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9화 우선 아선 (1)
「태화 의료원 통합진료센터, 아선 병원과 진료 협력 체계 구축.」
우창윤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면피할 거리가 있는 선택지와 뒤에서 개망신당하는 선택지이지 않은가.
게다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이현종과 태화가 뒤에 있는 이상에는 후자를 선택할 경우 개망신도 당하고 결국 통합진료센터로 환자를 보내게 될 거 같았다.
“여, 우 교수.”
이현종은 과거를 떠올리느라 얼굴이 엉망이 된 우창윤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우창윤 교수님.”
옆에는 어두운 녹빛 정장에 노란 시곗줄로 포인트를 준 수혁이 서 있었다.
둘 다 우창윤과는 상반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더럽게 환하게 웃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런 개 같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우창윤으로서는 바로 얼마 전 있었던 회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창윤 교수님. 갑자기 웬 통합진료센터와 협력 체계를 구축합니까?”
우창윤이 비록 이사회의 지지를 받아 최연소 기조실장이 되었긴 했으나, 그와 똑같은 이유로 적도 많지 않던가.
특히 전임 원장단 라인에 섰던 이들에게서는 미움을 받았다.
갑자기 이사회에서 젊은 원장단이니 뭐니 하면서 순서를 심하게 건너뛴 탓이었다.
두고 보자 하고 있던 차에 너무 잘해서 더 화가 났는데 마침 실수를 저지르려는 찰나 아닌가.
옳다구나 싶었다.
“인정해야 할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현재 통합진료센터가 환자들 사이에서 연일 화제예요. 특히 지방 중소 병원들은 태화 의료원 통합진료센터와 협력 체계가 있냐 없냐로 환자 수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사실 공격이 들어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내내 우창윤을 비롯한 현직 원장단이 태화 타도를 외쳐 왔는데 이제 와서 협력을 하겠다고 하니 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그 누구보다도 반발심이 큰 건 그 얘기를 꺼낸 우창윤이었다.
‘내가 진짜…… 아오.’
사람들이 이래서 회귀물을 찾는구나 싶었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수혁에게 요청하지 않았을 것을 이라는 후회가 가슴 속을 메워 나갔다.
‘아니, 근데 그랬으면 환자 진단 못 했을 거 같긴 한데…….’
하지만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 없는 일 아닌가.
게다가 잘 생각해 보면 반드시 후회할 만한 일만 있는 것도 아니긴 했다.
어찌 되었건 덕분에 환자를 살렸다.
아니, 평생 가지고 가야 하는 질환이니만큼 벌써 그런 말을 하는 건 좀 성급해 보이고, 환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켰다고나 할까?
하여간 큰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이 논문은 발로 써도 NEJM이야.’
맥큔 올브라이트 증후군이 비록 드문 질환이기는 하지만, 그 질환의 발생 기전을 정확하게 밝히는 논문이 지금 쓰이고 있었다.
모든 가설을 세우고 증명한 것은 수혁이지만 운 좋게 환자를 먼저 발견한 것은 우창윤이라 공동 1저자로 낑겨 들어갔다.
물론 실험실에서 해당 단백질을 소거한 쥐를 디자인하고 또 이런저런 실험을 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최소 NEJM이라는 것.
그리고 앞으로 수혁과 함께하면 이런 논문이 더 나올 수도 있다는 것.
그렇다면 병원 대 병원이라는 라이벌 구도가 아닌, 같은 의학자로서 협력을 추구해 볼 수 있는 길도 충분히 있다는 것까지.
‘그래……. 이수혁 교수가 준 자료도 탄탄하잖아.’
해서 수혁은 적이 쥐여다 준 데이터를 곱씹었다.
그사이 공격에 나선 외과 측 교수가 입을 열었다.
전임 원장단의 후임자로 내정되어 있다가 날아간 사람이라 그런지 눈에 핏발이 선 상황이었다.
사실 기조실장이니 원장이니 해 봐야 지분 받는 것도 아니고 짧은 임기 끝나면 다시 평교수 되는 건데 뭐 하러 저러나 싶었다.
물론 지금 자리 양보하라 그러면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기는 했지만.
