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517화 (517/1,303)

517화 객혈 (3)

어엿한 정교수인 홍창기가 왜 집에 잘 못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는지는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태화 의료원의 기조실장이지 않나.

보통 기조실장이 차기 원장급인 데 반해 홍창기는 아직 나이도 그렇고 해서 그런 급은 아니긴 해도 워낙에 일이 많았다.

태화 바이오 이사장인 김다현이 이런저런 일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벌여 놔서 더 그랬다.

병원 측의 일은 전체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했으나, 그럼에도 국제진료소 건을 도맡아서 진행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새 늙었네.’

[그러니까요. 어깨도 좀 좁아진 거 같고요.]

‘원래 행정 업무 하다 보면 저렇게 되더라.’

수혁은 밝은 얼굴로, 그러나 터덜거리는 발걸음과 함께 멀어져 가는 홍창기를 바라보았다.

본인은 동기 중 가장 빨리 출세하는 거라 신이 난 모양이기는 한데, 갈려 나가는 것도 사실이기는 해서 그런지 되게 힘들어 보였다.

특히 어깨가 굽어서 목까지 문제가 생길 것이 자명해 보였다.

바루다의 쓸데없이 자세한 진단명을 곁들여 보자면, 홍창기는 일단 일자목이 있었다.

‘하여간 이 환자는 어쩌지.’

수혁은 검사가 끝나자마자 다시 앰부를 짜면서 바루다에게 물었다.

앰부 짜는 게 생명에 필수적인 일이면서도 하나의 잡일이기도 해서 다른 레지던트들이나 펠로우들이 서로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지만, 수혁은 이미 바루다와의 대화에 빠져서 별로 신경 쓰지 못했다.

게다가 이 환자는 방금까지 좌측 폐에서 엄청난 출혈이 있었던 환자이지 않나.

손으로 압력을 느끼고 그걸 바루다에게 얼마간 분석하라고 하는 게 환자의 예후에 더 도움이 될 거 같았다.

[우선 아까 너무 급해서 찍지 못한 CT부터 찍죠. 조영제를 넣으면 출혈 부위가 보일 수도 있습니다.]

조영제는 혈관을 타고 달리면서 혈관을 하얗게 조영 증강해 주는 역할을 했다.

영상에서는 아주 다양한 쓰임새를 보였는데, 지금 문제가 되는 출혈에서도 꽤 결정적이었다.

혈관을 타고 달리던 놈이 출혈이 있으면 그 부위에서 새지 않겠나.

물론 기관지 내시경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놈이 CT에서 보일까 싶기는 했으나, 굳이 안 찍어 볼 이유도 없었다.

“일단 바로 CT실로 가죠. 가서 흉부 CT 찍도록 하겠습니다. 처방 가능한 사람이 아무나 좀 내줘요. 전화는 내가 할 테니까요.”

“아, 네. 교수님.”

“전화도 제가 하겠습니다!”

바루다의 조언을 받아들인 수혁이 한마디 하자 뒤따르던 이들이 저마다 나섰다.

수혁으로서는 딱히 만류할 이유가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하윤은 부리나케 달려서 처방을 내고, 펠로우가 CT실에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하나라도 직급이 더 높은 사람이 걸어야 약발이 든다는 계산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지금 오라고 합니다.”

“잘됐네. 어디로?”

“정규 CT실입니다. 본관 지하 1층입니다.”

“약간 머네. 그럼 내가 이걸 계속하면서 걸을 수는 없겠는데.”

“제가 하겠습니다!”

짜다 보니 지금은 출혈이 없는 듯했다.

게다가 홍창기가 어찌나 혈전을 살뜰히 제거했는지, 당장 느낌만 봐서는 사실 삽관을 제거해도 될 거 같았다.

해서 수혁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그래도 삽관을 제거할 수는 없다고 결론을 내리면서였다.

[아깐 응급실에 이낙준 교수가 와서 대응이 됐던 겁니다. 지금 제거하면 응급 상황에서 대응할 수 없어요.]

‘나도 알아. 아직 아무것도 한 게 없지.’

[네, 그저 호흡을 잡아 놨을 뿐입니다.]

바루다의 말이 좀 너무한 거 같아도 사실이지 않나.

