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화 반드시 되갚아 줘야겠는데? (1)
칠성한테 뭔가 해야겠단 생각은 비단 바루다만의 것은 아니었다.
이현종은 아예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개새끼들. 안국태 새끼.”
“확실하진 않아요, 교수님.”
“너는 확신하고 있지? 그렇지 않고서야 얘기할 리가 없잖아.”
“저는 정황상 가능성이 무척 크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왜냐면?”
“그 즘에…… 이미 바루다는 걱정할 거 없다는 뉘앙스로 제게 말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칠성에서도 이미 개발에 착수해서 성과가 있나 했는데…… 그 후에 터졌습니다. 당시에는 그걸 그렇게 연결 지을 생각을 못 했었는데 최근에 이런 일까지 당하다 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어서요.”
박국진이 이런 말을 했기 떄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진짜 맞는 말이긴 했다.
의사들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사람들 아닌가.
원래 좀 그런 사람들이 의대에 진학하기도 하거니와, 의대 교육을 받고 그 분위기 속에서 살다 보면 더더욱 그렇게 되기 마련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내과 의사들은 보수적인 사람들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심증만 있을 뿐이라…… 이걸 당장 공론화하긴 어려울 거 같은데……. 그렇지?”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칠성은 어느 정도 물증이 있는 사건들도 다 덮어 온 회사예요. 이걸로 턱도 없죠. 저는 물론이고 여기 세 분도 다칠 가능성이 있어요.”
“그래도 엿은 먹이고 싶은데.”
신현태 또한 이현종만큼은 아니더라도, 칠성에 원한을 갖게 되었다.
‘감히 우리 수혁이 다리를 다치게 해? 이 개자식들. 그래서 밖에 잘 못 나가니까 어? 연애도 더 못 하는 거 아냐.’
어쩌면 명예로운 죽음일 수도 있는 사안에 대해서도 이런 생각이 들어서 그랬다.
반면 바루다가 터져서 다리가 다치긴 했지만, 또 동시에 바루다를 얻게 된 수혁은 딱히 화가 난다기보다는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렇지 않나.
만약 바루다가 멀쩡했다면 수혁도 다리를 다치지 않았을 테지만 동시에 평이한 레지던트로 끝을 마무리했을 터였다.
그럼 지금쯤 교수가 되는 게 아니라 군의관으로 군대에 가 있을 게 분명했다.
지금 생활이 너무 만족스러운 수혁으로서는 당시 사건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잘된 일이 아닌가 싶었다.
[잘돼요? 수혁. 그렇게 안 봤는데 이제 보니 아주 뭐? 어? 호구네?]
‘호구라니 인마. 잘 생각해 봐. 너한테도 사실은 잘된 일이야.’
[뭐가 잘돼요. 멀쩡히 잘 있다가 터져서 쌓았던 데이터 다 날렸는데?]
‘너 솔직히 그때의 바루다를 생각해 봐라. 지금의 너랑 같다고 볼 수 있어?’
[당연히 같…… 같…….]
바루다는 그런 수혁에게 열변을 토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에 폭탄을 터뜨렸다는데 일이 이만치 됐으니 차라리 잘된 일 아닌가? 하는 놈이 미친놈 아니겠는가.
하지만 대화를 하다 보니까 또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제일 중요했다.
바루다는 지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음.]
‘그래, 너 그때는 별거 아니었어.’
[기분이 나쁘지만 사실이기는 하군요.]
확실히 수혁의 감각 수용체를 이용해 정보를 수집하다 보니, 지금까지 있어 왔던 인공지능하곤 차원이 다른 존재가 되기는 하지 않았나.
아마 앞으로도 수십 년 간은 지금의 바루다와 같은 존재가 나올 수 있을 거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예 놔두겠다는 건 아냐. 화가 그렇게까지 안 난다는 거지…….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그렇지. 그래야 내 수혁이지.]
‘근데 아직은 확실하지 않잖아. 박국진 교수님도 다 말뿐이야. 어쩌면…….’
[어쩌면?]
‘지금 병원에서 버림받게 생겨서 거짓말하는 걸 수도 있어.’
[흐음.]
