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9화 객혈 (5)
“어……. 네, 누나.”
심장내과 교수로 일하다 보면 집에 제때 갈 수 있는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적은 수준이 아니라, 언제 그랬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희소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심혈관 중재 시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아예 병원에서 살고 있다고 봐야 했다.
심장은 의사에게 시간을 얼마 주지 않는 장기이기에 그랬다.
병원 안에서 발생했다면 그나마 여유가 있겠지만, 보통은 운동하다가, 아니면 술 먹다가 혹은 그저 아침에 일어나다가 발생하는 게 심근경색 아닌가.
실려 오다가 죽을 확률도 높은데 그 확률을 뚫고 살아서 온 사람이라면 반드시 살려야 한다는 부담감이 삶 전반에 깔려 있었다.
“병원이지?”
그렇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곽미경 교수는 지금도 동고동락하고 있는 사이인 후배이자 인생을 병원에 갈아 넣고 있는 김인석이 병원에 있을 거라 확신했다.
김인석은 벌써 8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에 병원에 있을 거라 확신하는 데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반박은 못 했다.
“어, 병원. 왜? 밥 먹을까?”
“아, 아니. 환자 때문에.”
“환자? 아……. 누나도 지금 환자 보고 있구나.”
“그렇지 뭐.”
원래 힘든 사람들끼리는 정이 오가는 법이었다.
군대에서 전우애라는 말이 괜히 생겼겠는가.
병원은 군대와는 달리 자기 생명이 아니라 남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곳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험악하기도 했다.
내 실수로 내가 아니라 남의 목숨이 날아가지 않나.
그 때문에 주어지는 부담감이나 책임감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그렇다 보니 전우애 비슷한 것이 싹 터 있었다.
막말로 둘은 서로 전세금 빼서 다 달라는 부탁 정도만 아니면 다 들어줄 생각이 있었다.
“환자 보내 줘.”
“뭔 환자인지도 안 묻냐?”
“급하니까 전화한 거 아냐?”
“급하긴 한데, 심근경색은 아냐. 폐정맥 협착이 의심돼. 꽤 심각할 거 같아. 폐 고혈압이 심해.”
“응? 그래? 드문 경운데……. 어떻게 잡았어? 교수님이 하신 거?”
둘은 이제 둘 다 교수면서도 둘 사이에서는 교수란 직함을 오직 이현종에게만 쓰고 있었다.
그 교수라는 느낌이라고 보면 되었다.
어디 가면 어엿한 교수 수준도 아니고, 간판스타가 될 수 있는 급인데도 그랬다.
“아니, 이수혁 교수.”
“아……. 아드님? 오, 똑똑하다더니. 하여간 보내 줘. 나도 가서 준비하고 있을게.”
“어, 그래. 좋아. 간다.”
하여간 김인석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환자를 받기로 했다.
곽미경 교수가 전화를 해서 더 부드럽게 대응한 게 없지는 않지만,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원래 심장은 지체할 시간이 없다 보니 노티가 조금 미흡하다 해도 성질부리는 사람이 드물었다.
착해서가 아니라 성질부리다 그 시간 때문에 환자가 죽을 수도 있어서 그랬다.
드르륵.
수혁과 곽미경 그리고 우하윤은 환자를 끌고 심혈관 중재실로 향했다.
여전히 환자는 의식이 없었지만, 보호자는 멀쩡했기에 후다닥 달려와 물었다.
그제야 수혁은 정작 보호자에게는 특별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넌 인마 옆에서 이런 거 보조해야지.’
[진단도 돕는데, 사회생활도 도와요?]
‘빅스비는 비서 노릇이 어느 정도는 된대, 인마.’
[빅스비? 그따위 것과 저를 비교합니까?]
‘걔도 태화에서 만든 거 아니냐?’
[창조주가 같다고 해서 피조물도 같은 건 아니죠. 당장 수혁의 얼굴만 해도 차은우랑 비교하면…….]
‘뛰다가 눈물 나게 만들지 말고.’
수혁은 괜히 시비 걸었다가 본전도 못 건진 채 황급히 걸음만 걸었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차은우 얼굴이 아른거렸는데, 솔직히 잘생기긴 했다는 생각만 들어서 더 빡 쳤다.
