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555화 (555/1,303)

555화 여기도? (4)

가정법은 많은 분야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한 방편으로 쓰이는 편이다.

하면 의학에서만큼은 뭐뭐라면 이라는 말은 최대한 지양하는 것이 좋았다.

사람 몸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었기에 그랬다.

만약 별 근거도 없이 가정한 새로운 상황이 아니라 전혀 다른 질환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른 학문이나 분야에서라면 시행착오의 하나로 그저 경험이 될 수도 있겠으나, 의학에서는 사람이 죽어 나갈 수 있었다.

의사들이 구충제 이슈나 기타 새로이 나오는 의견에 대해 보수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림프종이라면…… 빨리 자라는 편일 거다, 라.’

[네, 그게 아니라면 아예 다른 질환을 생각해야겠죠.]

때문에 수혁도 바루다의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

높은 확률로 림프종이 아닌 다른 질환일 거란 인사이트를 얻었다는 얘기였다.

“저, 교수님.”

생각 같아서는 여기서 더 의견을 교환하고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외부 사정이 그렇게 두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기는 했다.

지금 수혁은 텍스트 북 속의 케이스를 탐구하는 게 아니라 실재하는 환자를 보고 있지 않나.

심지어 이 환자는 지금 막 중환자실에 내려온 참이고, 수혁은 같이 이 환자를 보고 있는 사람 중 가장 지위가 높았다.

“아, 그래요.”

비록 싱가포르 병원 소속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권위가 있다는 얘기였다.

적어도 의학에서만큼은 우리 병원은 이렇게 하는데 따위의 말이 통하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이미 현대 의학은 글로벌 스탠다드가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다.

“항생제를 어떻게 쓸까요?”

“음……. 어떻게 쓰려고 했죠?”

“일단 3세대 세파랑…… 메트로니다졸, 그리고 레보플록사신을 쓰려고 했습니다.”

수혁은 방금 입을 연 왕팡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 3년 차라고 했던가.’

안대훈과 동일한 연차였다.

여긴 4년제다 보니 치프는 아닐 거고, 바이스 치프거나 주치의긴 하겠지만.

하여간 본격적으로 내과를 공부한 시간은 같다는 얘기였다.

[확실히 안대훈이 더 낫긴 하네요.]

‘응, 나쁜 선택은 아니지만…….’

[여기서 좀 더 나갔어야죠.]

단순 폐렴이라고 한다면 방금 왕팡이 말한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사실 병원 획득성 폐렴이라 생각해도 썩 나쁘지 않다고 할 수 있었다.

약 세 개를 동시에 쓴다는 건 어찌 되었건 혈액배양결과가 나오기 전에 확 때려 버리겠다는 심산이라는 뜻이었고 또 동시에 어지간히 무서운 균이라도 이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혁은 여전히 모자란다고 판단했다.

“이 환자는 단순 병원 획득성 폐렴이라고 보기 어려워.”

“아…….”

수혁의 말에 왕팡은 왜냐는 말을 눈빛으로 했다.

감히 수혁의 말에 토를 달기는 뭐하지만 하여간 궁금하기는 해서였다.

수혁은 그렇게 성질이 더러운 편이 아닌 데다가, 심지어 누구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지 않나.

가르친다는 행위만큼이나 잘난 척을 슬쩍 끼워 넣기 좋은 행위가 없어서일 거라고 바루다는 판단하고 있었다.

“진행 속도가 너무 빨라. 그 말은 환자에게 쓴 프레드니솔론…… 즉, 스테로이드가 면역 억제제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얘기지. 아니면 기저에 있는 어떤 질환이 면역 억제를 시키고 있을 수도 있고. 하여간 이 환자는 영구적이건 비영구적이건 지금 당장은 면역 억제자라고 보는 게 안전해.”

“아…….”

“때문에 약도 그에 준해서 써야지. 나 같으면 메로페넴, 테이코플라닌에 레보플록사신을 쓰겠어.”

“아……. 그렇군요. 맞아, 그게 더 합당하겠습니다.”

수혁의 말에 왕팡은 얼빠진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처방도 그럴싸하지만, 그 처방에 이르기 위한 여정, 즉 근거를 대는 과정도 너무 그럴싸하지 않나.

