹시 기면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순간 이현종이 여기 있다는 걸 대체 어떻게 예상할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우창윤은 일단 현실 부정부터 했다.

“야, 뭐 해? 내가 그래도 선밴데. 인사도 안 하냐?”

하지만 이어지는 말까지 듣고 나서부터는 도저히 씹을 수가 없었다.

상상 속에서라도 이현종을 정식으로 선배 대우할 거 같지는 않아서였다.

“어……?”

해서 고개를 돌려 보니 진짜 이현종이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민망해하고 있는 신현태와 함께였다.

뒤에는 안대훈이 있었는데,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아니, 아까 잠깐 본 얼굴이었다.

“너, 넌 누구야. 프락치야?”

“아니, 태화 앤데?”

“태화 놈이 왜 여길…….”

“태화 놈? 이놈이 선 넘네?”

“여기가 아선인데 와 있는 게 이상하잖아요.”

“수혁이도 왔잖아. 하윤이도 왔고.”

혹시 아선 놈인데 이현종한테 붙었나 해서 물었더니만 태화라지 않은가.

화를 내려는데 이현종이 끼어들었다.

특유의 그 열 받게 하는 화법을 구사해 가면서였다.

“이 교수님은…… 제가 요청한 거고…… 하윤이는 제 딸이잖습니까.”

“둘이 어디 납치되는 줄 알고 왔대. 기특하지. 칭찬해 줘.”

“그게 대체 무슨…….”

우창윤은 이현종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그 말을 해 봐야 또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응수할 텐데 뭐 하러 심력을 소모한단 말인가.

물론 입을 다문다고 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안 따라오는 건 아니었다.

이현종은 자기가 하려고 마음먹었던 얘기는 무조건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인 데다가 상대가 아선의 주력이라면 딱히 선을 지키지 않는 인간이기도 해서였다.

“하여간 우리 우 교수. 수혁이의 위력을 두 번이나 맛봤네?”

“네? 아니……. 부른 건 이번이 처음…….”

“전에 왔을 때도 도움받았잖아.”

“그건 도둑 진료였잖아요!”

“그래서 환자 어떻게 됐는데.”

“음.”

우창윤은 눈알을 굴렸다.

거짓말을 할까도 싶었다.

하지만 이럴 때 이현종은 꽤 날카로운 편이었다.

아마 오늘도 이렇게 지체 없이 달려온 건, 아까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자신을 봤을 때 느낀 그 어색함 때문일 터였다.

“살았죠…….”

거짓말 대신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나을 것이었다.

아마 이런저런 루트로 프락치 아닌 프락치를 많이 심어 놨을 테니까.

“그렇지? 이 환자는 어때?”

“이 환자는…….”

“이 환자도 진단했지? 내가 수혁이 하루 이틀 보나. 이 표정 짓고 있으면 100%지.”

“음……. 그야, 그건 그렇죠.”

“그래, 아니라고 하면 이거 보여 주려고 했어.”

이현종은 그렇게 말하면서 영상을 보여 주었다.

아니라고 한 게 아닌데 왜 보여 주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현종이 너무 코앞에 화면을 들이밀었기 때문에 우창윤은 속절없이 영상을 바라보았다.

딱 병동 돌아가는 쪽 기둥에 숨어서 찍은 영상이었다.

처음엔 수혁이 키보드 두드리는 장면이었다가 곧 자신에게 설명하는 장면이 나왔다.

꽤 먼 거리에서 찍은 거 같은데 희한하게 음성이 다 들어가 있었다.

“아니, 이거 어디 거예요? 뭐가 이렇게 감도가 좋아? 쓸데없이.”

녹음이 안 되었으면 하는 것까지 다 들어가 있었다.

이현종은 그런 우창윤을 보며 껄껄 웃었다.

“태화지. 우리 기술 모르냐? 아선은 못 만들지?”

“저는 의산데 그거랑 뭔 상관이에요.”

“의산데 진단 못 해서 불렀잖아.”

“와……. 이렇게…… 와…….”

우창윤은 잠깐 사이에 머리숱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체 신현태는 어떻게 이런 놈하고 친하게 지내는 건가 싶었다.

슬프게도 아직 이현종은 본론도 안 꺼낸 참이었다.

그는 갑자기, 정말로 갑작스럽게 진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야, 무섭게.’

태화 의료원 전직 원장이자 현 통합진료센터장 그리고 단둘뿐인 석좌교수에 어울리는 얼굴이랄까?

원래 이런 얼굴로 다니는 사람이면 모르겠는데, 그런 사람이 아니면서 이러니까 공포심이 깃들었다.

무언가 꿍꿍이속이 무조건 있을 거 같았다.

그리고 있었다.

“기조실장 우창윤. 내가 센터장으로서 제안할 게 있는데. 공증인으로는…… 태화 의료원 원장님하고 우리 부센터장 그리고 그쪽 딸내미까지 셋이면 충분하겠지.”

목소리까지 싹 바뀐 참이었다.

우창윤은 너무도 불안했다.

갑자기 공식적인 직함을 부르니까 꼭 그 직함이 사라질 거 같아서였다.

