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542화 (542/1,303)

542화 싱가포르행 (2)

레지던트 때와는 달리 교수가 되고 보니 출장 관련해서 받는 휴가 심의는 간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선 누군가랑 일정을 조율할 필요도 없었다.

바로 윗사람하고만 얘기하면 됐는데 그게 이현종이었다.

“넉넉하게 금요일에 일찍 나가서 그 담주 일요일에 와.”

“네? 일정이 월화수던데요?”

“내가 보니까 목금에 거기 학회 하나 있더라. 그거 듣는다고 하고 사진만 하나 찍어 와. 나머지는 내가 다 카바 쳐 줄게.”

“그래도 되나…….”

“그래도 되냐니. 원래 학회 가면 공부도 하지만 놀기도 하는 거야. 근데 이건 출장이잖아. 출장은 노는 거지.”

“음.”

심지어 이현종은 출장과 같은, 뭔가 의학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이는 업무에 대해 굉장히 왜곡된 시선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굳이 할 필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할까?

하여간 이번 출장을 거의 휴가라고 잠정적으로 확정해 버린 모양새였다.

“아니, 근데 다른 사람들도 가긴 가는데…….”

“같이 학회 갈 건 아니잖아. 온 김에 학회도 간다고 해.”

“그럼 다 놀려고 남는구나 하고 의심하지 않을까요?”

“누가? 너를? 감히?”

이현종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 된 수혁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바라보았다.

어떤 새낀지 말만 하면 두들겨 패 주겠다 뭐 이런 얼굴이었다.

“그…….”

“혹시 누가 딴소리할 거 걱정되면…… 음.”

“뭐 해요?”

“아, 이거. 거기 주손데 네가 학회 발표한다고 하면 받아 줄 거야. 추천인에 내가 서명할게.”

“뭔 학횐데요?”

“심장.”

“아.”

심장 학회라면 이현종 이름이 거의 무슨 백지수표처럼 쓰일 터였다.

이 인간은 괴물이지 않나.

월드 스타 이현종이 보증하는 사람은 그 비슷한 사람으로 인식될 것이 뻔했다.

게다가 수혁 자체도 이제 싱가포르 내에서 완전 무명은 아니었다.

“어때? 낼래? 그럼 아무도 뭐라 못 하지.”

“그렇죠. 알았어요.”

“뭐 쓸 건 있어?”

“대강 생각하다 보면 나올 거 같아요.”

“그래, 이게 뭐 막말로 엄청 대단한 학회도 아니고……. 그냥 가르쳐 주러 갔다 와.”

그렇게 학회에 초록 내기로 결정 내린 둘은 이제 말도 안 되는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학회 초록 내는 일을 무슨 동네 짬뽕 시키는 느낌으로 얘기하고 있지 않나.

아마 신현태가 이 대화를 들었다면 이 망할 천재 새끼들이라고 하면서 난입할 것이 뻔했다.

사실 주변에 있던 레지던트들은 모두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와……. 개건방져.’

‘남은 지금 3년 동안 논문 하나 어떻게 쓰나 생각하느라 피똥 싸는데…….’

‘천재들이라 이거지?’

지들끼리 얘기하는 거 듣기만 했는데 어쩐지 광역 공경을 받은 느낌이었다.

광역이면 대미지가 적어야 할 텐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딱 듣자마자 모두 빈사 상태에 빠졌는데, 희한하게 연차가 높을수록 더더욱 커다란 대미지를 받았다.

이제 논문 내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어서였다.

전문의라는 게 그냥 병원에서 수련받다가 시험 하나 띨룽 본다고 해서 주어지는 자격이 아니지 않나.

기본적으로 자기 분야에 관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지, 또 연구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에 관해서도 증명해 내야 했다.

“아, 그래 이거나 할까.”

“뭐?”

“전에 심장 원발성 림프종 보셨잖아요. 진단 및 치료 경험에 관해 얘기해 주면 좋을 거 같아요. 이거 때문에 제가 따로 연구 논문 쓸 수는 없고.”

“아……. 그래, 그래. 그거 좋네. 그럼 나 교신 저자로 써먹어.”

“네.”

한데 수혁은 앉은 자리에서 논문거리가 뚝딱뚝딱 나왔다.

이번에도 그랬다.

비록 임상 논문이나 연구 논문이 아닌 케이스 리포트 수준이긴 하지만.

사실 이런 것도 대단히 부러운 일이었다.

