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544화 (544/1,303)

544화 병원 실사 (1)

“교주?”

남들에게는 어색하기만 한 단어겠지만, 수혁에게는 이상하게 익숙해진 단어였다.

딱 듣자마자 떠오르는 얼굴도 있었다.

‘안대훈……?’

이 미친 대머리가 싱가포르에 왔나?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이것이었다.

사실 불가능한 일도 아니긴 했다.

이제 안대훈도 3년 차 아닌가.

3년제가 된 내과에서 제일 윗사람이라는 뜻이었고, 원할 때면 휴가를 낼 수 있는 권한이 생겼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이렇게만 말하면 휴가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닌가 싶겠지만, 대학 병원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가능성 있는 추론입니다만…… 닥터 안이 아니라 닥터 양이라고 했습니다.]

안대훈에게 어찌나 시달렸는지, 바루다도 안대훈이라는 추론에 딱히 반발하지 않았다.

안대훈이라면 혹시 오지 않았을까? 뭐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아, 닥터 양이래? 그 새낀 또 뭐야.’

[이전에 싱가포르 병원에 있던 레지던트 아닌가요?]

‘아……. 내가 발표 도와준?’

[도와준 정도가 아니라 대신 해 준 거죠.]

‘하긴.’

그 정도면 은혜를 베풀었다고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 생각과 함께 안내인이 가리킨 곳을 돌아보니 과연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통통하고 하얀 얼굴에 작은 안경까지 낀, 그야말로 전형적인 순둥이 상이어서 잊기도 어려웠다.

“아는 사람이 맞습니까? 귀빈이시라 저희로서는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안내인 대신 그 뒤에 있던 이가 입을 열었다.

역시나 새카만 정장 차림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체격임을 엿볼 수 있을 정도로 몸이 좋았다.

아무래도 리홍이 의원이 경호원까지 보내 준 모양이었다.

하여간 힘 있는 사람들은 두바이 왕자도 그렇고 다들 화통한 면이 있었다.

“알긴 압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모실까요?”

“음.”

그래, 아는 얼굴이긴 했다.

하지만 교주님이라니?

저놈이 대체 왜 자신을 교주라고 부른단 말인가.

[교주라고 부르는 사람들 특성상 수혁에게 해를 끼칠 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궁금해하고 있으려니, 바루다가 자신의 분석 결과를 도출했다.

솔직히 말하면 수혁의 생각과는 정반대였다.

세상에 사이비만큼 위험한 집단이 또 있을까?

‘네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구나.’

해서 수혁은 실로 오랜만에 바루다의 의견을 부정했다.

[제가요?]

‘응.’

[그게 수혁이 할 만한 소리가 맞나요?]

‘음.’

하지만 말을 나누다 보니 또 그렇지만도 않지 않나 싶기도 했다.

‘하긴 네가 맞겠지.’

[그래요. 제가 맞습니다.]

해서 바루다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게다가 닥터 양의 얼굴은 아무리 봐도 위협이 될 거 같진 않았다.

소위 영화에서 본 사이비처럼 수혁을 어디 가둘 수 있을 거 같진 않다는 얘기였다.

심지어 지금은 경호원도 붙은 상황이니 더더욱 걱정할 이유는 없을 터였다.

‘그리고 저 새끼 저거 교주라는 말……. 지가 알아서 하는 거 맞을까?’

[아닐 겁니다. 안대훈과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있죠.]

‘그것도 캐 보자.’

[좋죠.]

또 안대훈의 행적을 엿볼 수도 있을 거 같아 일단 같이 다니기로 했다.

“네, 그러죠. 모르는 사람은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라고 하겠습니다.”

수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경호원 중 하나가 달려갔다.

닥터 양은 순둥 한 얼굴로 있다가 수혁이 오라고 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붉어진 채 도도도 달려왔다.

체형 때문인지 뒤뚱거리는 느낌이 강해서 더더욱 위협적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대훈이가 순진한 놈 하나 꼬여서 사이비로 만들었나.’

[그랬을 수도 있죠.]

‘하아.’

덕분에 수혁은 한숨을 쉬면서, 어린양이 되어 버린 닥터 양을 맞이했다.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네요.”