왜 사람이 그렇게까지 잘나서 남을 피곤하게 할까.
‘내 얼굴이 차은우 같았으면……. 와 난리 났다.’
쓸데없는 상상도 시작되었다.
의사에, 바루다까지 있어 똑똑한 수준을 뛰어넘었는데 얼굴이 차은우?
미쳤다.
[미쳤어요?]
다행히 바루다의 일침 덕에 망상이 더 진행하진 않았다.
그사이 혈관중재시술실에 도착했는데, 안을 들여다보니 이미 김인석 교수는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하도 응급이 많다 보니 준비도 속전속결인 모양이었다.
같이 있는 간호사도 베테랑인지 수술상도 제대로 펼쳐져 있었다.
심지어 납복까지 걸치고 있었다.
“야, 넌 맨날 환자 좀 늦으면 어쩌려고 그 무거운 걸 먼저 짊어지고 있냐?”
“환자가 늦으면 다행이지. 내가 늦으면 환자 죽어.”
“와……. 방금 그거 너무 교수님 같았다, 소름.”
“맨날 들은 게 그거라 어쩔 수가 없어.”
“그래서 네가 솔로인 거 아닐까?”
“괜찮아.”
“잉? 이 소리 하면 그렇게 싫어하더니.”
“교수님도 결국, 첫사랑이랑 잘되셨잖아. 나도 60 넘어서 잘되겠지.”
“그럼 되는 거야?”
“되지.”
“음.”
곽미경은 불쌍한 동료이자 후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럴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 환자를 수술대 위로 옮겨 주었다.
내내 앰부를 짜고 있던 하윤은 절로 머리를 들었고, 뒤따라온 펠로우가 앰부를 전달받아 대기 중이던 마취과 의사에게 전달했다.
“손 저리죠?”
“아, 네.”
“일단 벤틸 걸게요. 주의해야 할 사항은 뭐가 있죠?”
마취과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물었다.
답은 수혁의 몫이었는지, 곽미경이나 다른 이들 모두 수혁을 돌아보았다.
진단을 해낸 사람이 그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 환자 좌측 폐에서 출혈이 있었어요. 미세혈관 파열에 의한 출혈이었던 걸로 생각됩니다. 출혈이 생기면 튜브 위치만 좀 조정해 주세요.”
“어……. 네.”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기도를 다뤄야 하는 입장에서는 끔찍한 소리이기도 했다.
안에서 피가 난다니.
하지만 마취과 의사는 경험이 적지 않은 데다가, 이게 기관 삽입이 아니라 절개가 되어 있다 보니 아주 당황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 이미 들어가 있는 거 밀어 넣는 건 어렵지 않지.’
게다가 좌측에서 피가 난다지 않는가.
원래 좌측은 심장 때문에 기관지가 좀 옆으로 틀어져 있어서, 쑥 밀면 딱히 의도하지 않아도 대개는 우측 기관지로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자, 마취 걸었습니다.”
“오케이. 닦을까.”
“네.”
김인석 교수는 자기 밑에 있는 제자, 그러니까 펠로우와 함께 환자 다리부터 닦았다.
여기 있는 혈관을 통해 심장으로 들어갈 참이었다.
당연하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심혈관 중재 시술자인 이현종에게 혹독하게 배운 김인석은 실력이 좋았다.
특히 김인석이 딱 들어왔을 시점이 이현종이 키워 둔 제자를 칠성에 10억짜리 수표에 뺏긴 참이라 더더욱 그랬다.
‘이거 진짜 주먹으로 맞지만 않았지…….’
김인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푹 하고 가이딩 카테터를 찔러 넣었다.
귀신같이 피가 맺혔고, 그대로 가이딩 카테터가 위로, 또 위로 진행했다.
엑스선으로 그걸 확인하면서 하는 술기였기에 구경하는 이들도 납복을 걸쳐야만 했다.
덕분에 수혁이나 곽미경도 납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사실 이 술기에 그리 익숙지 않은 수혁조차도 탄복할 정도로 능숙했다.
‘오…….’
그에 비해 곽미경은 탄복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아까는 분위기에 휩쓸려서 폐정맥 협착을 확신했는데, 여기까지 와서 보니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현종 교수님 말씀이면 의심할 이유가 없지만…….’
