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533화 (533/1,303)

533화 반드시 되갚아 줘야겠는데? (3)

신현태는 때아닌 집안 자랑에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아예 잊은 건 아니고, 사실 하고픈 말이 하나 있기는 했다.

‘형, 어쩌면 형 상놈 출신일 수도 있어.’

그렇잖은가.

애초에 조선에서 양반이 차지하던 비중이 인구의 1% 정도였고, 아무리 후기로 간다고 해 봐야 10%도 안 됐는데 21세기에 들어서는 100% 양반이다?

신현태는 다들 족보 산 게 오래돼서 뿌리를 잊은 거라 여겼다.

전생 체험했을 때 필시 농부 했을 사람들이 왕족이었네, 양반이었네 하는 거랑 같은 이치라고 할까?

“새끼, 너 무슨 신씨라고? 고령이었나? 나쁘지는 않은데…… 그래도 사육신 이개를 배출한 우리 집안에는 안 되지.”

신현태는 자기 속도 모르고 나불거리는 이현종을 보며 정말이지 어렵게 참았다.

‘족보 샀을 거 같은데.’

사실 신현태는 그럴 거라는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진짜 한산 이씨들은 좀 몸이 약하다는 기록이 온갖 사서에 있지 않나.

사육신 이개도 사육신 중 가장 몸이 약해서 본격적인 고문이 시작되기 전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한데 이현종은 아주 건장한 체구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이치고는 강건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젊을 때도 그랬는데 딱히 열심히 운동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일단 발이 컸다.

‘저게 옛날 같으면 상놈 발이지.’

이장곤의 얘기도 있지 않나.

한창 연산군에게 쫓겨 다니다가 지쳐서 나무 아래 잘 때, 지나던 포졸들이 이장곤 발이 큰 것을 보고 저런 양반은 없을 거라고 그냥 지나갔다는.

그만큼 발 큰 양반은 적다는 건데, 한산 이씨는 그중에서도 특히 조막발이었다.

“뭘 그렇게 봐?”

“아니, 아녜요.”

그 말은 곧 이현종은 상놈일 거란 얘기였다.

사실 이것도 다 신현태의 추론일 뿐이고, 진실이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였으나 신현태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이현종이 했던 집안 어쩌구 하는 얘기들이 그리 불편하게 들리지 않았다.

어느 양반댁 마름이 우리 주인님 집안은 이렇다 저렇다라고 하는 것처럼 들려서였다.

“말해요?”

하여간 수혁도 귀가 있는지라 이현종의 의견을 듣기는 한 참이었다.

[그게 좋죠. 의사 셋이 골머리 썩을 거 뭐 있습니까? 우리는 진료해야지, 이런 음모론에 빠질 시간이 없습니다.]

‘그건 의원님도 마찬가진데?’

[우리가 알 바예요?]

‘하긴 우리가 신경 쓸 이유가 없긴 하네.’

게다가 수혁은 바루다와의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 결론도 내린 상황이었다.

‘음. 우리 수혁이가 말하길 원하는구나. 누가 부자지간 아니랄까 봐……. 한산 이씨 부심이 있다 이거지? 아니, 아닌데. 진짜 부자지간은 아닌데?’

신현태는 그런 수혁의 속내를 비상한 눈치로 꿰뚫어 보았다.

원장이 되었을 만큼 노회한 사람이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수혁에게 워낙에 관심이 많아서였다.

“그래, 해 보자.”

“응. 우리 집안사람은 믿을 만하지.”

해서 신현태도 동의를 했고, 이현종이야 처음부터 자기가 꺼낸 말이니만큼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저, 의원님. 근데 하나 요청드릴 일이 있어서요.”

“그래요? 좋습니다. 들어 보죠. 이번에 도움 드리려다가 일이 이렇게 돼서……. 안 그래도 좀 그랬어요.”

“네. 혹시 저희 병원에서 전자와 함께 개발 중이던 바루다라는 인공지능 기기를 알고 계시나요?”

“바루다? 죄송합니다. 제가 의료 쪽에는 문외한이라서요.”

바루다는 이기원이 바루다를 모른다고 하자마자 발작했다.

[이 무식한……! 한산 이씨, 한산 이씨 하더니 완전 허당이네!]

수혁은 그런 바루다를 무시하기로 했다.

모를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솔직히 바루다가 이슈가 되었던 건 의료계 내에서의 일일 뿐, 밖에서는 별 관심도 없었다.

