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541화 (541/1,303)

541화 싱가포르행 (1)

환자는 항말라리아 약제를 쓰자마자 훅훅 좋아지기 시작했다.

운이 좋았다고도 볼 수 있었다.

뭐가 어찌 되었건 한국에서 호발하는 삼일열 말라리아를 일으키는 원충인 vivax는 약제 내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매년 동남아나 남미 등지에서는 이놈의 말라리아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는 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복 받은 나라라 할 수 있었다.

“이제 곧 일반 병실 가면 되겠더라고.”

신현태는 아까 회진 돌고 온 감상을 떠들었다.

이현종이 쓰던 때와는 달리 깔끔하기 이를 데 없어진 원장실에 앉은 채였다.

어째 원장일 때보다 이곳에 더 자주 출몰하게 된 이현종이 그 옆에 앉고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럼, 누가 진단한 건데.”

“우리 수혁이가 정말 장한 일을 해 줬지.”

약간 맥락에 벗어난 말 같았다.

환자 좋아져서 좋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수혁 칭찬으로 커브를 돈다고?

하지만 신현태는 어떤 주제에서든지 수혁을 칭찬할 수 있는 사람이 된 지 오래였기에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왜 나는 먼저 그 얘기부터 꺼내지 못했나 하는 죄책감만 느꼈다.

해서 열나게 맞장구를 치다가 나 잘했지 하는 얼굴로 반대편에 앉은 인물을 돌아보았다.

“하.”

수혁이었다.

수혁은 나이 지긋한 교수들의 애정 어린 시선을 받다가 이내 화제를 돌리기로 결심했다.

칭찬받는 일은 언제고 기분이 좋은 일이지만 이렇게 아무 때나 전에 했던 일로 무한 칭찬을 듣다 보면 지겨워지기도 하기 마련 아닌가.

게다가 애초에 오늘 여기에 모인 건 아예 다른 일 때문이었다.

“근데 저 싱가포르는 그럼 언제 가는 거죠?”

싱가포르 병원에서 수혁이 보여 주었던 어마어마한 활약에 힘입어, 태화 바이오가 추진하고 태화 국제 진료소 및 그에 딸린 연구소 설립이 탄력을 받았다.

일단 수혁이 거기서 뒷배로 만든 리홍이가 거물인 데다가 싱가포르 최고 병원의 지지까지 받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잠깐.”

하여간 중요한 일이라 얘기를 꺼냈더니 잠자코 듣고 있던 조태진이 손을 들었다.

진중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이었는데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또한 혈액종양내과 의사로서 압도적인 실력을 뽐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 꽤 중요한 논문을 써냄으로써 싱가포르에 같이 가게 된 인물 중 하나이지 않나.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주 중요한 이유일 거 같군요.]

바루다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분석한 결과 조태진은 진심 중의 진심이라는 것이었다.

해서 잠시 입을 다물고 뭔 소리를 하려나 하고 조태진을 돌아보았다.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명색이 그래도 부교수라는 사람이 저렇게 무게를 잡았는데 들어 줘야 하지 않겠나.

“나만 못했잖아, 칭찬. 우리 수혁이 정말 잘했다. 네 덕에 환자 살았어. 그래서 말인데…… 이거.”

“이 미친놈이.”

“야, 뇌물이야? 우리 병원에 스벅 있지도 않은데 그 카드는 왜 줘?”

“교순데 병원에서만 커피 먹어요? 주말에는 나가서 먹고 그래야지. 안 그래?”

“아니.”

“와…….”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조태진은 역시 제정신이 아닌 인간이었음만을 증명했다.

[또라이네.]

심지어 수혁을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는 꽤 관용이 넘치는 바루다마저 욕을 해 댔다.

해서 수혁은 그를 무시하기로 작정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하여간 싱가포르 말이에요. 저까지 누구누구 가죠?”

“나, 나!”

“음……. 너랑 조태진 교수랑…… 정형외과 김선웅 알지? 그 친구랑 저기 어디야. 신경외과 최낙필이 하고 영상의학과 김진실 그리고 기조실장 홍창기가 가지.”

중간에 조태진이 또 신나서 끼어들었지만, 다행히 수혁과 신현태는 이현종 덕에 대화할 때 누구 없는 사람이라 치고 말을 이어 나가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이었다.

