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화 이렇게까지 나와? (4)
한편 박국진은 얼굴이 상기된 채로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병원 사람 중 누구라도 이현종이나 신현태를 보며 빼도 박도 못하게 될 거 같아서였다.
물론 지금 상황이 이미 박국진은 인수분해 되어서 나가리 될 확률이 거의 확정적인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또 모를 일 아닌가.
박국진은 누가 뭐래도 칠성에서 큰 사람이었다.
게다가 인격적으로도 꽤 괜찮은 사람인지라, 심지어 뒤통수를 맞고 있는 와중에도 믿음의 끈을 놓지 못했다.
<병원 앞에 카페에서 뵙죠. 카페 이름은…… JC입니다.>
해서 문자를 보내 놨는데, 그걸 본 이현종은 당연히 화가 났다.
사실 박국진이 지금 뭘 한다 해도 화를 낼 준비가 딱 되어 있기는 했다.
“야, 이놈 봐? 병원에서는 안 된다 이거야?”
“왜, 형.”
“JC로 오라는데?”
“거기가 어딘데?”
“카페래.”
“뭔 카페가 JC야. 욕이야?”
“나도 모르지. 하여간 이놈 봐 이거. 얼마나 본격적으로 얘기를 하려고 카페로……. 우리 수혁이 빼돌릴라고, 이거.”
해서 이현종은 잔뜩 소리를 지른 후에야 문자를 보낼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화를 욕을 섞지 않고 품위 있게 드러낼 수 있을까 고민한 다음이었는데, 결과물은 다음과 같았다.
<바로 거기로 간다! 제이씨!>
알아듣기를 바랐으나 박국진은 이미 이현종과 신현태에게 감동한 지 오래였다.
‘진짜 열정적이시네……. 같은 학자다 이거지…….’
느낌표 하나마다 한 방울씩 눈물이 흘러나왔다.
“교수님, 어디 가세요?”
“어어. 잠깐.”
박국진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그런 박국진을 보며 교수 연구실 앞에 있던 비서는 쯔쯔 하고 혀를 찼다.
‘아이고……. 아닌 척하시더니 과장 잘리신 거 마음에 담아 두고 계셨구나.’
하긴 나이 50 넘으면 남는 게 자식 아니면 명예뿐이라는데 후자가 된통 날아가지 않았나.
내심 박국진이라는 사람을 존경하고 있던지라 안타까움이 더했다.
게다가 저 사람을 내치고 과장 자리에 오른 인간이 안국태다 보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안국태가 감히 박국진 교수님이 성희롱이나 다른 비리 저지른 거 없는지 알아보라고 했다지?’
박국진은 실력도 실력인데 고고한 생활로 더 유명한 사람 아닌가.
교수랍시고 꺼드럭거리는 사람 중에 사생활 지저분한 사람투성이라는 걸 비서 일을 하다 보면 알 수밖에 없었다.
박국진은 그중 군계일학 할 만큼 특별한 사람이었고, 안국태 또한 특별하긴 했는데 안 좋은 쪽으로였다.
‘세상일이 참……. 좋은 사람이 잘 되지가 않네.’
비서는 할 수만 있다면 안국태를 찌르고 싶었지만,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는 걸 알기에 그저 안타까워만 할 뿐이었다.
가뜩이나 내부 고발자에게 그리 호의적인 사회가 아니지 않나.
특히 칠성은 벌써 몇 번인가 다른 계열사에서라도 내부 고발자를 짓밟은 적이 있었다.
심지어 역고소를 해서 감방에 들어간 사람도 있었다.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그 누구도 함부로 윗선에서의 결정에 반기를 들기가 어려웠다.
칠성은 대기업으로서 얻은 힘과 지위를 마음껏 휘두르는 기업이었다.
끼이익.
한편 수혁은 나름 빠르게 달리고는 있으나, 애초에 안전 운행을 넘어 소심한 운전을 하는 편인 신현태를 애저녘에 앞지른 후였다.
해서 신현태가 도착하기 한참 전에 벌써 칠성 병원 로비에 닿았다.
“어, 여기 주차하시면 안 됩니다!”
당연하게도 시큐리티가 달려왔다.
[이현종 작전으로 갑니까?]
바루다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당황하기는커녕 작전부터 읊었다.
수혁도 마찬가지였다.
‘오케이.’