학회 측에서 반드시 임상 논문만 고집하는 게 아니라, 케이스 리포트라 해도 세 개 정도를 쓰면 대체를 해 주기도 해서였다.

‘와……. 여기서 바로 결정?’

‘근데 이번 주 금요일에 출국인데……. 아무리 이현종 교수님 부탁이 있다고 해도 다음 주에 있을 학회면 초록 되도록 빨리 내야 할 텐데?’

‘그러니까. 그게 되나? 자료를 싹 다 가지고 있나?’

그렇다 보니 아까보다도 더 레지던트들의 관심이 둘에게로 쏠렸다.

방금 전까지도 나 논문 어쩌냐고 했던 3년 차가 특히 그랬다.

귀를 쫑긋 세운 채 아예 떠날 줄을 몰랐다.

두두두두.

수혁은 그런 레지던트들에게 시선을 돌리는 대신, 아예 이현종과의 대화도 끝내고 자리에 있는 키보드를 두들겨 대기 시작했다.

속도가 무척 빠른 것이 거의 무슨 타자 연습이라도 하나 싶을 정도였다.

해서 다른 이들은 아, 저 사람이 이제 논문 얘기는 고만하고 다른 일을 하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빠른 속도긴 했지만 그건 수혁이니까 용인할 수 있다고 봤다.

‘응?’

한데 그 뒤를 지나던 레지던트 2년 차가 이상한 광경을 발견했다.

수혁이 써넣은 문서 제목이 바로 ‘심장에서 원발한 림프종 1례’였던 것.

둔 눈으로 똑똑히 보고서도 믿기지가 않아서 뒤에서 서성였다.

‘뭔데, 이거. 실화야?’

수혁은 이미 초록은 다 썼고, 이제 본문을 써넣고 있었다.

인트로덕션은 심장 종양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가 들어가야 해서 제아무리 해당 분야의 대가라 해도 자료를 좀 찾아보고 해야 할 텐데 그런 과정이 없었다.

심지어 더더욱 이상한 일은 그대로 주석도 달아 넣고 있다는 점이었다.

‘설마…… 머릿속에 저 많은 논문 제목이랑 내용을 다 기억하고 계시나?’

보면 볼수록 믿을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뭐 해?”

한참 일해야 할 포지션인 2년 차가 이러고 있으니, 빨리 일 끝내고 논문 고민하러 가야 하는 3년 차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해서 가서 물으니, 2년 차는 말없이 턱으로 수혁의 모니터를 가리켰다.

‘미쳤나?’

아무리 요새 의국 분위기가 좀 느슨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2년 차가 3년 차가 묻는 말에 턱으로 답해?

몇 년 전 같았으면 바로 벌당 한 달 떨어질 만한 일이었다.

어디 아래 연차가 건방지게 위 연차 묻는데 입을 열지 않는단 말인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있다면, 글쎄 뭐가 있을까.

‘턱이 부러졌나, 새끼가……. 음?’

이걸 부러뜨려야 되려나 하면서 저도 모르게 턱을 따라 시선을 옮긴 3년 차는 지금껏 2년 차가 그랬던 것처럼 하던 것을 멈추고 뚫어져라 모니터만 바라보았다.

이제 수혁은 인트로덕션을 다 쓰고 환자 케이스에 들어간 참이었다.

사실 환자에 대한 기록은 의무기록을 좀 뒤져봐야 할 터였다.

아무리 천재라 해도 어찌 환자에 대한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게다가 이 환자는 수혁이 직접 본 환자가 아니라 그저 이현종이 본 것을 주워들은 게 다였다.

두두두두.

하나 수혁은 망설임 없이 모든 항목을 싹 채워 넣고 있었다.

환자가 언제, 왜 이 병원에 왔는지부터 해서 그때 환자에게서 보였던 소견 그리고 검사 결과와 그에 대해 처음 환자를 봤던 의사가 했던 처치까지 일필휘지로 싹 적어 넣고 있었다.

이는 정말이지 대단한 일이었다.

아니, 대단하다는 말로도 설명이 좀 부족했다.

“이건 내가 봐도 약간 선 넘었다.”

모든 레지던트가 하던 일을 멈추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아예 수혁 뒤로 가서 줄 서 있는 수준이 되자 그제야 이현종도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수혁이 저질러 놓고 있는 짓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사실 앉은 자리에서 뚝딱 논문 쓰는 것 정도는 이현종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의 이현종을 있게 한 논문도 사실 그늘집에서 쓴 초록이 근간이 되어 탄생하지 않았나.