사실 조태진이 아무리 제정신 아닌 것 같은 모습을 보인다 해도 이현종만큼은 아니지 않나.

아무리 날뛰어 봐야 이놈은 범인이었다.

불세출의 기인 이현종의 범주에는 들지 못했다.

“의사들은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가는 거죠?”

“어? 어어. 당연하지. 거기 그게 보통 일이 아니라……. 태화 바이오랑 생명에서도 가고 우리 병원 측에서도 가지. 그래서 의료진 일정 자체는 아주 바쁘진 않을걸? 여유가 좀 있을 거야.”

“나랑 놀자! 나랑! 내가 싱가포르 어디가 맛집인지…….”

“그럼 가는 김에 리홍이 의원하고도 따로 약속을 잡아 봐야겠네요.”

“그래, 그럼 좋지. 다만 워낙에 실권자다 보니까……. 어쩌면 청탁으로 보일 수도 있어. 최대한 그런 느낌 안 나게 해 줘.”

“점보 식당이랑 팀호완이랑 어?”

수혁은 조태진의 말은 무시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리홍이는 너무 높은 사람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글쎄 누구 정도가 될까.

이기원?

[그러고 보니 이기원 의원 그거 어떻게 됐습니까?]

‘뭐, 칠성?’

[네. 칠성 타도해야죠.]

‘음……. 그러게. 어찌 됐지?’

의식의 흐름에 따라 이기원을 떠올린 수혁은, 조금 뜬금없다고 느끼긴 했으나 어차피 방 안에 그때 갔던 사람들밖에 없다고 여겨서 그냥 입을 열었다.

물론 조태진은 그때 없기는 했지만, 이 인간이 수혁 앞에서나 이러지 남들 앞에서는 또 멀쩡한 사람이지 않나.

설마하니 여기서 있었던 얘기를 밖에 나가서 떠들 리는 없을 터였다.

“아, 근데 혹시 이기원 의원님한테 그 후로 뭐 연락 온 건 없으셨어요?”

“응? 아……. 그건 네 아빠가.”

싱가포르 얘기하다가 갑자기 이기원 의원이라니.

어른들이랑 얘기하면서 너무 사고의 흐름대로 얘기하는 거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신현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수혁이와 대화를 하고 있는 지금이 좋았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말을 받았고, 이제는 이현종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현종이야 원래 사고의 흐름이 남들보다 워낙 빠른 탓에 대화가 중구난방으로 튀는 사람이다 보니 별생각 없이 답을 해 주었다.

“안 그래도 연락 한번 오기는 했지. 근데…… 이건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나 봐. 근데 확실히 그날 원래 내근직인 사람 몇몇이 휴가도 아닌데 회사에 없었다는 것까지는 알아냈대.”

“아…… 이거 설마 진짜?”

“근데 내부인도 잘 모르는 일이라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고 하더라. 하여간 뭐가 나오기는 해서 더 알아본다고 했어. 이런 건 그 사람이 우리보다 훨씬 낫겄지.”

“아, 뭐 그렇죠. 우리야 아예 방법이 없죠.”

“응. 프락치한테도 물어봤는데 뭐 전혀 몰라. 박국진만큼도 모르더라.”

“그렇구나. 어, 음식 왔나 본데요?”

수혁은 얘기를 하다 말고 폰을 내려다보았다.

날이 가면 갈수록 발달하는 것이 배달 시장 아닌가.

이제는 어지간한 맛집은 다 배달이 된다고 보면 되었다.

심지어 이현종이 맛있다고 한 la 갈비조차 배달이 된다고 해서 이번에 시킨 참이었다.

해서 몸을 일으키려니, 옆에 있던 조태진이 손사래를 쳤다.

“어허, 어허. 수혁아 너는 앉어 있어. 내가 다녀올게.”

“네? 아니 제가 제일 어리고…… 또 제가 시켰는데.”

“아냐, 아냐. 쉬고 있어. 내가 다녀올 테니까. 거기 앉아서 아, 내가 조태진 형이랑 다니면 계속 이렇게 편하겠구나. 뭐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으라고.”

그리곤 이상한 말을 남기곤 후다닥 달려 나갔다.

신현태는 그런 조태진의 뒷모습을 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방금 얘기 어디 가서 털어놓지는 않겠지?”

