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화 우선 아선 (2)
이현종과 이수혁은 피 섞인 부자가 아님에도 여러 가지로 닮았는데, 그중에서도 먹을 거 좋아하는 게 가장 큰 공통점이라 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김다현 사장의 요구에 바로 응했다.
아니, 응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적극적이었다.
“네. 거기…… 거기가 좋겠는데요.”
“아……. 식당은 저희가 알아서 정하려고 했는데.”
“근데 예약이 안 되는 곳이다 보니까…….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가 보려고 해도 갈 수가 있어야죠.”
이현종은 비서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으며 수혁에게 윙크를 보냈다.
나만 믿으란 뜻이었는데, 예전 같았으면 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겠으나 이제는 그렇지가 않았다.
[파이팅, 이현종.]
일단 바루다부터가 응원을 보냈다.
수혁이라고 해서 다른 것도 아니었다.
‘제발!’
지금 이현종이 말한 초밥집은 매달 1일 예약이 열리는데,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마감이 되는 곳이었다.
시간을 따로 내기가 어려운 의사들로서는 예약부터가 어려운 셈인데 그럼에도 이현종은 통화에 성공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답은 죄송합니다였다.
이럴 수가 있나 싶어서 알아보니 단골 고객들에게는 하루 전날, 그러니까 매달 말일에 미리 예약을 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 단골만 찾으면 나 같은 신입은 어디 가서 단골이 되나!’
그때 이현종이 분노에 차서 이렇게 외쳤는데, 한 번이라도 맛보기 위해 기다렸던 이들 모두 이에 크게 공감했다.
“그게 저희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은데…….”
“아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김다현 사장님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나가는 사장님인데…….”
“그…….”
이떄다 싶어서 부탁했던 것인데 어쩐 일인지 비서 반응이 애매했다.
설마하니 식당 예약의 벽이 태화 바이오 사장도 넘지 못할 만큼 높은 것인가 싶은 순간, 옆에서 듣고 있던 김다현이 묘수를 냈다.
“미안하네. 내가 딱히 미식가가 아니라……. 근데 이기원 원내대표님은 미식가로 정평이 나 있지. 그쪽으로 부탁해 볼까?”
“네? 원내대표한테 식당 예약을 부탁하시게요?”
“내가 식사 대접한다고 했는데……. 원하는 식당에서 대접을 못 하면 체면이 말이 아니지. 이현종 센터장하고 이수혁 교수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아, 알겠습니다.”
해서 비서는 일단 이현종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기원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개 이런 거물급 의원들은 기업 측 인사의 전화를 꺼리는 법이라 신호음이 들려오는 동시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 한 소리 듣는 거 아냐?’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지금 이 자리에 김다현이 있다는 것이었다.
의리가 있기로 유명한 사람 아닌가.
능력이 없어도 충성심이 있으면, 그리 능력이 필요하지 않은 자리를 찾아서라도 보내 주는 사람이었다.
물론 능력이 있어야 중히 쓰이긴 하겠지만, 하여간 자기 때문에 고난을 겪은 사람을 두고 보는 사람은 아니라는 얘기.
“네, 이기원 의원실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 안녕하십니까. 태화 바이오 김다현 사장 비서 오다혜입니다.”
“네, 어쩐 일이시죠?”
비서는 잠시 김다현을 돌아보았다.
그리곤 김다현이 시킨 대로 읊었다.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사장님이 직접 통화 원하시는데 가능할까요?”
“아…….”
예상대로 이런 건 다 거절하는지 상대는 무척 저어했다.
하지만 비서는 이럴 때 또 싹싹 비비는 것에 익숙해진 지 오래라, 어떻게든 말로 구워삶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요. 여쭤보겠습니다. 근데 안 될 가능성이 큽니다.”
“네, 그…… 이현종, 이수혁 교수님 관련한 일이라고만 운을 띄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근데 누가 됐건…… 청탁은…… 아무튼, 잠시만 기다리세요.”
해서 이기원의 비서는 애매한 말을 남겼을지언정, 어찌 되었건 말을 전달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어……. 전화 주신다고 합니다.”