수혁은 말을 마치고 박국진을 은근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차피 박국진은 지금 이현종을 말리고, 또 신현태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느라 수혁은 안중에도 없는 상황이라 비교적 오랫동안 관찰하는 게 가능했다.
사실 수혁이 보려고 하는 게 아니라 바루다에게 분석하라고 시선을 고정한 것이었는데, 바루다도 당연히 수혁의 의중을 파악한 지 오래라 계속해서 박국진의 표정과 목소리 톤 등을 분석했다.
[거짓말하는 거 같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박국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정황상 그렇다는 건데…….’
[그거 아니더라도 이번에 박국진이 과장에서 경질되고 이 지경까지 털린 걸 보십쇼. 칠성은 나쁜 놈들입니다.]
‘그러게. 게다가 우리랑 협약 추진하려다가 이렇게 된 거 아냐?’
[그렇죠.]
‘개새끼들.’
박국진이 적어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란 생각이 들자 비로소 수혁도 화가 좀 나기 시작했다.
때마침 그때 신현태가 손을 털고는 화제를 돌렸다.
“하여간……. 이 얘기는 나중에 좀 더 안전한 장소에서 더 나누도록 하고. 오늘 우리가 온 건…….”
그러면서 이현종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현종은 스카우트 제의를 하러 온 게 아니라, 수혁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했으리라 의심했던 박국진을 처단하기 위해 온 것이었으나 아까 말을 맞춘 대로 허허 하고 웃었다.
제아무리 제멋대로 행동하는 천방지축이라고 해도 뭐가 되었건 간에 태화 의료원처럼 거대한 조직에서 무려 원장까지 해 먹었던 사람다운 반응이었다.
“그래, 우리 박국진 교수…… 칠성에서 그렇게 나오는 건 유감이지만, 계속 유감이라고 생각하면 뭐 하겠어. 앞으로가 더 중요하지. 앞길이 창창한데.”
“아……. 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단 원장으로서 개런티 할 수 있는 건 최소한 칠성에서 받았던 대우 정도는 우리 태화에서도 해 줄 거란 거야. 아니지. 아냐. 나뿐만이 아니라 여기 계신 이현종 교수님도 그럴 거야.”
“어어. 너 심장이잖아. 심장 애들은 내 말이면 껌뻑 죽거든.”
“아이고……. 정말 감사합니다.”
확실히 신현태와 이현종의 말에는 무게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병원에서의 일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던 박국진은 정말로 둘의 입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나오자 거의 허물어지듯 의자에 기댔다.
순간 실신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조금은 민망해하는 것이 느껴졌는데, 지금이 나설 때라고 수혁은 판단했다.
“박국진 교수님이 와 주시면 저희도 좋죠. 그렇지 않아도 교수님 명성이 주니어들이나 레지던트들 사이에서 대단합니다. 심장 내과 학술이사 하시면서 워낙 강의도 잘해 주셨고요.”
솔직히 말하면 여기서 사실인 것은 박국진이 심장 내과학회에서 학술이사 했다는 것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수혁은 주니어 스탭들, 그러니까 조교수들과 교류가 거의 없었다.
조교수라도 되려면 내과에서는 최소 삼십 대 중반에서 후반은 되어야 하는데 수혁은 기껏해야 서른 아닌가.
다 같은 조교수죠 하면서 친하게 지내는 건 좀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레지던트들은 애초에 학회에서 하는 강의가 다 지겨운 사람들이었다.
일하는 것도 바빠 죽겠는데 모처럼 맞이하는 주말에 끌려가서 듣는 강의가 좋으면 뭐 얼마나 좋겠나.
그저 근무의 연장선이라고만 느껴질 뿐이었다.
“아이고……. 과찬이네. 이수혁 교수가 그런 말을 하다니. 우리 쪽에선 이수혁 교수가 아이돌이야, 아이돌.”
그러니까 다분히 빈말이었다는 건데 박국진은 다큐로 받아들였다.
교수들 성향을 생각해 보면 무리도 아니었다.
다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나르시시즘이 있었다.
원래 내가 최고라는 생각이 없이는 경제적 보상이 별로 없는 대학 병원에서 제 살 깎아 먹어 가며 최선을 다하기가 어렵지 않겠나.
