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1화 우선 아선 (3)
“아니, 그렇습니까? 한산 이씨세요?”
“네네. 제가 현 자 돌림이고요……. 수혁이는 수 자 돌림입니다.”
이현종이야 한산이씨가 맞지만, 수혁은 그냥 짜 맞춘 것에 불과했다.
연달아 가운데로 돌림자 쓰는 경우가 어디 흔한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우연찮게도 현 다음이 수라 이현종과 수혁 모두 이게 정말 하늘의 이끄심인가 한 적은 있었다.
‘미쳤네, 진짜. 천생연분인가.’
신현태와 조태진도 그 얘기를 듣고는 팔뚝에 함부로 돋아난 소름을 쓸어내렸었다.
‘잉? 돌림자가 맞는다고?’
옆에 있던 김다현 또한 소름이 돋았다.
이미 수혁이 이현종의 친아들이 아니란 건 알고 있지 않던가.
조사를 통해서도 밝혀진 사실이거니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을 때도 이현종과 수혁 모두 아니라고 했더랬다.
근데 한산 이씨 돌림자 순번이 맞는다니.
‘이 둘이 괜히 진짜 친부자처럼 지내는 게 아니로구나.’
내막을 알고 있는 김다현이야 놀라울 따름이었으나, 이기원에게는 그렇지가 않았다.
설마하니 원내대표인 자기 앞에서 족보 가지고 사기 치는 사람이 있을 거란 생각이나 해 봤겠는가.
게다가 이현종의 얼굴을 차근차근 뜯어 보니 과연 종씨 같은 느낌이 있었다.
우선 길게 찢어진 눈이 인상적이었다.
그에 비하면 수혁은 한산 이씨가 맞나 싶을 정도로 둥근 눈을 하고 있었지만, 외탁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현 자…… 돌림이면…….”
그보다 궁금한 것은 현 자 돌림자를 쓰려면 이기원보다 훨씬 세대가 아래란 점이었다.
살다 보면 원 자 돌림인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준 자 돌림도 보기 마련이지만, 현 자 돌림은 네 개 아래였다.
항렬로 따지면 이기원이 이현종의 현조 할아버지 되는 셈인데,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그의 말에 이현종이 다 안다는 얼굴로 껄껄 웃었다.
“1919년 의열단 창립하신 이낙준 독립운동가께서 제 직계 되십니다.”
“아……. 아이고, 그렇구나. 아이고……. 이거, 어쩐지 그러면 현 자 돌림이…….”
“네, 워낙에 단명하셨는데, 그래도 어떻게 아이를 낳으셔 가지고 저까지 가문이 이어졌습니다.”
“그렇군요. 이제 이수혁 교수라는 훌륭한 자손도 보시고……. 이것 참 대견해하시겠습니다.”
“그럼요. 하하.”
이현종은 살짝 뜨끔하긴 했지만, 하늘을 한번 우러러보고 말았다.
자기 정도면 충분히 뛰어난 후손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게다가 자손이라면 동생 놈이 아이를 넷이나 낳았으니 되었다 싶기도 했다.
“그럼 제가 현조 할아버지께 술 한잔 올리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민망합니다.”
“항렬이 괜히 있나요. 우리 한산 이씨가 뼈대 있는 가문인데요. 사육신부터 토정 이지함에 아이고…… 양반 중의 양반 아닙니까.”
“그럼 딱 한 잔만…… 받겠습니다.”
“네, 하하.”
한산 이씨가 희귀 성씨는 아니더라도, 그리 흔한 성씨도 아니지 않은가.
이기원도 이현종도 같은 종씨 보는 게 퍽 오랜만이다 보니 약간 들떠 있었다.
이수혁이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니 그런 기분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그냥 아빠가 신나 보여서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이기원이 농담을 던졌다.
“6대 조부한테 술 한잔 주시죠.”
“아, 네. 드리겠습니다.”
“하하. 이렇게 똘망한 손주가 있다니. 기분 좋습니다.”
수혁이야 원래도 권력자 앞에서 잘하는 편 아닌가.
가끔 이현종 닮아 가서 뚱할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현종보다는 훨씬 비굴한 편이었다.
[역시 이런 거 잘하시네요.]
‘장점이지.’
[그럼요. 장점이죠.]