조금 당황스럽다는 말투였다.
다시 전화를 주는 경우가 거의 없는 모양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뭐가 되었건 1차 목적은 달성한 셈이라, 오다혜는 전화를 끊고 잠시 기다렸다.
그러자 5분이 채 지나기 전에 전화가 왔다.
김다현이 받았다.
“네, 대표님. 김다현입니다.”
“아……. 네, 김다현 사장님. 저희가 따로 뵌 적이 있던가요?”
“국정감사 때 잠깐 뵌 거 말고는 없습니다.”
“그렇군요. 역시. 제가 사람 만나면 잘 잊지 않는 편인데, 전혀 기억에 없어서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기원은 원대대표답게 서글서글한 말투로 포문을 열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근데 부탁할 것이 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대표님.”
“제가 원래…… 이런 청탁은 아예 안 듣습니다. 지역구민 민원이라면 모를까……. 특히 기업인들하고는 연락을 안 해요. 그건 알고 계시죠?”
“알고 있습니다. 기업 관련한 부탁은 전혀 아닙니다.”
김다현은 말을 이으면서, 언젠가 태화의 태스크 포스팀을 통해 들었던 이기원 원내대표의 성향을 떠올렸다.
‘진짜 미식가면서…… 음식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했지. 은원이 확실하고, 엉뚱한 부탁을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라고 했어.’
정치인이라고 해서 다 카리스마가 있고 리더형 인간인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참모형 인간이 있고 다 나뉘는 법인데, 이기원은 단연 리더형 인간이었다.
인간적인 매력이 넘쳐서 그것만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특징만 들어도 그럴 법하지 않은가.
거기에 능력까지 있으니, 괜히 차세대 대권 주자로 꼽히는 게 아니었다.
“이현종, 이수혁 교수님 부탁이라고 하셨죠? 그래서 그럴 거 같다는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두 분은 이런 말씀 드려도 되나 모르겠지만, 비즈니스 할 법한 사람들은 아니더군요.”
“네, 두 분은 그냥 의사입니다. 근데 부탁이 그런 쪽도 아니고……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혹시 스키 프렌즈 예약 가능하십니까?”
“?”
이기원은 잠시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잊지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비서가 덩달아 긴장했을 정도로 기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씨……. 아니래놓고 이상한 부탁 했구나.’
꽤 오래 모셔 왔는데, 그의 경험상 이런 얼굴은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어서였다.
초선 의원 때야 표정 숨기는 게 익숙지 않아 몇 번 본 거 같은데, 아마 노회한 지금에 이르러서는 누가 와서 싸대기라도 치지 않는 이상 이런 얼굴이 되진 않을 거 같았다.
“뭐라고요?”
“스시 프렌즈 단골이시라 들었습니다. 제가 이번에 이현종, 이수혁 교수님 도움을 받아서 식사 대접하려고 했더니……. 딱 여기를 가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그거…… 그거 태화 이름으로도 안 되나요?”
“제가 참 아쉽게 딱 스시 프렌즈만 못 가 봤습니다, 대표님.”
“어…….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럼 스시 맛을 모르는 건데.”
이제 비서가 더 이상한 얼굴이 되었다.
갑자기 스시?
“그러게나 말입니다. 특히 이수혁 교수가 정말 아쉬워하는데……. 제 힘으로는 예약이 안 돼서요.”
“음, 그건 안 되지. 먹고 싶으면 먹어야죠. 그 두 분이면 제가 신세 진 것도 있고……. 저한테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거기 셰프님이랑 호형호제하는 사이라…….”
“그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근데 같이 가도 됩니까? 얘기 들으니까 저도 좀…… 가고 싶어져서요.”
엉뚱한 부탁을 좋아한다 하더니만 역시 이 인간도 꽤 특이한 인간이었다.
‘이럴 거라고 했지. 역시…… 만만한 팀이 아냐.’
물론 김다현은 정보력을 통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기는 했다.
해서 그리 당황하지 않은 채 답을 할 수 있었다.
“저희야 좋죠.”
“식사비도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직업이 이렇다 보니, 받는 것보단 쓸 때 마음이 편해집니다.”