“그건 지방 병원 얘기잖아요? 우리는 아선입니다, 아선. 막말로 우리가 태화보다 못한 게 전통 말고 더 있어요? 최근에 나오는 논문의 양이나 질을 보면 엇비슷한 수준인데……. 굳이 그걸 협력할 이유가 있습니까? 이건 마치 숙이고 들어가는 느낌이잖아요?”
“숙이고 들어간다뇨? 협력인데요. 협력이라는 단어 뜻을 잘 모르시는 거 아닙니까?”
“뭐라고요? 지금 당신 뭐라고…… 너 몇 학번이야.”
“학번이 뭐가 중요합니까. 보직이 중요하지. 저는 기조실장으로서 우리 병원에 해가 될 만한 일은 단 하나도 한 일이 없습니다. 또 평교수일 때도 늘 아선 병원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선이야말로 제 고향이고 또 터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결정 또한 같은 맥락에서 내린 결정입니다.”
우창윤의 말에도 불구하고 외과 교수가 한동안 난리를 피웠으나 우창윤은 일부러 그쪽 말고 다른 쪽을 바라보았다.
역사와 전통이 짧은 만큼, 절대다수의 교수들이 지금 우창윤 연배이지 않은가.
지금 떠들고 있는 외과 교수만 해도 원래 다른 곳에서, 심지어 태화에서 교수하다가 넘어온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우창윤 연배의 교수들은 처음부터 커리어를 아선에서 쌓았다.
설득력은 이쪽에 있었다.
심지어 우창윤은 이미 몇몇 교수들을 포섭한 참이었다.
“몇 가지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이건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현재 우리 아선의 오진율이…… 태화보다 높습니다. 특히 외과 계열에서는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어, 너 뭐야.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원내 통계를 믿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아선 해상 팀이 구축한 데이터베이스입니다. 우리 아선의 기술력을 믿지 못하세요?”
“아니…….”
반발이 있었으나. 우창윤은 괜히 이 나이에 기조실장에 오른게 아니었다.
심지어 학회에서도 한자리해 먹고 있지 않나.
정치력이 의사들 중에서는 대단한 편이었다.
그래 봐야 이현종과 같이 상식이 잘 통하지 않는 괴적을 만나게 되면 별 소용이 없긴 하지만.
하여간 내부로 총질을 할 때는 여포였다.
“태화도 사실 아선과 비슷했습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그랬고, 재작년에는 더 높았던 적도 있어요. 그러던 곳이 올해 3월부터 확 변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그게 통합진료센터 때문이라는 건가요?”
“맞습니다. 적이지만 이런 건 칭찬해야죠. 아무래도 외과 계열에서 보고 있는 환자라고 해도……. 이유는 내과적일 수 있는데 현재 병원 협진 체계상 그걸 아주 잘 잡아내기는 어렵습니다. 이건 인정하시죠.”
“그야…… 내과에서 협진을 등한시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렇지.”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협진만을 위한 인원이 없는 건 맞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저 시스템을 도입하기엔 아직 데이터도 없고 그럴 만한 인력도 없어요. 협력 체계를 꾸리게 되면 우리가 보낸 환자들이 어떤 식으로 진료받고 있는지 들여다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럼 시스템을 배워 올 수 있죠. 그것도 공짜로.”
“음.”
젊은 교수들부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아직 열정이 더 많이 남아 있는 만큼, 새로운 일에 대한 두려움이 적어서였다.
게다가 통계 차이를 보니 이게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확연한 변화를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우리가 보낸 환자를 토대로 작성하는 논문은 우리가 공동 1저자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새 전문의 심사 기준 올라가면서…… 레지던트들 논문 챙겨 주기가 버거워지지 않았습니까? 공동 1저자면 큰 도움이 되겠죠. 거기 이수혁 교수가 논문 기계 아닙니까?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겁니다.”
“으음…….”
이번에는 노교수들 쪽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만 해도 의사는 그가 대학 병원에 있건 아니면 로컬에 있건 진료 보는 게 메인이었더랬다.
심지어 어떤 교수는 교수 되기까지 논문을 단 하나도 써 보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다 시대가 바뀌어서 교수는 논문을 쓰는 의사라는 패러다임이 정착했으니, 얼마나 힘겹겠는가.
아니, 힘겹기만 한 게 아니라 짜증을 내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의사고 환자를 봐야 하는 사람인데 왜 논문 따위로 나를 귀찮게 하나 하는 소리를 하면서였다.