바루다도 이런 수혁을 지지했다.
의료 목적 인공지능 주제에 세상사에 통달해 가고 있는 덕이었다.
아무래도 일반적인 인공지능의 학습 방식 대신 인간의 오감을 통한 학습을 하고 있기 때문일 거라고 바루다 본인은 판단하고 있었다.
거들다 덕에 인공지능의 세계에 한발 걸치지 않았다.
그 후로 개발 중인 프로그램들, 심지어 또 다른 바루다도 봤는데 모두 자신과는 너무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김다현 사장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아주 잘 먹었습니다. 이런 식사 자리는 오랜만이네요.”
이현종과 수혁이 술을 한 잔 올린 후로는 주거니 받거니 하는 자리가 이어졌다.
간간이 김다현에게도 술이 갔는데, 김다현은 원래 전자에 있을 때부터 소문난 주당이었기에 빼는 법이 없었다.
다만 마시기 전에 주치의라 할 수 있는 수혁에게 하나 물었을 뿐이었다.
“술 먹어도 되나요?”
“네, 이 정도는 됩니다.”
“알겠습니다.”
허락을 구하자마자 달리는데, 중간에 수혁이 다시 너무 마시는 건 좋지 않다고 하지 않았으면 아무도 걸어 나오지 못할 뻔했다.
하여간 이기원은 기분 좋게 취한 얼굴로 김다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 진짜 기분이 좋았나 본데.’
듣기로 기업인들과는 아예 엮이길 싫어한다고 했는데, 이만한 제스처를 취하는 것을 보면 과연 오늘 모임이 예삿일은 아니었다 싶었다.
김다현은 취한 척하고 있지만 냉철하게 돌아가는 머리로 이런 판단을 내린 후, 역시나 취한 척 손을 내둘렀다.
“아뇨, 아뇨. 의원님 덕에 제가 좋았습니다. 여기 초밥이 명불허전이네요. 중간에 나온 술도 좋았고…….”
“아, 네. 사케가 아니라 전통주를 내오는데, 초밥을 한국식으로 재해석한 집이라 그런가. 잘 어울리죠.”
“네네, 뭔가…… 미식의 지평이 넓어진 느낌입니다, 하하.”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군요.”
김다현은 적절히 아부를 하면서도 아부라고 느껴지지 않게끔 위장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말만 들었다면 이기원도 이 사람이 진짜 작정하고 아부하는구나 싶었겠지만, 표정이나 말투 그리고 행동이 모두 취한 것처럼 보여서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취중진담이라지 않은가.
어느 정도는 진심이겠거니 싶게 된달까.
“현조 할아버지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이현종 또한 넉살 좋게 인사를 건넸다.
정말 진심을 다해 웃고 있었는데, 이쪽은 김다현과는 달리 진짜 진심이었다.
맨날 시도만 하고 단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한 맛집에 오게 해 줘서 처음부터 고마웠던 참인데 집안 어른이랍시고 돈까지 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이제 말씀 낮추십쇼. 이러면 제가 민망합니다.”
“하하, 반가워서 그럽니다.”
“저도 반갑네요. 의외로 별로 만날 일이 없는 성씨라.”
“네네, 그렇죠. 맨날 전주 이씨나 경주 이씨만 보니까……. 하하.”
이현종은 그렇게 웃으며 수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도 인사해야지. 래조 할아버지야?”
“그 말이 입에 익질 않아서요. 그냥 6대 조부라고 할게요.”
“아니, 아니. 할아버지라고 하세요. 하하.”
“아, 네. 할아버지.”
학연 지연 타파해야 한다고 하지만 사회에서 만나면 반가운 게 사실 아닌가.
나와서만 이런 게 아니라 안에서는 더 화기애애했더랬다.
덕분에 이현종은 김다현과 더불어 하고자 했던 말을 꺼낼 수 있었는데, 이기원은 거기다 대고 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딱히 어려울 것도 없는 부탁인 데다가, 원내대표라는 직위와도 큰 관계 없는 부탁이었기에 그랬다.
물론 그런 종류의 부탁도 원래 같았으면 잘 들어주지 않았겠지만 애초에 어머니의 은인인 데다가 같은 집안사람이라는 말까지 들어 놓으니 기분이 좋아서이기도 했다.