이현종은 괴물같이 똑똑하기도 하지만 경험도 많고, 심지어 수십 년 경력을 헛되이 쓰지도 않은 인간 아닌가.
그에 비하면 이수혁은 아직 루키였다.
“음…….”
그때 김인석 교수가 쥔 카테터가 폐정맥에 도달했다.
그러자 모든 이가 폐정맥의 모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와……. 여기 이거 뭐지? 선천적인 건 아닌 거 같은데? 너무 좁아. 이대로는 살 수가 없는데. 고혈압 얼마야, 정확히?”
모양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지만 사실 뭘 아는 사람들에게나 그게 보일 뿐이었다.
실제로 우하윤은 정말이지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 있었다.
민망한지 납복을 매만지면서였는데 딱히 잘못은 아니었다.
원래 펠로우를 하지 않는 이상 저러는 게 보통이었다.
아니, 안대훈처럼 수혁 따라가는 데 목숨을 건 3년 차라면 또 모르겠지만, 하여간 보통은 그랬다.
“56mmHg 정도 차이나.”
“그래? 심하네. 근데 좁아진 정도에 비하면 그런 것도 아냐. 와……. 이건…… 외상인가?”
김인석은 연시 혀를 내둘렀다.
꽤 경험이 많은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좁아진 건 처음 봐서 그랬다.
그래서 그런가, 자연스레 수혁을 돌아보았다.
이제 막 진입한 터라 당장은 움직일 필요가 없어서도 그랬다.
“아……. 이 환자가 심방세동으로 두 번 전극도자절제술을 받았는데, 아마 고주파 열에 의해 열 손상을 입었을 겁니다.”
“아……. 열 손상. 그건 좀 오래가지.”
“네. 그 때문에 천천히 협착이 진행하지 않았나,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확실히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닌데……. 음.”
김인석은 얼마 전 이현종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사실 김인석이 물은 말에 답해 준 것이었으니 문답이라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일 터였다.
‘수혁이가 뭐가 그렇게 잘났냐고? 걔는 다 잘하는데 특히 단서 조합해서 추론하는 걸 잘해. 장난 아냐. 그건 이제 나도 못 당한다고.’
수혁에 대해 전해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든 감정은 질투였다.
김인석 본인도 누구한테 꿀리지 않을 정도로 똑똑하다고 믿어서였다.
이현종은 괴물이니 논외로 쳐야겠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아니라고 믿었는데, 이현종이 맨날 자기 아들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다고 하니 아무리 성질이 나쁘지 않은 김인석이라 해도 배알이 꼴릴 수밖에 없었다.
‘진짜 잘하긴 하는구나.’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만한 단서만 가지고 이토록 빨리 진단을 내릴 수 있는 건 세상에 오직 둘뿐이지 않나 싶었다.
이수혁과 이현종.
이수혁은 아직 30대 중반에도 이르지 않은 나이이니, 세상에서 제일 천재라는 말도 그리 틀리지 않은 말이었다.
“스텐트.”
하여간 감탄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인석은 곧 스텐트를 진입시키곤 좁아진 부위에 거치시켰다.
그러자 잔뜩 움츠리고 있던 티타늄 소재의 그물망이 쫙 펴지면서 좁아져 있던 폐정맥을 확 하고 펴 주었다.
모르긴 해도 이 순간 폐 쪽에서 가해지던 압력도 훅 하고 줄었을 터였다.
“좋아. 잘되긴 했는데……. 이대로 잘 되려나?”
“열 손상이다 보니……. 다른 부위가 더 좁아질 수도 있죠. 게다가 이미 모세혈관이 손상되어서 또 출혈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엽 절제술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래도 워낙 빨리해서 괜찮을 거 같은데?”
“그러길 바라야죠.”
“어……. 근데 그러고 보니 이현종 교수님께 부탁 안 하고 나한테 했네?”
“아, 환자 보고 계신다고 해서요. 응급실에서 갑자기 사라졌어요.”
“그래? 그럼 후딱 컵라면만 먹고 가 볼까? 교수님이 어지간한 케이스 가지고는 안 그러실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