실제로 이 환자가 여기 와서 처치 받은 것 중 의미가 있던 건 기관절개뿐이었다.

억지로 찾자면 홍창기가 기관지 내시경 하면서 혈전을 모조리 제거한 것 정도?

그 외에는 피가 어디서 나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바로 오시죠.”

고민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본관 지하 1층이었다.

응급실 환자라고 전해 들어서 그런가, 방사선사가 이미 나와 있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흉부 다 커버 하게 찍어 주세요.”

“네, 그러죠. 납복 입고 들어가실 분?”

“제가 하겠습니다.”

앰부를 짜야 하기에 누군가는 CT 찍을 때 들어가야 했다.

보통 직급으로 결정되는데 하윤이 여기서는 제일 낮은 데다가 어리기까지 해서 논쟁의 여지도 없이 결정되었다.

해서 하윤은 무거운 납복을 걸치고 목에도 보호대를 건 채 앰부를 짜기 시작했다.

그냥 걸치는 거야 그리 힘든 일이 아니지만, 목에 거는 건 지치는 일이었다.

납이라는 게 워낙에 무거운 물건 아닌가.

하지만 갑상선이 방사선에 너무 예민한 조직이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의료진 보호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기 이전엔 이 때문에 많은 문제가 생겼다는 보고도 있었다.

“이제 찍습니다. 문제 있으면 바로 말해 주세요.”

“네.”

우하윤은 여느 의료인이 그러하듯 힘든 내색 없이 그저 환자 침대에 달린 간이 모니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의 혈압이니 뭐니 하는 바이털 사인이 표시되고 있었다.

다 중요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 중에서 산소 포화도가 제일 중요했다.

폐 실질의 문제라기보다는 기도의 문제 아닌가.

피가 나면서 덜컥 막히면 골든아워가 불과 1분 이내였다.

빨리 캐치 해서 처리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환자를 잃는 수가 있었다.

너무 과민한 거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원래 기도는 그랬다.

‘휴. 그래도 교주님이 계시니까.’

살짝 떨리는 와중에도 우하윤은 옆에 쟁쟁한 이들이 있다는 생각에 침착할 수 있었다.

그사이 촬영이 시작되었고, 곧 영상이 수혁이 있는 곳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흐음…….’

영상을 받아 보는 수혁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예상은 했으나 조영제가 새는 부분이 보이지 않아서 그랬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솔직히 별 이상이 보이질 않았다.

[기관지 동맥들은 다 정상처럼 보이는군요.]

‘이상한데? 이렇게까지 멀쩡하게 보여?’

[그러니까요. 사실 조영제를 쏘면서 재출혈까지 각오했는데……. 이상한 일입니다.]

‘흐음…….’

보통 폐 실질에서의 출혈이 있다고 하면 당연히 기관지 혈관들이 범인이었다.

폐에 혈액을 공급하거나 혈액을 받아 가는 것들이 기관지 혈관들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영상에 비치는 혈관들은 하나같이 멀쩡해 보였다.

아무리 현존하는 CT니 MRI니 하는 검사들이 결국, 그림자를 보는 검사들이라 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오리무중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답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흐음.”

때문에 수혁은 환자를 통합진료센터가 확보하고 있는 중환자실 자리에 데려다 놓고도 좀처럼 미간을 펴지 못했다.

덩달아 우하윤이나 호흡기 펠로우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그들 눈앞에 있는 이수혁이라는 젊은 괴물은 이쯤 되면 뭐라도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랬다.

그렇게 듣기도 했거니와 워낙에 많은 활약을 한 덕에 몇 번인가는 본 적도 있었다.

‘내일이면 다르겠지.’

그나마 우하윤은 놀라운 신앙심의 소유자라 그런지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았지만, 호흡기 펠로우는 안대훈의 말을 빌리면 믿음이 적은 자였다.

‘이거 환자 죽는 거 아냐?’

보호자도 까칠하던데.

환자도 아직 젊은 편이고.

여러 가지 걱정이 부유하기 시작했다.

뭐 워낙에 어려운 케이스라 진단을 못 한 거니 의료 사고까지는 아니겠으나, 그럼에도 부담은 부담이었다.

생명을 다루는 의사 입장에서 자신의 손을 탄 환자가 무엇 하나 해 보지도 못한 채로 죽어 나간다는 건 언제가 되었건 간에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으음.”