“하여간 칠성 쪽은 제가 아는 애들 중심으로 한번 얘기를 해 보죠. 제가 보니까 확실히 통합진료센터가 좋은데……. 기업 간의 자존심 때문에 나을 수 있는 환자가 못 낫는다고 하면 너무한 일 아닙니까.”
“그럼요, 그럼요. 그거 환자 몇 는다고 저희 센터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생명은 하나뿐이니까요.”
“네, 맞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덕분에…… 지금도 아주 잘 지내고 계십니다.”
“아, 말 나온 김에…… 증상은 없으시죠?”
“네. 일상생활 하시는 데 전혀 지장이 없어요. 고집부리다가 어떻게 되시는 거 아닌가 했는데, 다행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해서 이기원은 다시 한번 당부하는 이현종과 김다현을 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행하러 온 비서로서는 퍽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원내대표 되시고 나서는 거의 처음 보는 일 아닌가?’
민원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지역구 민원은 들어 보고 합당하단 생각이 들면 최선을 다해 돕는 사람이었다.
이기원처럼 여러 번 당선된, 이른바 지역구를 텃밭처럼 두고 있는 중진 의원 중에서 그런 인물은 드물기에 더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원내대표는 조율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지 않은가.
다른 당 원내대표들과의 회의를 하고 난 후에는 한동안 창문을 열고 심호흡만 하기도 했다.
본인이 옳다고 여기는 정책을 입안하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거래를 해야만 해서였다.
‘오늘은 스트레스가 오히려 좀 풀린 거 같아서 좋네.’
오랫동안 모신 탓에 이기원의 사람 됨됨이에 대해선 정말이지 잘 안다 못해 속속들이 아는 비서였기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해서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입을 열었다.
딱히 이기원이 권위적인 사람이 아니라 더 가능한 일이었다.
“의원님.”
“응, 왜?”
“오늘 모임은 되게 좋으셨나 봅니다.”
“그래? 그게 티가 나?”
“네, 엄청요. 지금도 웃고 계셔요.”
“음……. 그래, 좋았어. 맨날 이런 청탁만 들으면 좋겠네.”
이기원도 마침 아까의 모임을 생각하고 있던 참이라 답은 즉시 나왔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지 않았나.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냥 그런갑다, 사람들이 좋았나 보다 하고 말았을 테지만.
이기원은 아쉽게도 그럴 수 없는 위치에 오른 사람이었다.
늘 자기 자신을 점검해야만 했다.
무언가 오늘 기분 좋았던 것이 미끼가 되어 차후 이상한 청탁을 받을 수도 있기에 그랬다.
혹 사람들이 좋아서 그랬다는 결론이 나와도 큰일이었다.
그 사람들의 부탁이라면 객관적으로 듣지 못하게 된다는 얘기가 되니까.
“이런 청탁이요?”
“응, 저 사람들은 순수해. 김 사장이야 모르겠지만…… 나머지 둘은 그래.”
하지만 점검해 본 결과 이번엔 괜찮았다.
이 둘의 청탁은 순수한 점이 그렇지 않은 점보다 훨씬 많았다.
우선 목적이 둘의 영달에 있지 않았다.
‘통합진료센터는…… 정말 물건이야. 둘 얼굴만 봐도 알겠어.’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진료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 대가로 무슨 대단한 보상이 있는 건 아니었다.
로컬에 나가지 않고 대학 병원에 남은 의사들은 돈보다 명예를 택한 이들이지 않은가.
이현종도 이수혁도 자신들이 몸담은 센터가 최고라는 명성을 얻는 것을 최고의 보상이라고 생각할 터였다.
‘김다현 사장이야 다른 꿍꿍이가 있겠지만……. 뭐 못 보겠는 환자 보내라고 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지.’
게다가 생명이 얽힌 일이었다.
딱히 예산이 더 나가는 일도 아니었고.
그 덕에 이기원은 실로 오랜만에 다른 사람들과의 식사를 복기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멀어져 가는 이기원의 차량을 보고 이현종과 수혁은 씨익 웃었다.
서로를 마주한 채였다.
‘타도 칠성이다.’
‘타도까지 해야 돼요?’
[칠성 새끼들, 타도합시다!]
의외로 이현종과 의기투합한 것은 바루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