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4화 이제 칠성? (3)
“으음…….”
칠성 병원장, 정청원은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트레이드마크인 콧수염을 엄지와 검지로 비비적거리면서였다.
보통 이러면 기분이 좀 나아지는데 오늘은 예외였다.
속까지 쓰려올 지경이었다.
“안 과장님.”
그는 간신히 보고 있던 편지에서 눈을 떼어 안국태를 바라보았다.
식은땀만 흘리고 있던 신임 과장 안국태는 즉시 고개를 숙였다.
“네, 원장님.”
“이거…… 뭉갤 수 있겠어요?”
“네? 그걸요?”
정 원장의 말을 듣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뭉갠다고?
이 편지를?
발신인에 이기원 외 78명이라고 쓰여 있는데?
그 78명이 모두 고액 후원자고, 그들이 지금까지 후원한 총금액을 다 합치면 거의 천억에 가까운데 뭉개?
“어렵겠죠.”
“아, 네. 어렵습니다. 뭐라도 답변은 줘야 합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봐야 했다.
안국태에게는 다행이게도 원장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하긴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이 편지를 뭉갤 생각은 안 들 터였다.
이기원만 해도 그런데 나머지 인원들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원장은 잠시 편지를 휘적거리다가 툭 하고 책상 위에 던졌다.
그리곤 다시는 보기 싫다는 식으로 외면한 채, 말을 이었다.
잠깐 사이에 화제가 살짝 틀어져 있었다.
“근데…… 대체 누가 주동한 걸까요?”
“이기원 의원님 이름이 나왔으니……. 의원님 아닐까요?”
“뭐 이 편지를 쓰고 보낸 건 이기원 대표님이 맞겠죠. 하지만…… 그 사람한테 그럴 이유가 있어요? 이미 태화에도 후원해서 VIP 자격 취득한 거로 알고 있는데.”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원래 여당 원내대표쯤 되면 아무것도 안 준 상태라고 해도 VIP이지 않나.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모든 병원에서 국회의원들을 포함한 이른바 국가 주요 의전 대상을 상대로 어느 정도 병실을 확보하고 있었다.
정경유착이니 뭐니 하는 그런 지저분한 이유 때문만도 아니었다.
나라의 수반이 아프면 큰일이지 않은가.
거국적으로 생각했을 때 빨리 치료하는 게 국익에도 우선이었다.
‘근데 이 양반은 한사코 개인 후원을 통해 VIP가 된단 말이지.’
아마도 꿈이 대통령이라서 흠 잡힐 만한 일을 아예 만들지 않고 있는 듯했다.
어찌나 강박적으로 살았는지 엄마가 한평생 제멋대로 살면서 트롤 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기원을 엄마와 구분해서 평가하고 있을 지경이었다.
‘이 사람이 개인적인 이유로 움직일 리는 없어.’
그런 사람이니만큼 한번 움직일 때 느껴지는 무게가 달랐다.
돈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랬다.
“그건…… 그건 그렇네요?”
안국태 또한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개차반인 인성과는 별개로 나름 정치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파이팅도 넘쳤다.
특히 태화를 상대라면 더더욱 그랬다.
언젠가 집단감염에서 선제공격을 했다가 오히려 호되게 역공을 당한 적이 있지 않나.
그때부터 태화라면 이를 갈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이수혁은 피의 복수를 해 주고 싶은 대상이었다.
머리가 팽팽 돌았다.
“이거 설마 박국진 전 과장이 부채질했을까요?”
“그 사람이? 음……. 박국진이 이번에 좀 억울하게 되기는 했지.”
“억울해하더라도…… 병원에 충심이 있는 사람이라 판단해서 본보기 삼으신 거 아닌가요?”
“그렇지. 게다가, 이후에 어떤 식으로든 끌어주겠다고 말도 했는데…….”
“하긴 사람 속은 모르는 겁니다. 하여간 남들 앞에서 망신당한 셈이니 가능한 얘깁니다. 박국진이 자기가 환자 의뢰해서 결과가 좋았는데, 그 이유 때문에 경질되었다고 하면……. 이기원 의원이 움직일 법도 하지 않습니까?”
“설득력 있는 얘기야.”