호사가들이야 이제 저거 완성되면 의사 끝이다라는 말까지 꺼냈다고 하는데 기술이라는 게 그렇게까지 퀀텀 점프하지 못한다는 걸 아는 대다수 이들은 지켜보자 정도에 그친 탓이었다.

그러다가 아예 터져서 폐기되어 버렸으니 지금껏 그 이름을 기억하는 게 사실 더 이상했다.

“미국의 왓슨은 혹시 아시나요?”

“그건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왓슨은 좀 얘기가 달랐다.

최초의 인공지능이었던 데다가, 당시만 해도 인공지능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 속에 일정 부분 과학이 아닌 마법 같은 환상이 강하게 끼어들어 가 있던 터라 확 유명세를 끌어서였다.

[아니, 왓슨은 안다고? 나는 모르고?]

‘이건 좀 억울할 만하다, 인정.’

그렇다고 왓슨이 딱히 바루다보다 우월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미국의 한 병원의 프로토콜을 배웠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인데, 그게 무슨 장점은 아니지 않나.

“그런 거랑 비슷한 거라고 보면 됩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거기는 대학 병원에서 펀딩을 받아서 개발하던 거였고, 바루다는 아예 태화 전자에서 주도적으로 병원과 개발했던 거라……. 제 생각에는 이쪽이 더 유망했습니다. 실제로 의료계에서는 우려 반 기대 반이었고요.”

“음. 근데 저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상하네요. 그래도 저희 어머님 증상 심해지고부터는 꽤 이쪽으로 관심이 있었는데.”

“그게…… 4년 전에 터져 버렸습니다. 제가 마침 그때 1년 차로 들어가서 시연하는 거 보고 있었는데, 터져 버리는 바람에 다리를 다쳤죠.”

“아, 아……. 그럼 다리를…… 아, 그렇구나. 미처 몰랐습니다. 유감입니다.”

원래 누구라도 자기 다쳤던 얘기를 하면, 듣는 사람은 자기가 딱히 잘못한 것이 없더라도 황송해지기 마련이었다.

이기원은 수혁에게 부채감도 있고 호감도 있던 터라 그 정도가 더했다.

“아닙니다, 오래된 일인걸요.”

“음, 그렇군요. 그래도…… 아, 근데 이 얘기를 저에게 하시는 이유가……?”

“박국진 교수님께 이상한 얘기를 들어서요.”

“이상한 얘기?”

이기원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국진이 자기한테도 이상한 얘기를 하지 않았던가.

병원에서 음모를 꾸며서 아무 잘못도 없는 자신을 내치려고 한다는.

처음엔 진짜 개소리라고만 생각했다.

원래 죄지은 놈 중에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라고 하는 놈이 없어서였다.

어찌 된 게 정말 하나같이 그랬어서, 이기원은 박국진도 그랬을 거라 믿었더랬다.

‘근데 아니었지.’

한데 충격적이게도 정말 그의 말이 맞았다.

칠성 병원은 병원임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 되는 음모를 꾸며 박국진을 내치려 하고 있었다.

아니, 필시 그렇게 될 게 뻔했다.

그런 식으로 안 좋게 병원에서 내쫓기게 되면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알면서도 그랬다.

이런 일이 있었다 보니 이기원은 수혁의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이게 됐다.

“네, 바루다 폭발에 칠성이 관여했다는 건데요.”

“네에?”

한데 이건 좀 너무 나간 거 아닌가 싶었다.

전에 박국진이 했던 말이 옳았다는 걸 직접 정보를 캐서 알아냈음에도 그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세상에 어떤 병원이 남의 병원에서 개발 중인 기기를 폭탄으로 터뜨릴 생각을 한단 말인가.

아마 그런 일은 전무후무할 터였다.

비단 우리나라에서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그럴 거 같았다.

“저도 좀 이상하다 싶은데. 원래 바루다 개발 당시에 특히 빅3에서 우려가 컸거든요. 그럴 수밖에 없죠. 셋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데 바루다라는 인공지능 의료 진단기기가 두각을 나타내면 태화가 확 앞서 나갈 테니까요.“’

“음, 뭐 그건 그럴 수 있겠죠.”

“그래서 칠성에서 대책 회의라는 걸 열었는데……. 마지막 회의가 열리기 전에 벌써 박국진 교수님이 이런 얘기를 전해 들었다고 합니다.”

“어떤?”

“이제 바루다는 신경 쓸 필요 없다, 뭐 이런 식으로요. 그리고 마지막 회의는 박 교수님이 알기로 병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하고……. 그 직후에 바루다가 터졌습니다.”