조태진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사실 저 녀석이랑 친해진 게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지 않나.

친해지게 된 계기도 그냥 수혁이었다.

다들 수혁이를 좋아하니까, 그 마음 하나로 가까이 지내게 된 것일 뿐이었다.

그의 걱정스러운 말에 이현종이 후후 하고 웃었다.

“뭔 소리야 인마. 너 쟤 다 알아보고 친하게 지내는 거 아니었어?”

“응? 무슨 소리야?”

신현태는 이현종의 웃음에 무언가 숨겨진 뜻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인간은 거의 항상 느슨한 사람이지만, 알게 모르게 철저한 데가 있지 않나.

특히 자기 사람 고를 때 그랬다.

한번 마음에 들면 전폭적으로 밀어준다는 것만 알려져 있는데, 사실 신현태가 알기로 이현종 마음에 드는 일 자체가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었다.

“뭐야 이거. 원장씩이나 돼 가지고 아무나 심복 행세하게 뒀어?”

“아니……. 나는 그냥 수혁이 팬클럽 같은 느낌이지, 이건.”

“뭔 미친 소리야, 너 프락치가 와서 저 수혁이 좋습니다 하면 받아 줄 생각이야?”

“그.”

이현종의 말에 신현태는 그야말로 정곡을 찔린 기분이 들었다.

솔직한 얘기로 조태진과 친해진 건 순 수혁이 때문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거 결재해 준 거 들키면 진짜 한 소리 듣겠는데…….’

현재 병원 내부에서 제일 떠들썩한 사모임인 수혁바라기에 관한 일이었다.

소문이 그토록 무성한 동호회는 아마 태화 역사상 전무후무할 터였다.

어떤 이는 조심스레 찾아와서 병원에 사이비 종교가 있으니 척결하라는 얘기까지 들려주었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신현태는 정말이지 수혁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안대훈과 우하윤을 이뻐했고, 이 모임 자체도 문제없다고 여겨서 매주 목요일 오후 7시부 9시까지 지하 7층에 있는 gx룸 사용 권한과 활동에 필요한 지원 자금을 월 100만 원 지원해 주는 데 서명한 참이었다.

해서 보다 더 조용히 있으려니 이현종이 신현태를 보면서 혀를 츠츠 찼다.

“하여간 이거. 아이고, 이 화상 이거.”

그렇게 한참 혀를 차던 이현종은 다시금 조태진이 나간 곳을 돌아보았다.

“쟤는 신원이 더없이 확실하잖아. 장인은 3선 의원. 이제 4선 준비하지? 하필 여당이고 이기원 의원 오른팔이야. 그리고 아버지는 태화맨 아냐. 태화 상사에서 잔뼈가 굵은. 그리고 조태진 본인도 태화에 대해 충성심이 있고.”

“오……. 근데 충성심은 어떻게 판단해?”

“주식.”

“응?”

“태화 생명이랑 바이오하고 전자에 주식이 많어, 쟤.”

“아니, 그걸 어떻게…….”

신현태는 이 양반이 나 모르게 흥신소라도 하나 하는 얼굴로 이현종을 바라보았다.

이현종은 그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혀를 다시금 찼다.

“그러고 보니까 너는 주식 진짜 시늉으로만 들고 있더라? 수혁이는 인마 연봉 거의 다 붓는 거 같은데. 자기 로열티랑.”

“아니,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주총 편지 보내잖아, 배당일에.”

“어……. 그렇지?”

“내가 주요 계열사에는 얘기해 놨지, 원장 시절에. 우리 병원 사람 명단 있으면 나한테 엑셀 파일로 보내 달라고. 그게 충성심 판단하는 데 최고의 지표야.”

“와. 이 사람 이거.”

신현태는 역시 이현종이 이러니저러니 해도 형은 형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치밀한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고 있을 줄이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똑똑한 판단 방식인 거 같았다.

설마하니 태화 주식을 왕창 들고 있는 놈이 라이벌에 도움 줄 일을 하진 않을 거 아닌가.

“하여간 수혁아 너도 태진이는 믿어도 돼.”

“네.”

“근데…….”

“네?”

“너무 가까이 지내지는 말고. 애가 좀 이상해졌어. 믿을 수 있는 거랑은 별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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