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9화 니네 다 왜 그래? (1)
“닥터 왕.”
“네, 교수님.”
왕팡은 더없이 당당한 얼굴로 자기 교수를 응시했다.
속으로는 연신 나는 잘못한 거 없다는 말을 되뇌면서였다.
혼자였다면 틀림없이 좀 켕긴단 표정도 나왔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왕팡은 혼자가 아니었다.
‘우리가 교주님 곤란하게 만들 수는 없어.’
‘응, 병리과는 걱정 마. 내가 입 다물게 할 수 있어.’
‘간호사들은?’
‘내가 친해. 나 사실 저기 정 간호사랑 사귀어.’
‘진짜? 와 이 새끼 이거 자기 얼굴 안 본다고 하더니.’
‘얼굴 아니라 성격 본 건데.’
‘죽어 그냥.’
어제 모였던 레지던트들은 수혁이 조태진과 사라지자마자 결의했다.
수혁교의 주교 안대훈이 태화에서 초창기에 그랬던 것처럼 순교자가 되기로 했다는 얘기였다.
해서 이들은 자기들이 토의해서 환자를 진단해 냈다고 하기로 했다.
당연히 교수가 믿을 리가 없었다.
“닥터 왕. 말이 된다고 생각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 환자…… 나도 진단 못 했던 환자야. 근데 그걸 혼자서 해? 그것도 병리과 교수가 아니라…… 레지던트 도움을 받아서?”
“네, 그랬습니다.”
“야, 왕팡.”
“네.”
“침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해! 이걸…… 이걸…….”
교수는 바르르 몸을 떨다가 환자를 돌아보았다.
어제 수혁이 빠르게 조치를 취한 데다가 약도 팍팍 써 준 덕에 벌써 삽관했던 플라스틱 관은 뺀 지 오래였다.
물론 산소 요구량은 꽤 되어서 계속 산소를 달아 두고 있기는 해야 했지만.
뭐가 되었건 이만큼이나마 좋아진 것은 기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정도만 했어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거란 얘기였다.
‘근데…… 골수성 육아종이라는 것도 진단을 했다고?’
이제 교수는 환자의 얼굴이 아니라 배로 고개를 틀었다.
동시에 환자복을 슬쩍 들추어내면서였다.
환자는 아직 기운이 없기도 하거니와, 아까 삽관했던 것을 빼고 나서 왕팡에게 들었던 것도 있고 해서 가만히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중환자실에 내려와 있고, 생각지도 못했던 진단명까지 붙은 상황이기는 하지만 뭐가 되었건 진단이 됐고 이제 곧 치료도 할 거라고 하지 않나.
불행 중 다행이라는 얘기였고 또 의료진에 대한 감사가 생기는 와중이란 얘기이기도 했다.
‘거기에 이걸…… 초음파 보면서 조직검사를 해?’
교수는 환자의 협조하에 환자 배에 붙은 거즈를 살짝 들춰냈다.
작은 바늘구멍이 나 있었는데, 아직 랩이 다 흔들릴 정도로 질병이 경과한 것은 아니어서인지 아물어 있었다.
어제 왕팡을 비롯한 여러 레지던트가 꾹 누른 덕도 있었지만, 그거까지는 교수가 알 바는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아까 영상의학과 교수와 통화했던 내용이었다.
‘안 그래도 당직의한테 연락받았습니다. 근데 그거 누가 해도 못 해요. 상태 회복하고…… 복강경하 절제 생검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실력 없는 사람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적어도 이 병원 안에서는 최고의 실력자였다.
아닌 게 아니라 간암에 대한 고주파 열 치료나 색전술 같은 것들의 대가 아닌가.
배 안에 바늘 꽂아 넣기에 대가라는 뜻이었다.
한데 그가 못한다고 했던 걸 눈앞의 애송이 닥터 왕팡이 했다.
똘똘한 편이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레지던트 3년 차 내에서의 얘기였다.
근데 이걸 해?