거의 모든 걸 눈으로 보고 처리하는 외과계와는 달리 추론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내과 의사로서는 수혁이 방금 했던 말이 일종의 강연처럼 여겨졌다.

추론은 이렇게 하는 거다, 뭐 이런 느낌을 받았다는 얘기였다.

‘역시…… 진짜 똑똑해.’

‘하긴 이러니까 어제도…….’

왕팡뿐 아니라 모여들었던 레지던트들 모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해서 약이 들어가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어쩐지 환자가 살아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젊어서들 그런 것도 있고, 또 다들 모여서 한꺼번에 내린 결정이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면도 있어서였다.

다만 수혁은 그 모든 것들과 유리된 채 환자를 응시했다.

‘우선 검사도 해 봐야 해.’

[네, 가래랑 피에서 뭐 자라는 건 없는지 확인해야죠.]

‘엑스레이, 바이러스 PCR, pneumococcal/Legionella 소변 항원 검사도 해 보는 게 좋겠어.’

[네, 그렇게 말씀하시죠.]

수혁만은 이 환자의 문제가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다는 것을 직시하고 있기에 그랬다.

들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거 같긴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사실이 그런 것을.

“일단 여기 적은 거 처방 나가고.”

해서 수혁은 덤덤한 얼굴로 왕팡에게 쪽지를 건넸다.

그제야 왕팡도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슈욱, 슉.

현실의 환자는 왕팡이 그리던 장밋빛 미래와는 달리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간신히 생명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처음 응급실에 왔을 때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했더라면 충격이 덜했겠으나, 전혀 그랬던 상황이 아니었기에 왕팡의 마음도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환자…… 원인을 찾아야지.”

“네. 그런데 그럼 또 어떤…….”

“일단 지금으로선 생각해 볼 수 있는 질환은 림프종이나 백혈병이야.”

“조직검사를 해 봐야 할까요? 환자가 견딜 수…….”

“지금 어떻게 견뎌. 이런 상황에서 배 열었다가는 죽어.”

왕팡 혼자서만 있었다면 판단을 그르칠 수도 있는 상황이란 얘기였다.

물론 종합 병원이니만큼 혼자 모든 판단을 내릴 수는 없겠고, 당연히 이런 의견을 전달받은 외과에서 황당한 마음으로 까기는 하겠지만.

하여간 지금 이 순간, 수혁은 아주 결정적인 판단을 내려 주고 있었다.

“그보다는 영상학적인 검사부터 해 봐야겠지. 어차피 가슴 CT 찍어 봐야 되지 않겠어?”

“아, 네. 범위를 정확히 판단하려면…….”

“그러는 김에 목도 찍지.”

“아, 네. 림포마라면…….”

“그래, 목도 중요해.”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어느 정도 감별점이 되어 줄 수도 있었다.

목은 림프절이 대단히 많은 곳이다 보니 많은 림프종에서 전이가 흔하게 일어나는 곳이기에 그랬다.

물론 경부 림프절이 깨끗하다고 해서 무조건 림포마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뭐가 되었건 의학은 결국 확률 싸움이지 않나.

그 확률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터였다.

“그럼 지금 보낼까요?”

“응? 아니, 이대로는 안 되지. 지금은 그냥 둬. 이송 자체가 리스키 해.”

수혁의 말을 듣자마자 마음이 급해진 왕팡이 서둘러 환자를 CT실로 내리려 하자, 수혁이 손을 들어 말렸다.

안 될 일 아닌가.

‘안대훈이었으면 알아서 환자 상태 보면서 했을 텐데.’

[그러니까요.]

자꾸만 미친 대머리 안대훈을 좋게 보게 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수혁은 이런 데 있어서 꽤 객관적인 편이었다.

잘한 건 잘한다고 해 줘야 한다고 믿었다.

“우선 환자 상태 보면서…… 혈압 좀 더 안정되면 그때 고려하자고. 지금 움직이다가 사달 나면 대응이 안 돼.”

“아, 네. 그럼 저 잠시만. 담당 교수님에게 노티 드려야 해서요.”

“아아, 그래.”

“나도 슬슬 가기는 해야 하는데…… 이 환자가 마음에 걸리네.”

엄밀히 말하면 수혁은 눈앞의 환자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그렇지 않나.