원장은 깍지를 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하니 박국진이 그랬으려고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듣고 보니 아귀가 딱딱 맞았다.
“근데 그렇다고 당장 대처를 달리할 수는 없어. 정말 박국진이 이기원 의원이랑 그렇게 긴밀한 사이라고 하면……. 밟아 놓는 것도 애매하잖아?”
“이유가 없이 밟는 거면 애매하지만…… 원내 규정에 따라서 밟는 거면 괜찮죠.”
“원내 규정이라면 어떤?”
“지금 과장 경질된 이유가 대외적으로 기밀 아닙니까? 말 많은 병원이라 이런저런 소문이 그렇지 않아도 돌고 있습니다.”
“아, 나도 들었어. 박국진이 사실 그럴 사람은 아닌데.”
원래 병원만큼 헛소문이 쉽게 만들어지고 또 그게 사실인 양 퍼지는 곳도 드물었다.
하여간 남들 원래 하던 거랑 조금만 다르게 가는 사람이 있으면 관련한 소문이 무성해졌다.
박국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원장단에서 일부러 자세한 이유를 밝히지 않아 부채질까지 한 마당이었다.
때문에 박국진은 있지도 않은 성추문이 있네, 뒷돈을 받았네, 뭐네 하는 얘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물론 물증은 없었기에 직접적인 위해를 받지는 않았지만 하여간 분위기는 충분히 조성되어 있었다.
“그런 사람으로 만들면…… 이 편지의 신빙성을 흔들 수 있죠.”
“아……. 그래, 그렇구만. 그럼 뭐로?”
“박국진 교수 사생활 깨끗한 거는 저도 인정합니다. 성추문은 말도 안 되죠.”
“응, 평판이 좋지.”
애초에 그래서 과장이 된 거기도 했다.
인사부장을 겸임하면서 사람들 끌어들이는 일도 그래서 시킨 것이고.
하여간 칠성의 박국진이라고 하면 다들 호감이었다.
“하지만 리베이트는 뭐…… 어떤 식으로는 엮으려고 하면 엮이지 않겠습니까?”
칠성도 대형 병원이었다.
레지던트들이 내과만 한 연차에 스물이 넘는다는 얘기.
그 말은 3개 연차를 합치면 거즘 80에 가까워진다는 뜻이었고, 펠로우들까지 하면 거즘 200명이었다.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이상한 놈이 없을까?
원장도 회의적이었다.
“그러려면 근데 하나 더 골로 보내야 되잖아?”
“이 정책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죠.”
“음……. 그것도 그래. 그렇더라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박국진이 그렇게 날아갔다는 게 알려지면 아무래도 후원회에서 이 의견에 대해서 재고할 여지가 있지.”
“네, 맞습니다. 원장님.”
“좋아. 한번 캐 보자고. 없으면 뭐 어쩔 수 없는 거고. 있으면, 그대로 가자고.”
“네.”
안국태는 고개를 숙인 후 밖으로 나섰다.
그리곤 심복들을 찾았다.
여기서 말하는 심복들이란 병원 사람들도 있었지만, 제약회사 직원들도 있었다.
“어, 요 앞에…… 알지? 그 바에서 보자고.”
병원에서 대놓고 얘기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비밀 얘기이지 않은가.
이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던 만큼 상대는 죄다 별말 없이 알겠단 말만 해 왔다.
해서 모임은 그날 저녁에 바로 성사되었다.
“박국진을 리베이트 건으로 엮어서 보내야 될 거 같은데.”
안국태는 몇 마디 나누기도 전에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그러자 원내 펠로우와 주니어 교수가 대번에 놀란 기색을 띠었다.
“네? 벌써 과장에서 경질되는데요?”
인간적으로 박국진은 꽤 존경받는 사람이었기에 그랬다.
그에 비해 안국태는 이것저것 떠먹여 주는 게 많은, 말하자면 라인의 윗줄이었지만 인간성만 보면 정말이지 별로였다.
“그럴 일이 생겼어. 혹시 영맨들 사이에서는 도는 소문 없나?”
안국태는 그런 불만을 가볍게 무시했다.
그럴 만했다.
어차피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안국태와 한배를 탄 지 오래라 그랬다.
안국태가 비록 바깥에서는 개새끼로 유명했을지언정 이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만큼은 의리를 지켜서이기도 했다.