‘게다가 조직을 현미경으로 보고 골수성 육아종이라는 진단까지 해?’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이건 레지던트가 아니라 교수 아니, 교수 할아버지라 해도 불가능한 얘기였다.
“똑바로 얘기해. 지금은 기회가 있어.”
“정말 제가 했습니다. 닥터 양과 정 등과 상의했고요.”
“야, 아무리 니들이 상의를 했다고 해도…… 어? 레지던트끼리 뭘 안다고 이걸 진단해?”
때문에 교수는 화가 났다.
아무리 진단 과정을 복기해 봐도 자신은 불가능했을 거란 생각만 들어서였다.
추론 능력도 그렇지만 술기도 그랬다.
무엇하나 흉내 낼 수 있는 게 없었다.
‘이건 필시 그 이수혁 놈이…….’
왕팡보다는 아무래도 이수혁이 가능성이 있지 않겠나.
하나 이런 생각도 기분 좋은 상상은 아니었다.
어차피 나는 못하는 걸 그놈은 해냈다는 얘기가 되니까.
‘대체 어떻게…….’
열등감을 건드린 걸까?
교수는 옆에 환자가 있는 것도 잊은 채 소리를 지른 것도 모자라 주먹으로 옆에 있던 책상을 쾅 하고 내리쳤다.
“어우.”
“아, 죄송합니다.”
환자의 말을 듣고서야 사과가 나가긴 했는데, 그런다고 진짜 미안하단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너무 화가 나서 그랬다.
“너 말 다시 해 봐. 정말 네가 했다고?”
“네.”
왕팡이 말을 안 듣는 것도 화가 났다.
감히 레지던트 주제에 내 말을 안 들어?
뭐 좀 그럴싸한 말이라도 하고 있는 거면 또 모르겠는데, 이렇게 나와?
“알았어, 너. 두고 봐.”
해서 교수는 일단 중환자실을 떠났다.
그리곤 반 이수혁파, 그러니까 반 태화파를 소집했다.
놀랍게도 그의 소집에 응한 이는 원래 있던 이의 반의반도 안 되었다.
“뭐야, 왜 이래?”
모처럼 회의실까지 빌렸던 교수는 황당하단 얼굴이 되었다.
뭐 대학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니만큼 바쁘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연구 시간인 거 뻔히 아는 놈들도 안 왔다는 건 필시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얘기였다.
“이식외과는 왜 아무도 없어?”
“김승규 교수랑…… 술자리 갖고 다 풀었다던데.”
“뭐? 아니, 배알도 없대?”
“근데…… 그쪽은 SCI 논문도 그렇고 수술 건 수도 그렇고 애초에 태화랑 비교가 어렵긴 해.”
이식외과 쪽과 그나마 친한 소화기 내과 쪽 친구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신 변명을 해 주었다.
당연히 화가 더 치밀어 오르는데, 놀랍게도 녀석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야, 너…… 너 어디 가.”
“나도 이 얘기해 주러 온 거야. 이미 대세는 넘어갔어.”
“뭔 소리야?”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는데…… 레지던트들 태반이 이수혁 교수 팬이더라고. 모처럼 배울 수도 있게 생겼는데 위에서 이러는 건 아닌 거 같다고…… 치프가 오늘 왔어.”
“닥터 장이 시킨 거 아니고?”
“장 과장이 그럴 사람은 아니잖아. 우리 레지던트들이 그런다고 그렇게까지 나설 애들도 아니고.”
“하.”
한숨을 쉬고 있으려니 소화기내과 친구가 밖으로 나갔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응급의학과 녀석도 함께였다.
그러다 보니 그렇지 않아도 휑해 보이던 회의실 안이 더 텅 비어 보였다.
‘이런 망할.’
게다가 남은 녀석들도 전의를 상실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원장과 함께 나섰던 회의에서도 김승규 때문에 망했는데, 그 이후로도 죽 이러고 있지 않나.
심지어 이 싸움은 애초에 지고 들어가는 싸움이었다.