“네, 네! 교주님. 정말 영광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안대훈도 하지 않던 짓을 양이 한 탓이었다.

“아니, 이게 뭔…….”

닥터 양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오가는 사람이 많은 창이 공항에서였다.

바로 옆에 있던 조태진이 의식이 있는 사람이면 이걸 말려야 하는데, 그는 오히려 응당 그래야 맞다는 얼굴을 하고는 후후 웃고 있었다.

“혀, 형?”

“너의 그분을 진지하게 믿으시는 사람이구나?”

“뭔 소리예요!”

“부끄럽네.”

“당연히 부끄러워야……. 아니, 뭐가 부끄러워요? 맥락이 조금 이상한데?”

“나도 믿는데 남들 앞에서 신앙 고백하기가 좀 그래서 참고 있거든.”

“하.”

요즘 들어 자주 그러기는 한데, 단연코 지금 이 순간처럼 이현종과 신현태가 그리웠던 순간은 없는 것 같았다.

국제 진료소 설립을 위한 출장이 아니라 무슨 사이비 연수회라도 끌려온 기분이 들어서였다.

“자, 이쪽으로 가시죠. 이분은 뭐 목숨이라도 빚지셨나.”

다행인 것은 수혁을 맞이하러 온 수행원들은 제정신이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조태진을 제외한 나머지 병원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정상인들이라 조태진과 닥터 양도 대세에 휩쓸려 공항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와.”

공항 앞에는 당연하다는 듯 차량이 줄지어 서 있었다.

주로 VIP 이동에 쓰이는 벤츠 스프린터였는데, 안에 들어가 보니 이 넓은 차를 6인용으로 개조해 놨다.

운전석에는 기사가 앉고 조수석에는 수행원 하나가 앉았기에 뒤에는 온전히 일행 넷씩만 앉게 된 셈이었다.

“역시 수혁이랑 다니면 호강한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구만.”

대학 병원 의사들이 언제 이런 호사를 누려 봤겠는가.

타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저 말이 정말 나한테 하는 말인가 싶어서 쭈뼛거리고만 있었다.

수혁을 제외하면 오직 하나 조태진만 당연하다는 듯 미리 탄 수혁 옆에 털썩 앉았다.

“좋다, 푹신하네. 이거 설마 스크린?”

“아, 네. 그런 거 같은데요?”

“리홍이 의원이 너 진짜 좋아하나 보다?”

“그러니까요. 근데…….”

수혁은 조태진이라면 어차피 그럴 거라 생각했기에 조금은 무시하기로 하고, 자연스레 일행처럼 뒷자리에 앉은 양을 돌아보았다.

닥터 양은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마치 놀이동산에라도 온 것 같은 모양새였다.

“우리 오늘은 싱가포르 병원으로 안 가고 국제 진료소 부지로 갈 거 같은데……. 같이 가요?”

“아, 네! 교주님! 국제 진료소가 저희 싱가포르 병원과 협업 형태로 지어진다고 들었습니다. 장 교수님께 제가 에스코트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아……. 에스코트…… 가면 저희 현지 직원이…….”

“현지 의사가 있으면 아무래도 더 좋지 않을까요?”

“그…….”

병원 부지라 병원도 아니지 않나.

오기 전에 브리핑 들은 바에 따르면 아직 원래 있던 건물 중에 허물지 않은 것들도 있다고 했다.

근데 무슨 놈의 의사 에스코트가 필요하다는 걸까.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른 이가 끼어들었다.

태화 생명에서 나온 직원이었다.

아니, 직원이라기보다는 사측이라고 봐야 했다.

직급이 부장이니까.

“이수혁 교수님,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지 답사 시에 이분이 딱히 할 일이 없을 수는 있겠지만……. 언론에서 싱가포르 병원 사람과 함께 우리가 부지 답사 다니는 것을 보도하게 되면…… 여론도 긍정적으로 변할 겁니다.”

“아, 그런가요?”

“네, 확신합니다.”

“그럼 뭐……. 부탁드리겠습니다. 닥터 양.”

“아유, 부탁이라뇨!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쪽 말을 듣고 보니 과연 나쁜 일은 아니었다.