“아……. 공교롭기는 한데…….”

“그 이후 검토해 보니까 칠성 측 언론에서 바루다를 맹폭해서 지금까지도 프로젝트 중단입니다.”

“흐음.”

칠성이라.

이기원은 저도 모르게 기업 이름을 되뇌었다.

정말 이기기 위해서라면 별짓 다 하는 기업이기는 했다.

작게는 표절을 했고, 크게는 공작까지 했다.

정부라고 모르는 건 아닌데 칠성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는 자리를 못 잡은 다국적 기업들이 적지 않다 보니 그냥 두고 보고 있었다.

규제니 뭐니 해서 막으면 WTO에서 이제 개발도상국도 아닌데 니네 뭐 하냐는 소리 들을 게 뻔한데 알아서 막아 내니 어찌 보면 좋은 일 아닌가.

하지만 국내 기업들끼리 제 살 깎아 먹기 하는 경우도 적지 않고 또 중소기업을 이런 식으로 뽑아 먹는 경우도 많아서 한번 건드릴 생각이 있었다.

“뭐 어떻게 해 달라는 건 아니고요. 한번…… 진상 파악만 해 주십사 말씀드렸습니다.”

수혁은 이기원이 지금 뭔가 고민 중인데 부정적인 방향은 아닌 거 같다는 바루다의 조언에 힘입어 이렇게 말을 마쳤다.

지나친 요구 같지는 않았다.

수혁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고 이기원도 그렇게 여겼다.

애초에 부탁 하나를 들어주겠다 해 놓고 일이 어그러진 마당 아닌가.

이걸로 칠성을 어떻게 해 달라고 하면 그건 너무 지나친 건데, 그냥 어떻게 된 건지 알아봐 달라고 하는 거 정도는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알겠습니다. 알아보죠.”

“감사합니다.”

“뭘요. 하하. 뭔가 알아내는 거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이기원도 바쁜 몸이다 보니 용건이 끝나자 곧 전화를 끊었다.

수혁도 배도 고프고 하던 참이라 미련 없이 끊고는 나머지 둘을 돌아보았다.

이미 대화를 옆에서 다 들어서 다른 부연 설명은 필요 없을 거라 여겼다.

게다가 이 둘도 천성이 의사라 계속 이런 얘기 나누는 것도 원하지는 않을 터였다.

“이제 뭐 먹을까요? 치킨?”

“좋지.”

“치킨은 언제나 정답이지.”

해서 바로 치킨 시키는 것으로 주제가 옮겨 갔다.

아니, 그건 아주 잠깐이었고 자연스레 환자 얘기가 나왔다.

놀랍게도 신현태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아, 근데…… 환자 중에 좀 어려운 환자가 있었어.”

“응? 그래요? 삼촌 요새 외래 확 줄여서 환자도 적지 않아요?”

“그렇지. 근데 그만큼 어려운 환자가 몰려서.”

“아……. 그럼 저희한테 말씀하시지.”

“하하, 나도 인마 명색이 감염내과 교순데 혼자서 볼 수 있지. 어떤 환자였냐면.”

처음엔 어려운 환자 있어서 도와달라는 건 줄 알았더니만, 듣다 보니 자기 자랑이었다.

수혁이야 이런 얘기도 환영이었다.

본질이 자랑에 있건 어디에 있건 간에 이만한 대가에게 듣는 환자 얘기엔 언제나 배울 점이 있어서 그랬다.

“아, 또 자랑이네.”

하지만 평생을 거의 자랑하면서 살아온 이현종은 이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해서 여러 번 딴지를 걸었는데, 별로 효과는 없었다.

신현태는 이미 뼛속 깊이 이현종에게 단련되었기 때문이었다.

수혁도 이럴 땐 그냥 무시하는 게 답이란 걸 알아서 대꾸도 해 주지 않았다.

해서 치킨 만찬은 꽤 평화롭게 마무리되었고, 신현태는 실로 오랜만에 푸근한 마음을 안고 퇴근할 수 있었다.

‘수혁이랑 치킨도 먹고, 얘기도 많이 했고.’

뭔가 롱디 하는 애인과 데이트라도 한 것처럼 후련하다고 해야 할까?

이대로라면 힘내서 내일 하루도 일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아니, 잘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딱 출근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음, 이게 대체 뭔 환자냐?”

하지만 딱 병동에 나가자마자 생전 처음 보는 증세를 마주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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