[예상대로군요. 박국진도 결국, 평범한 교수입니다.]
‘그러게. 너무 쉽네.’
그래도 이현종이었으면 좀 다른 반응을 보여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이 양반은 싱거울 지경이었다.
“그래, 병원에서 어찌 나오건 걱정은 말고. 다만…….”
“네, 원장님.”
“칠성에서 정말로 행동하기 전에 나와. 이미 낙인이 찍혀 버리면, 나도 교수 회의에서 설득이 어려워져. 알지? 교수 사회가 얼마나 보수적인지.”
“알죠. 알죠.”
그렇다 보니 대화는 일사천리였다.
본격적으로 말이 나온 지가 이제 겨우 10분이나 됐나 싶을 무렵에 벌써 박국진은 신현태를 원장님이라 진심을 다해 부르고 있었다.
이대로 연구실 들어가서 바로 지원서라도 쓸 기세였다.
“그래, 그럼 바로 보내라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명함에 있는 메일로 보내면 될까요?”
“어……. 그래. 근데 나한테만 보내지는 말고, 인사부장이랑 기조실장이랑 과장님 메일 다 알려 줄 테니까 싹 보내.”
“알겠습니다.”
실제로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신현태의 말처럼 칠성에서 뭔가 박국진에게 낙인을 찍고 나면, 박국진은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 버릴 터였다.
의사 사회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무척 좁았고,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제일 보수적인 사회였기 때문이었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 은혜는 정말…… 잊지 않겠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구원을 받은 셈이었다.
박국진은 울먹이면서 병원으로 돌아갔다.
원래 이럴려고 온 게 아니었던 신현태와 이현종은 조금 민망해졌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허허 웃기만 했다.
정말이지 사람 좋은 미소여서 박국진은 일말의 의심도 품지 못했다.
“음.”
“으음.”
“아니, 알아보지도 않고 차를 몰아요? 저 없었으면 거하게 사고 칠 뻔했네.”
그렇게 셋이 남자마자 수혁은 둘을 향해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수혁이 조금만 더 늦었으면 박국진은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사람이 될 뻔했다.
그렇지 않아도 병원에서도 음모에 당했는데 여기서까지 그랬으면 어쩌면 지금쯤 고인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생각보다 박국진처럼 평탄한 삶을 살아온 사람은 작은 고난에도 버티지 못하는 법이었으니까.
“아니, 나는…… 칠성이 또 수작질을 하나 했지.”
“나는 너네 아빠한테 그렇게 들었을 뿐이야.”
“와, 여기서 내 핑계를 대?”
“아까 형이 그랬잖아요. 칠성이 수혁이 빼 가려고 한다고. 내가 안 그랬으면 미쳤다고 여기까지 와?”
“와…….”
“와는 무슨. 억울한 표정 지어 봐야 소용없어요.”
수혁의 핀단을 들은 둘은 애들처럼 투닥댔다.
별 의미 없는 대화의 연속이라고 보면 되었다.
서로 네 탓이라는 얘기만 하고 있었으니까.
[슬슬 정리하시죠.]
‘아니……. 아까는 그렇게 생산적으로 말을 잘하더니 지금은 왜 이래?’
[원래 수혁만 있으면 바보가 되더군요. 특별한 일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왜 그러냐고.’
[저야 모르죠. 알 바도 아닙니다.]
‘냉정한 새끼.’
수혁은 바루다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은 후, 입을 열었다.
“일단 사고는 안 치셨으니까 넘어가요. 박국진 교수님 얘기하죠. 그게 중요하니까.”
“아아, 그래.”
“뭐……. 오면 좋지. 안됐기도 하고…… 또 박국진 교수 파가 있어. 소수지만…… 충심으로 똘똘 뭉쳤을 거야.”
“같이 오는 건 좀 그렇죠?”
“그럴 이유는 없지. 박국진이 불러 모은 애들이긴 한데, 그 정도 애들은 우리 병원에도 차고 넘쳐. 차라리 그냥 두고 프락치로 삼는 게 낫지.”
“형은 그놈의 프락치 얘기 좀 그만해.”
“왜 인마. 아까 못 들었어? 바루다 터뜨렸을 수도 있다잖아. 그거 진상 밝혀야지.”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