상대가 제아무리 미친 수준의 기인이라 해도 그건 어려울 거라는 거 정도는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무슨 얘기를 하시려고요?”

“해가 될 만한 얘기는 아냐. 거래야, 거래.”

“교수님이 거래 얘기하니까 너무 불안한데요…….”

우창윤은 저도 모르게 옆에 선 이들을 돌아보았다.

하윤이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딸이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고 있었고, 수혁과 신현태는 불안해하는 얼굴로 이현종을 보고 있었다.

이상하게 안대훈이라는 애는 이 와중에도 수혁만 보고 있었는데 우창윤으로서는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양자택일이야. MOU 아니면 이 영상 퍼뜨리기.”

“네?”

이어진 이현종의 말에 신현태와 수혁 모두 끼어들었다.

“형 이게 무슨 거래야.”

“아빠, 이건 협박이에요…….”

물론 별 소용은 없었다.

“거래지. 두 개 중 뭘 골라도 우리는 무조건 협진을 제공할 건데? 세계 최고의 진료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거야.”

“환자를 보내는 건데 그게 어떻게 공짜야.”

“공짜지. 죽을 환자 살려 주잖아. 그게 어디 값으로 따질 수 있어?”

“아니, 그래도. 이 사람은 기조실장인데…….”

신현태는 원장이 되기 전까지는 소위 원장단이 받는 압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맨날 보던 원장이 이현종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막상 되고 보니 이게 장난이 아니었다.

일개 의학자로 지내던 시절과는 달랐다.

병원의 경영에 관여하는 일은 쉽지도 않았을뿐더러 부담이 너무 컸다.

“넌 누구 편을 드냐, 지금?”

“기조실장이니까 이렇게 막 하면 곤란하다 이거지. 사람 너무 낭떠러지로 몰면 안 돼.”

“내가 깡패니. 사람을 밀게.”

“지금 밀고 있는데.”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 봐야지. 내 말 안 끝났어.”

“형 말은 끝까지 들으면 더 슬퍼지는데.”

“이 새끼가.”

이현종은 신현태를 툭 하고 치고는 다시 우창윤을 바라보았다.

그세 늙어 버린 듯한 우창윤은 이현종을 멍한 얼굴로 마주했다.

‘와 씨……. 이거 받으면 병원 공식적으로 MOU라고?’

안 될 일인데, 그렇다고 안 받으면 만천하에 부탁한 게 까발려지게 생기지 않았나.

두근두근하고 있으려는데, 이현종이 말을 이었다.

“우 교수. 내가 막 그냥 하라는 게 아냐. 하게 되면…… 당근도 주지. 나도 원장 해 봤어. 입장 알지.”

“아, 네.”

고개는 끄덕였으나 신뢰가 가진 않았다.

상대가 이현종이어서 그랬는데, 우창윤이나 신현태 그리고 수혁조차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이현종은 수혁을 아들로 삼은 이후로 놀라운 모습을 꾸준히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아들의 이익과 관련된 일에서는 정상인 아니라 뛰어난 정산인 모습도 보일 수 있었다.

“일단 환자를 보내게 되면 그 환자 풀로 인해 쓰게 되는 모든 논문은 공동 저자가 될 거야. 보낸 교수들 누구도 예외 없이.”

“아……. 그런 조건이 있으면 저도 할 말이 있겠는데요?”

“그리고 공식적으로 우리 센터에서도 해결이 안 되면 아선에 보낼 수 있다는 문장도 넣자고.”

“실제론 안 보낼 거잖아요?”

“당연하지. 미쳤어? 돌팔이들인데.”

“그…….”

“아, 이건 오프 더 레코드야.”

보통 이럴 때는 실언이었다고 하거나 농담이었다고 하지 않나.

오프 더 레코드라는 말은 공개적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사실인 것을 숨길 때 쓰는 말 아닌가.

여러 가지 말들이 우창윤의 머릿속을 헤집었으나 애써 참았다.

“그중에서 우 교수는 좀 나아.”

그런 우창윤을 보며 이현종은 칭찬이랍시고 이딴 소리를 한 후, 말을 이었다.

“하여간…… 또 하나 말해 줄 게 있어. 이건 좀 아깝긴 한데…… 수혁이랑도 여러 번 말했던 거야.”

“뭔데요?”

“어지간하면 태화에서 채우려고 했는데, 우리 센터가 보통 어려운 센터가 아니거든.”

“으응……?”

“태화 인력으로만 채울 수가 없어. 경쟁인데, 한두 명 말고는 싹수가 노래. 그래서 말인데, 아선에서도 받아 줄게. 와서 2년 배우고 돌아가서 써먹어도 돼.”

“어…….”

얼핏 들어서는 엄청난 기회 같은데, 좀 헷갈리는 상황이었다.

뭔가 윗사람이 말해 주는 느낌 아닌가?

이현종은 혼란에 빠진 우창윤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는 으하하 웃으며 수혁과 함께 병동을 빠져나갔다.

“고민 좀 해 보라고.”

안 그래도 고민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 말을 남기고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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