한편 수혁은 둘이 자기 앞에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고심 중이었다.

심지어 이럴 때면 다른 이들이 이상하게 여길 거라는 조언을 해 줘야 하는 바루다도 그랬다.

둘은 정말이지 두뇌 풀가동 상태였다.

‘보통 이만한 출혈을 일으키는 건 기관지 혈관인데…… 괜찮아 보여. 그럼 이걸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영상에서 괜찮아 보여도 배제하는 건 어렵습니다. 다만 다른 원인을 찾아보기는 해야겠죠.]

‘폐 실질에서의 출혈이라는 건 내시경을 통해서 확인했잖아. 다른 원인이 있을까? 일단 폐결핵에 의한 공동은 없었어. 뭐…… 병력 상으로도 가능성이 없던 거지만.’

[폐 실질의 출혈이면서 기관지 혈관의 출혈이 아니다. 서로 상반되는 문장이기는 합니다. 논리적이지도 않고요.]

이전 같았으면 이렇게까지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었다면 진즉에 한숨이 터져 나왔을 터였다.

바루다는 몰라도 수혁은 그리 멘탈이 단단하지 못하던 시절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예 다른 반응이 나왔다.

‘방금 웃으신 건가?’

‘뭐지? 미치셨나? 안 그래도 이상한 모습 보이면 연락 달라고 했는데.’

우하윤이나 호흡기 펠로우가 잘못 본 것은 아니었다.

수혁은 정말로 웃고 있었다.

여전히 모르는 것이 있다니.

정말이지 의학의 길이란 끝이 없지 않은가.

건방진 생각일 수도 있겠으나, 종종 바루다가 들어와 있으니 너무 이른 시기에 임상을 정복해 버리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드는 게 사실인데 이럴 때마다 안심이 되었다.

‘뭐……. 고민하다 보면 답이 나오겠지.’

[네, 언제나 그랬듯이요.]

게다가 이제는 자신도 있었다.

네가 어려워? 어쩌라고? 나는 천잰데. 게다가 바루다까지 있는데.

뭐 이런 랩스타 같은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물론 남들이 보기엔 진짜로 좀 이상하긴 했다.

특히 믿음이 부족한 호흡기 펠로우가 보기엔 더더욱 그랬다.

그렇지 않아도 원장인 신현태에게 전해 들은 말이 있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짓 하면 바로 연락해. 앞에서 내색하지는 말고……. 알지? 유전되는 거……. 현종이 형도 아슬아슬하잖아. 근데 수혁이가 아무래도 더 순도 높은 천재다 보니 이게 더 심한 거 같아.’

언젠가 신현태가 자기가 키워 주기로 결심한 주니어들과 펠로우들을 모아 놓고 이런 말을 했더랬다.

완전 심복들이다 보니 얘기가 새어 나갈 가능성은 없었는데, 그 안에서는 끊임없이 돌았다.

오늘은 수혁이 어디를 보고 얘기를 했다더라.

어디서 자꾸 누가 얘기하길래 가서 봤더니 수혁이 혼잣말을 하고 있다더라.

도시 괴담 같은 얘기였지만 자꾸 쌓이다 보니 점점 더 신빙성이 쌓여만 갔다.

해서 문자를 보냈더니 신현태에게 바로 답이 왔다.

<그 정도는 흔한 일이니 일단 경과 관찰할 것.>

확실히 원장은 원장이었다.

원격으로 이렇게까지 확실한 진료가 될 줄이야.

적잖이 안심하고 있으려니, 수혁이 또다시 웃었다.

같은 웃음이라고 하기엔 조금 종류가 달라 보였다.

아까보다는 뭔가 더 후련하다고 해야 할까?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하여간 그런 것 같았다.

‘환자의 히스토리에 집중해 보자고. 이 환자 두 번이나 고주파 하 전극도자절제술을 시행 받았어. 시술 도중에 문제가 없었다고 하지만…….’

[고열은 근처에 알게 모르게 손상을 주는 법이지요.]

‘경로를 고려해 보면 아무것도 안 걸리는 건 아냐.’

[네, 음. 너무 큰 혈관이기는 한데……. 가능한 얘기입니다.]

‘그렇지?’

[네. 현재로써는 가장 합리적인 추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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