사실 닥터 양이 직접적인 위해를 끼칠 것도 아니긴 하지 않나.

약간 쪽팔리고 민망하기는 한데, 그게 병원에 도움이 된다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을 터였다.

이현종이나 바루다만큼 태화에 진심인 건 아니더라도 수혁도 나름 충심이 있는 사람이지 않나.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부우웅.

잠시 얘기를 나누는 사이, 어색해하던 다른 병원 사람들도 차량에 탑승했고 모두 탄 것을 확인한 수행원의 손짓과 함께 차량이 하나둘 공항 앞을 떠나기 시작했다.

가는 길이 아주 짧거나 하지는 않았다.

싱가포르라고 하면 도시 국가다 보니 손바닥만 하지 않나 싶을 텐데, 실제로도 그렇긴 하지만 애초에 도심이라는 게 막히는 곳이지 않나.

서울도 교통이 꽤 막히는 곳 중 하나인데 싱가포르는 그것보다도 더해서 진짜 지옥이라는 말이 어울릴 지경이었다.

오죽하면 러시아워에 차를 몰려면 돈을 더 내야 하겠는가.

“정말 정말 영광입니다. 저희끼리 교주님 얘기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몰라요.”

그 말은 곧 차 안에서 대화 나눌 만한 시간이 충분하다는 뜻이었고, 다시 말하면 수혁이 닥터 양에게 시달릴 시간이 늘어났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 얼마나 하는데? 나도 좀 들읍시다.”

우군이 되어야 할 조태진은 어느새 저쪽에 붙은 지 오래였다.

“아니, 아니. 잠깐. 근데 저를 왜 교주라고 불러요?”

사실 수혁도 이 대화 자체에는 관심이 있었다.

이유가 궁금해서였는데, 수혁이 이 질문을 하자마자 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부르라고 했다고 해서 부르는 건데 이유를 묻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아……. 이게 안 주교님이 말씀하신 시험이라는 건가.’

불과 1, 2주 전에만 만났어도 이런 생각까지 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아직 안대훈의 세뇌에 걸리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이젠 늦었다.

“제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것일 뿐이죠.”

“안대훈이나 뭐 이런 놈이 시킨 거 아니고요?”

“그럴 리가요? 저는 진심입니다.”

“하.”

수혁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고, 닥터 양은 그걸 감탄이라고 여기며 뿌듯해했다.

‘주교님 저는 오늘도 시험에 들지 않았습니다.’

다행한 일은 곧 차가 부지 내에 들어섰다는 것이었다.

막상 도착하고 보니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장면이 펼쳐졌다.

이미 리홍이와 김다현 사장은 협의가 되어 있는지 공사가 한창이었다.

깡깡.

‘어이, 거기 조심!’

워낙에 더운 나라였기에 공사가 대한민국에 비하면 조금 늦은 시간에 주로 진행되는 편이어서 오히려 지금이 딱 한창이었다.

땡볕에 일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가운을 입어?”

“네. 제가 싱가포르 병원에서 온 사람이라는 걸 티 내야죠.”

차가 멈춰 서자마자 닥터 양은 미리 구비해 두었던 가운을 걸치고 앞장서서 내렸다.

그리곤 너무도 익숙하게 공사 현장을 뚫고 현장 소장을 만나 얘기를 나눴다.

그러자 소장이 직접 나서서 일행이 더욱 편하게 병원 부지를 볼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벌써 안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안대훈이 어떻게 전도를 했는지는 몰라도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너까지 이러면 어떡하냐.’

[도움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저런 일을 돈 준다고 하겠어요? 레지던트가 얼마나 바쁜데.]

‘그것도 그렇긴 한데…….’

하여간 소장을 따라서 공사장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수혁은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바루다가 들었다.

“거기 힘들면 쉬어!”

“어…….”

“응? 뭐라고?”

“어…….”

“어, 어!”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였다.

[수혁.]

‘어, 어디지?’

[시계방향으로 3시.]

‘오케이.’

딱 수혁이 방향을 잡고 부리나케 걸어 나가고 있을 무렵, 공사장을 울리는 외침이 들려왔다.

“여, 여기 도와줘요!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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