하지만 환자에 대한 모든 정보를 검색 한번 하지 않고 이렇게 늘어놔?

‘어디…… 수치가…… 음, 그래. 이렇게 변했던 거 같은데. 와……. 맞잖아?’

이게 아무리 수혁이라 해도 말이 되는 건가 싶었다.

원래 오늘 이거 쓰려고 여기 온 게 아니라, 얘기 나누다 보니, 정말 어쩌다 보니 쓰게 된 거 아닌가.

그 말은 굳이 이 케이스를 다시 떠들어 볼 생각도 안 했을 거라 이건데 이렇게 바로 써낼 수 있다니.

심지어 이 케이스 이거 꽤 된 건데.

“네?”

“아니, 아냐. 하던 거 해.”

“선 넘었다고…….”

“어, 넘긴 넘었어. 너는 진짜 천재 수준이 아니라 그냥 괴물이구나.”

“칭찬이죠?”

“칭찬이지. 애비도 맨날 괴물이라는 말 많이 듣고 살았어.”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심지어 수혁의 친아버지라고 해도 이런 수혁을 이해하지 못했을 터였다.

불가해의 영역 아닌가.

하지만 이현종은 남들의 불가해 영역에서 비교적 오랜 세월 머물러 온 사람이었다.

그렇다 보니 수혁도 자기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능력이 있을 거라 지레짐작해 버렸다.

해서 이현종은 수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나머지 레지던트를 돌아보았다.

“이거 다 쓸 때까지만 보고 근무 다시 해.”

“아, 네.”

“서서 보면 남들이 다 이상하게 볼 테니까 앉아서 봐!”

“네!”

얼마나 신기하겠는가.

그저 그런 놈들이라면 단지 동물원 놀러 간 것처럼 이러고 말 터였다.

하지만 이곳은 태화.

전국에서 제일 공부 잘한다는 놈들이 모인 곳이지 않나.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한다는 말이 괜히 있을까.

게다가 태화에는 전통도 있었다.

태화에서 수학한 아이들은 아무래도 학풍의 영향을 진하게 받았다.

‘그래, 쓸 만한 놈들은 벌써 자극받았잖아.’

이현종은 수혁의 어깨너머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레지던트들의 눈동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이현종은 현역이고 또 마땅한 후계자인 수혁을 찾았지만 그럼에도 교육자로서의 본분을 잊은 건 아니었다.

특히 이곳 통합진료센터에 있는 동안에는 계속 이럴 작정이었다.

‘나도 일반인 이해가 어려운데 수혁이는 오죽하겠냐.’

원래 너무 머리가 좋으면 가르치는 건 잘하기 어렵지 않나.

물론 수혁은 나름 강의력은 좋았지만, 그것과 교육을 꾸준히 지속적으로 잘하는 건 또 별개의 일이었다.

이미 수혁바라기인지 나발인지를 주축으로 한 스터디 그룹 얘기도 듣지 않았나.

안대훈하고 우하윤 말고는 제대로 따라온 사람이 없다고 했다.

‘여기 애들이 평범한 애들이면 그래도 돼. 근데 여긴 태화야. 너무 많이 탈락하는 교육법은…… 잘못된 거란다, 수혁아.’

다 이수혁, 이현종처럼 될 필요는 없었다.

그럴 수도 없는 법이고.

하지만 어디 가서 태화 출신 전문의라고 얘기하기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실력자들은 반드시 만들어야만 했다.

이현종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빛이 눈에 띄게 날카로워진 이들을 눈여겨보았다.

저놈들은 이번 달에 질문 신공으로 조금 혹독하게 다뤄 줄 심산이었다.

하여간 수혁은 잠깐 사이에 초록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논문까지 다 써서 싱가포르 학회에 보냈다.

그때 학회 측은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뭐래? 프로페서 리가 보증하는 사람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우리 초록 접수 끝났잖아.”

“마침 하나 비는 세션이 있긴 해요. 거기 넣어달라는데 어떻게 안 된다고 합니까. 이현종이에요, 이현종.”

“에이. 근데 언제 보내 주려나?”

“방금 말했으니까…… 학회 시작 전에나 보내 주면…… 응? 메일 왔네?”

“뭔데.”

“초록…… 아니, 논문이…… 응?”

“어디 봐 봐. 대강 그냥 복붙 한 거 아냐?”

“아니…… 아닌 거 같…… 퀄리티가 너무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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