“아……. 이건 뭐 제가 내겠다고 하기는 좀 애매한 상황이군요.”
“네, 어차피 저희 어머님도 꼭 한번 대접하라고 하고 있어서요.”
그렇게 밥 한 끼 얻어먹으려던 이현종의 계획은 원내대표와의 식사로 이어지고야 말았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굉장히 부담스러워하거나 오히려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이현종이나 수혁이나 신경이 굵은 사람들 아닌가.
애초에 성격이 그렇기도 했거니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만한 실력을 지니고 있어서 더 그랬다.
“와……. 좋다.”
“그러니까요. 아빠 덕에 여길 다 와 보네요.”
해서 둘은 약속 시각보다 좀 일찍 와 놓고는 넋 놓고 식당 구경이나 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스시 프렌즈는 하이엔드급 초밥집을 표방하고 있는 만큼, 인테리어에도 신경을 많이 쓴 편이었다.
특히 구하기 어려워 보이는 고가구나 고미술이 그득했는데 이현종은 이런 걸 좋아하는 편이라 어떤 벽면도 쉬이 지나치질 못하고 있었다.
수혁이나 바루다는 그냥 빨리 초밥이나 한 점 먹고 싶었으나, 아빠가 그러고 있어서 그냥 따라보았다.
물론 연기력과 바루다의 도움에 힘입어 남들이 보기에는 수혁이 오히려 더 심취한 것처럼 보였다.
‘흠……. 취향도 나랑 비슷하네.’
뒤늦게 도착해 멀리서 그걸 지켜보던 이기원은 어딘지 모를 호감을 느낀 채 둘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그림 좋죠? 여기가 초밥집이지만 가구 풍은 묘하게 조선풍이라 그게 더 좋습니다.”
“아……. 네. 초밥을 한국적으로 재해석한 집이니까요. 그래서 꼭 한번 와 보고 싶었는데, 이거야 원. 감사합니다.”
“하하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언제 꼭 한번 대접해야지 하고 있었는데…… 김다현 사장 덕에 이렇게 생색 낼 자리가 생겨 제가 좋습니다.”
이현종은 그렇게 다가온 이기원과 어른의 대화를 나눴다.
예전 같았으면 그저 초밥이나 대령하라고 외쳤겠으나, 이젠 수혁이라는 딸린 식구가 생기지 않았나.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정치 쪽에 얽혀서 좋을 것도 없지만……. 악연이 되어서 좋을 것도 없지. 기자가 잘하고 오라고 하기도 했고.’
게다가 이기자 교수의 당부도 있어서 깨나 열심이었다.
덕분에 김다현까지 해서 넷은 아주 부드럽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해 나갈 수 있었다.
이기원 의원이 정말로 자주 오는지, 오너 셰프가 딱 네 사람 앞에 서서 초밥을 쥐여주기도 하고 또 동시에 딱 어울릴 만한 전통주까지 권해서 더할 나위 없었다.
“아흐, 좋다.”
이럴 때 이현종은 취하는 편이었다.
“어…….”
취하면 주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 쓰고 있는 가면은 벗겨질 공산이 컸다.
해서 수혁이 손을 딱 잡아 주었는데, 이현종은 괜찮다는 식으로 손을 내저었다.
이기원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였다.
무례하다는 느낌보다는 뭔가 아련한 느낌이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하여간 호감이 있는 상태라 이기원은 미소를 띤 채 물었다.
그러자 이현종이 그로서는 실로 드물게 잠깐 망설였다가 입을 뗐다.
“실례지만…… 혹시…… 어데 이씨입닙까?”
“네? 아……. 저는 한산 이씨입니다. 말해도 잘 모르실 거예요. 수가 적은 편이라.”
이기원은 좀 놀라긴 했으나 바로 답을 해 주었다.
이변은 그때 일어났다.
이현종이 갑자기 무릎을 탁 치며 일어났던 것.
“내 이랄 줄 알았다. 대글빡이 딱 우리 집안사람이라니까?”
그제야 이수혁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맞다……. 아빠도 한산 이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