한데 논문 압박이 어느 정도 해결돼?
이건 또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또 2년간 펠로우십도 보낼 수 있을 겁니다. 이건 뭐 아직 우리 내부에서도 협의가 더 되어야 할 사안인데…… 하여간 그 시스템을 빼 오는 데 도움이 되겠죠.”
우창윤이 제일 많이 고민했던 게 바로 이 사안이었다.
다른 두 사안은 사실 실보다 득이 많았다.
어떻게 보일까를 생각하면 자존심이 좀 상하긴 하지만 하여간 득이 되는 상황이지 않은가.
어려운 환자를 보내게 된다면 당장은 손해 보는 거 같아도, 사고 칠 만한 여지가 줄어들게 되니 오히려 병원 신뢰도는 더 상승할 수 있었다.
하지만 펠로우?
이건 좀 의문이었다.
‘완전 새로운 시스템을 애써 구축해 놓고…… 똑똑한 사람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사람을 불러? 라이벌 병원에서?’
그러다 아선이고 칠성이고 냉큼 따라 하면 어쩐단 말인가.
혹시 함정이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여기에 함정이 있을 거 같진 않았다.
아니, 함정이 있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펠로우십을 맺어요? 그게…… 음. 없는 시스템이니까 좋기는 한데.”
“아니, 이건 내과 내부에서 얘기를 해 봐야 합니다.”
“음, 그래요. 넘어가죠.”
괜한 말을 한 건가 싶겠지만, 제안에 호감을 더하기 위해 한 말이기도 했다.
예상대로 교수들은 절대 설득되지 않으리란 생각에 귀 막고 씩씩대는 전임 원장단 측 사람들 말고는 죄 넘어온 상황이었다.
해서 우창윤은 합의안을 들고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
“어……. 센터장님. 부센터장님.”
“장한 결심한 거야. 이걸로 운 나빠서 아선으로 먼저 간 환자들도 살 수 있게 됐어.”
“아니……. 지금 저만 온 것도 아닌데 그런 말씀 하다가 막판에 엎어집니다.”
“안 들리잖아.”
“저는 듣잖아요.”
“가서 말할 거야?”
“그건 아닙니다.”
“그럼 괜찮지, 뭐.”
“후.”
우창윤은 한숨을 쉬었지만, 태화와 아선에서 홍보를 위해 불러 놓은 기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급하게 웃었다.
이게 연예부 기자였으면 이때다 하고 셔터를 눌렀겠지만, 다 아는 사람들이었다.
홍보하러 와서 미친 짓 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자자, 웃어요. 웃어. 다른 사람들도 올라오라고 하고.”
“네. 대신 쓸데없는 말 하지 마세요.”
“이제부터는 안 할게.”
“네.”
해서 분위기 좋게 끝났다.
밖에서 보기엔 그저 흔하게 있는 진료 협력일 터였다.
하지만 태화 내부적으로는 그게 아니었다.
특히 태화 바이오를 이끄는 수장 김다현은 이를 심각하게 여겼다.
부정적인 쪽이 아니라, 긍정적인 쪽으로였다.
“아선이랑 맺은 거 더 대대적으로 보도해요. 뉘앙스 살짝 바꿔서.”
“네, 사장님.”
원래 김다현이 이런 쪽으로 능하지 않은가.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딱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통합진료센터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이 화제가 되고 있는데, 이렇게 주류 언론을 통해 터트리면 더 강한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이 뻔했다.
“칠성 쪽은…… 아예 반응이 없나?”
“네. 칠성은 의도적으로 아예 차단하고 있습니다.”
“전에 원내대표 어머님 건은 잘 됐잖아요?”
“그게…… 그거 이후로는 아예 원천 차단입니다.”
“칠성…… 진짜 더럽게 플레이하네.”
“어떻게 계기를 만들어 볼까요?”
“아니, 아냐. 그쪽은 만만치가 않아서……. 이미 분위기 좋은데 망칠 이유는 없지. 이현종, 이수혁 교수님하고 식사 자리나 만들어 봐요. 너무 잘해 주고 있는데 센터 발족인으로서 그 정도는 대접해야지.”
“네, 사장님. 그렇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