이미 대학 병원 의사로 살아온 지도 오래 아닌가.
급한 환자를 볼 의사 흉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게다가 지금 눈앞에 선 사람도 일반인이 아니라 병원 사람 아닌가.
아마 이런 의사를 한두 번 보는 건 아닐 터였다.
해서 수혁은 지금 자기 안 들어가면 환자 죽는다고 외치려고 숨을 들이쉬었다.
[잠깐 스톱.]
“지, 켁.”
그때 바루다가 말렸다.
덕분에 수혁은 사레가 걸려 콜록대기 시작했으나, 바루다에게 화가 나진 않았다.
바루다가 방금 확인한 박국진에 대한 영상을 재생해 주었기에 그랬다.
영상 속 박국진은 수혁이 차를 세운 쪽 바로 옆 출구를 통해 어디론가 황급히 걸어 나가고 있었다.
이 사람이 여기 없다면 굳이 시큐리티와 실랑이를 벌이고 안으로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잘못 알았네요. 죄송합니다.”
“네? 아, 네. 주차장은 저쪽입니다.”
시큐리티도 웬 진상인가 하다가 다행이란 얼굴로 주차장 쪽을 가리켰다.
하지만 수혁은 주차장으로 가는 대신 박국진의 뒤를 밟았다.
아마 보통 때 같았으면 박국진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 누가 붙었는지 정도는 알아차렸을 터였다.
수혁이나 바루다나 무슨 훈련이라도 받은 사람도 아닌데, 뭐 얼마나 조심을 하겠는가.
그냥 따라붙고 있었다.
‘이현종 교수님…….’
하지만 박국진은 요사이 제정신이 아닌 데다가, 이현종에게 걸려 온 전화가 너무 고마워서 오로지 먼저 가서 주문이라도 시켜야겠단 일념하에 거의 뛰고 있었다.
덕분에 수혁은 아주 편하게 박국진이 어디 카페에 들어가는지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끼이익.
하지만 바로 따라 들어갈 수는 없었다.
바로 앞에서 이현종과 신현태가 탄 차가 멈추어 서서였다.
아무리 느리다 해도 저쪽은 JC라는 곳을 알고 온 것이고, 수혁은 병원까지 갔다가 왔으니 늦는 것도 당연했다.
‘하이씨……. 이거 어쩌지?’
[일단 따라 들어가죠.]
‘하필 마지막 남은 자리에 대셨는데?’
[아, 주차…… 여기도 응급이라고 하면 안 됩니까?]
‘경찰서 갈걸.’
[그렇군요.]
수혁은 경찰서라는 얘기를 꺼내는데 태평한 바루다를 잠깐 흘겨보다가 차를 돌렸다.
태화 쪽은 도심에서 좀 떨어져 있는 편이라 뒷골목에 있는 먹자골목이라고 해도 자리가 꽤 많은데 칠성은 운이 좋은 건지 뭔지, 주변으로 개발이 많이 되어서 그런가 주차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미치겠네. 백 퍼 싸우고 있을 텐데.’
[그러니까요.]
그렇게 수혁이 길바닥에서 주차장을 찾아 헤매고 있는 사이, 이현종과 신현태는 씩씩대며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이 새끼 어딨어!”
“형형. 여기 사람 많아…….”
“어딨냐고!”
“형, 형.”
양복 입은 사람, 그것도 중년의 사내 둘이 카페에 들어오자마자 씩씩대고 있으니 카페 안에 있던 모든 이의 이목이 쏠렸다.
박국진은 예외였다.
그는 2층에 한적한 자리를 잡기 위해 올라갔기에 그랬다.
하여간 남의 업장에서 소란 피우는 꼴을 좋게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정말 무섭게 생긴 사람들이라면 종업원도 감히 다가갈 생각을 하는 대신 경찰을 부르든지 했겠지만 이 둘은 그렇지도 않았다.
아무리 성질을 부리고 있다 해도 좀 귀여운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저기요.”
“거봐, 형. 아이구, 죄송합니다.”
“네, 다른 분께 방해되니까요. 부탁드립니다.”
“네, 네.”
해서 당당하게 말을 꺼냈고 신현태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되어 고개를 조아렸다.
천성이 부드러운 데다가 평생 학자로 살아온 그에게 이런 일은 너무 버거웠다.