“아……. 그게 박국진 교수는 아예 없습니다.”
“네. 골프 접대도 없고……. 공항 픽업도 없고.”
“돈은?”
“돈이요? 요새 돈으로 받는 사람 자체가 거의 없는데요.”
영맨들도 난색을 표했다.
사실 리베이트가 횡행했던 게 벌써 한 세대 전이지 않나.
지금은 관련 법도 많이 생겼을뿐더러 감시 체계가 너무 촘촘해진 까닭에 정말 드문 일이 되었다.
“그럼 박국진 말고……. 그 주변은? 아까 내가 알아보라고 했지, 그거 어떻게 됐어.”
안국태의 말에 주니어 스탭이 서류 하나를 들이밀었다.
박국진이 총애하는 사람들 명단이었다.
주니어 스텝도 있었고, 펠로우나 레지던트들도 있었다.
딱히 가까운 사이가 아닌 사람들도 있었는데, 논문이나 발표 준비라도 한번 했으면 모조리 끼워 넣은 탓이었다.
“음……. 역시 전임 과장이라 그런가, 되게 많네. 이 중에서는 없나?”
“어……. 잠시만요, 이건 시간이 좀 걸리겠는데요?”
직원들은, 안국태의 비호 아래 어마어마한 제약 영업을 해내 승승장구하고 있는 이들은 곧 서류에 집중했다.
그리곤 어렵지 않게 사람 하나를 추려 냈다.
주니어 스탭이었는데, 안국태가 듣기에도 소문이 그리 좋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뭐…… 장난 아닙니다. 골프 픽업에 공항 픽업은 당연하고…… 자기가 자주 가는 식당에 선결제 금액도 걸어 달라고 해요. 명절 선물도 엄청 요구하고…….”
“그래? 위법인가?”
“당연히 위법이죠. 물론 뭐 편법으로 다 위법이 아닌 것처럼 만들 수 있기는 합니다.”
“그럼 위법으로 까면 되잖아? 법망은 피해도 원내 법규는 그게 아니니까.”
“옳으신 말씀입니다.”
안국태는 직원들에게서 고개를 돌린 후, 원내 심복들을 바라보았다.
“그 식당에 박국진이 같이 갔을까?”
“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안국태는 그 말을 하면서 무섭게 웃었다.
딱히 답을 바라고서 한 말이 아니지 않나.
어차피 감방 보내려고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저 흠집을 만들어서, 원내 징계만 받아도 될 일이었다.
그 정도 일을 조작하는 일은 쉬웠다.
적어도 안국태처럼 조직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랬다.
“잘 될 거라고 합니다, 센터장님.”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르는 이기원의 비서가 이현종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현종 또한 프락치가 있다고 해도 초능력까지 있는 건 아니라 그저 껄껄 웃었다.
“그래요? 이거 신세를 지내요.”
“아닙니다. 어차피 윈윈 아닙니까. 환자들이 더 살 수 있다면 이렇게 하는 게 맞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고요.”
“의원님이 오랜만에 즐겁게 들어주신 청탁입니다. 제가 감사합니다.”
“어휴, 이거야 원.”
둘이 분위기 좋게 통화하는 동안 수혁도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이쪽은 저쪽과는 달리 아예 상반된 분위기였다.
“그래? 환자 상태는 어떤데?”
“지금 객혈이 아주 심합니다.”
“객혈이 심해? 토혈은 아니고?”
“네, 거품이 나오고 있어서 확실히 객혈입니다!”
“원인은?”
“불명입니다! 호흡기내과랑 흉부외과 왔는데…… 아직 이게.”
우하윤이 건 전화였다.
목소리가 아주 다급해 보이는 것이 상황이 장난이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 옆에서 난리 났는데요?]
‘그래?’
[응급실 교수 목소리가 섞여 들립니다. 당황한 게 분명합니다. 어차피 지금 당장 할 일도 없는데 내려가죠?]
‘오케이, 알았어. 아빠랑 같이 가지 뭐.’
[네, 그게 좋겠습니다. 처치할 게 많은 환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루다의 말이 없었어도 아마 내려갔을 터였다.
환자가 있다는데 굳이 피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알았어. 지금 갈게.”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