수혁은 심지어 아직 싱가포르 내에서 의료 행위를 허가받은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은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비단 수혁이 남들보다 조금 나은 의사라서만은 아니었다.

자존심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손댄 환자야.’

[게다가 아직 진단명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환자가 혹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까.

그 자체도 비극이지만 동시에 수혁과 바루다는 한동안 자신감을 잃게 될 수도 있었다.

아직 환자에게 손도 못 대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근데 또 여기 있겠다고 하면…….’

[조태진이 가만히 있을까요?]

‘아니. 난리 칠걸.’

비행기 타고 오면서 힐끔 본 바에 의하면 조태진의 저녁 일과는 정말이지 빽빽하기 그지없었다.

모두 수혁과의 일종의 데이트 코스로 짜여 있다는 얘기였다.

이게 뭐 하루 이틀 사이에 짠 거면 그나마 마음이 괜찮을 텐데, 수혁은 조태진과 같은 병원 사람인 데다가 또 자주 보는 사이다 보니 조태진이 얼마나 오랜 기간 이걸 준비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하.’

해서 한숨을 쉬고 있으려니, 바루다가 다소 냉정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수혁은 먹는 것과 미지의 케이스를 탐구하는 것. 둘 중에 뭐가 더 중요합니까?]

‘선택지에 태진 형은 없어? 지금 태진 형이 문제가 되는 건데.’

[그 양반은 일단 빼고 말해 봐요.]

‘음.’

예전의 수혁이나 바루다였다면 당연히 먹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 터였다.

특히 바루다는 지금도 식탐이 심한 놈이지 않나.

수혁도 어지간한 쾌락보다는 먹는 쪽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미지의 케이스라면 얘기가 좀 달라졌다.

‘난 이제 미지의 케이스가 더 끌리는데.’

수혁은 그나마 약이 들어가면서 아까보다는 안정이 되어 가는 환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바루다 이 새끼는 분명 먹는 쪽일 거라 여기면서였다.

하나 바루다 또한 크게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습니다.]

‘식충이가?’

[제 창조주가 저를 이렇게 만든 걸 어쩝니까.]

‘아, 하긴. 네 목적이 세계 최고의 의료 인공지능이었지.’

하도 이상한 얘기를 많이 하는 녀석이 되었다 보니 자꾸 까먹는데, 본질은 그랬다.

[그럼 조태진은 어떨까요?]

‘태진이 형은 당연히…… 먹는 쪽 같은데.’

[아니, 그 양반은 두 개를 놓고 보면 안 되지.]

‘그럼?’

[조태진은 이수혁과 먹는 것을 두고 비교하죠.]

‘그럼 나 같은데.’

스스로 말하면서도 이상하다 느껴졌지만, 그럴 거라 확신이 들었다.

[그럴 겁니다. 전화해서 이리로 오라고 하죠. 밥은 대충 라면으로 때우고.]

‘그럼 실망할 텐데…….’

[아뇨, 좋아할걸요.]

‘아무튼, 알았어.’

조태진에게는 미안하긴 했지만, 이미 미지의 케이스로 마음이 확 기울어 버린 마당이었다.

게다가 이 환자는 상태도 좋지 못하지 않나.

보아하니 왕팡은 안대훈만 못하고.

‘진짜 안대훈 정도만 되었어도 예약한 식당에 가서 밥이라도 먹고 오는 건데’라고 중얼거리면서 전화를 걸었다.

“어, 수혁아!”

조태진은 여느 때처럼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좀 더 미안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환자에게서 눈을 뗄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하기로 했던 말을 이어 나갔다.

“네, 형. 그, 오늘 밥 말이에요.”

“어어. 기대해도 좋아. 광동식 코스인데 미슐랭 2스타야!”

“그거 그냥 여기서 먹고 환자 같이 보면 안 될까요?”

“어? 여기서?”

“네, 혈액암일 거 같은데……. 형이 있으면 진단이 더 쉬울 거 같아서요.”

“어어.”

조태진은 머릿속으로 이미 내 버린 예약금을 떠올렸다.

아까웠다.

그것만 해도 20만 원은 되니까.

‘아냐, 아니지. 수혁이가 날 의지하고 있어.’

수혁에게 있어 밥 잘 사 주는 못생긴 형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의지가 되는 형이 될 것인가.

답은 정해져 있었다.

“지금 간다,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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