그에 반해 이현종은 딱히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어디 갔어, 이놈은?”
아까보단 작은 목소리였지만 전혀 눈에서 힘을 빼고 있진 않았다.
“2층에 있나? 아니면 안 왔나?”
“안 와? 엿 먹으라는 거야, 뭐야?”
“그건 좀 나도 화나는데?”
옆에서 적당히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면야 신현태도 그냥 그런갑다 할 텐데, 워낙에 화를 내고 있다 보니 조금은 영향을 받았다.
애초에 이현종은 신현태가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거니와 얼마간 닮고 싶어 하는 사람이기도 해서였다.
해서 이제 둘이서 씩씩대고 있으려니, 박국진이 진동이 울리는 판대기 하나를 들고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어, 원장님, 센터장님?”
평소 같았으면 그냥 교수님이었을 텐데 불러 줄 수도 있단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직함까지 붙여 불러 가면서였다.
이현종은 몰라도 신현태는 평소 상태였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을 테지만 지금은 덩달아 화가 난 상태라 반쯤 이성을 잃은 상황이었다.
“야, 너 우리가 모를 줄 알고?”
해서 소리를 질렀다.
원래 화를 내던 사람이었다면 놀랄 것도 없을 텐데, 신현태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보니 오히려 이현종이 좀 놀랐다.
“지금까지 조용히 하래 놓구선?”
“다 알고 계셨군요.”
놀랍게도 대화는 이어졌다.
박국진이 처연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었다.
신현태는 박국진이 심상찮은 얼굴로 음료를 받는 걸 보면서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설마 박국진 정도 되는 사람을 병원 차원에서 작업 쳐서 내보낼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다른 쪽으로만 생각이 틀어졌다.
“안 된다고 했어?”
해서 수혁이 안 된다고 했나?
하긴 당연한 일이지 라는 생각에 아까보다는 다소 풀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 그의 말에 박국진은 턱으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가리킨 후, 고개를 저었다.
“네? 어떻게 그럽니까……. 이미 다 결정한 건데요.”
“응?”
오해만으로 대화가 더 이어지기엔 이미 많이 이어져 온 참 아닌가.
양쪽 다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 때쯤, 수혁이 안으로 들어왔다.
헐떡이면서였다.
“아빠, 삼촌!”
박국진도 보긴 했지만, 가만히 뒀다간 사고 칠 것이 뻔한 둘부터 불렀다.
둘은 수혁을 돌아보자마자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수혁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수혁만 보면 조건 반사로 웃음이 나오는 몸들이 되어서였다.
“어, 어어.”
“네가 어떻게…… 설마.”
수혁은 그들이 쓸데없는 말을 하기 전에 거의 태클이라도 걸듯이 뛰어들었다.
‘김 교수님 감사합니다.’
[수술 잘됐네요.’]
잠깐이나마 뛸 수 있게 해 준 김선웅에게 감사를 표하면서였다.
하여간 제때 도달한 수혁은 빠르게 입을 열었다.
“박국진 교수님 칠성에서 작업당해서 내쫓기게 생겼어요. 그거 우리가 스카우트하면 어떻냐고 말하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아빠가 그냥 뛰어간 거예요.”
“엉? 스카우트를 우리가 해?”
“그렇다니까요?”
“아…….”
이현종은 허허 웃었다.
그러면 그렇지.
우리 수혁이가 스카우트를 받을 수는 있어도 그걸 고민할 리는 없지 않은가.
‘뭔 얘기를 저렇게 해?’
반면 박국진은 갑자기 뛰어 들어온 수혁과 그렇게 시작된 속삭임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현태나 이현종은 스카우트에 적합한 사람인데, 이수혁은 좀 애매하지 않나?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였다.
반면 오해가 완전히 풀린 신현태와 이현종은 이제 본인들이 저지른 짓을 수습하기 위해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다행한 일은 저쪽에서 딱히 뭘 알아차린 거 같진 않다는 것이었다.
아니, 알아서 편하게 해석해 준 거 같기도 했다.
“그래, 박 교수. 위에서 얘기나 할까? 요새 안 좋잖아.”
“아, 네. 이것 참…….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같이 환자 보는 처지에 돕고 사는 거지.”
나선 것은 이현종이었다.
그는 워낙 넉살도 좋고 뻔뻔해서 이럴 때 쓰임새가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