그 와중에 조금이나마 자존심 좀 세우고, 얻을 거 얻으려고 했던 싸움이라는 얘기였다.
“근데 왜 모은 거예요? 일단 그건 들어 봐야죠.”
다행인 것은 아까 전화를 했던 영상의학과 과장은 안에 있다는 점이었다.
아마 편을 들어주지 않을까 싶어서 자세히 아까 들었던 바를 털어놓았다.
말도 안 되죠? 그 새끼들이 선 넘은 거죠? 그쵸? 뭐 이런 표정을 지어 가면서였다.
아마 교수라는 자각만 없었다면 체통도 잃고 실제로 이런 말을 했을 터였다.
“흐음……. 이걸……?”
“그렇다니까요? 맹랑한 녀석이 이걸 지들끼리 했다고…… 하, 진짜 짜증 나고 어이도 없고.”
“이거 대체 누가 했을까요?”
“그게 중요합니까? 이 자식들이 어? 법도를 싹 무시하고.”
“누가 했지.”
“아니, 과장님. 그건 왜 자꾸 궁금해하세요.”
한데 말을 다 듣고 난 과장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화를 내는 대신에 깊은 감명이라도 받은 듯해 보이지 않나.
기대했던 반응은 이 자식들 이거 CCTV라도 뒤져서 고발하자 뭐 이런 거였는데, 그러기는커녕 과장은 턱만 쓸어 담고 있었다.
심지어 뭐라 말을 해도 아까부터는 씹고 있었다.
‘인터벤션만 해도…… 대한민국 영상의학과가 최고라는 평이 있긴 하지.’
코일링을 제일 처음 만든 곳이 대한민국이라는 건 아니었다.
수준이 많이 올라왔다고 해도 현대 의학을 선도하고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치료 결과가 제일 좋은 나라인 것은 맞았다.
그만큼 손이 좋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인생을 갈아 넣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럴까.
하여간 쏟아지는 논문 속에서 대한민국에서 나오는 논문들은 당연하다는 듯 빛을 발했다.
심지어 그리 인구도 많지 않은 데다가 언어도 한국어라는 자기들끼리만 쓰는 나라임에도 대한민국 국내 학회지가 국제적인 명성을 갖고 있지 않나.
적어도 영상의학 쪽에서만큼은 그랬다.
‘근데 이런 것도 잘하는구나.’
애초에 왕팡이 했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
불가능한 걸 어찌 믿는단 말인가.
누가 했는지가 궁금했을 뿐인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범인은 하나뿐이었다.
‘이하언 교수도 아니고…… 김진실 교수가 했다 이거지.’
이하언이라면야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교수니 그럴 수 있다고 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진실은 아직 30대에 불과한, 그러니까 의사로 치면 풋내기이지 않은가.
근데 이런 걸 그냥 해?
사진을 보아하니 한 방에 끝낸 모양인데, 이렇게 되면 자신보다 우수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싱가포르 내에 있는 그 어떤 영상의학과 의사랑 비교해도 마찬가지였다.
‘피부과랑 성형외과 제외하면 교수진도 교육해 준다고 했어. 이거 이런 걸 배울 수 있으면…… 받아야 되는 거 아녀? 괜히 밉보였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아까 달려왔던 교수가 너무 황당하다는 눈으로 과장을 올려다봤다.
“그, 죄송합니다. 이거 해낸 사람은 한번 봐야겠어요.”
“범인 색출하겠다는 거죠?”
“네? 범인은 무슨, 환자 죽었어요?”
“아니, 그건 아닌…….”
“왜 이렇게 사람이 속이 좁아. 들어 보니까 덕분에 환자 살렸더구만. 이런 거 할 수 있게 되면 좋은 거지.”
“어…….”
그래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대학 병원에 남는 의사들은 다들 향상심이 대단한 사람들 아닌가.
이전 국적을 막론하고 다 같다고 봐도 무방했다.
눈앞에 30대임에도 불구하고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가 있지 않나.
이하언만 그럴 수 있다면 그냥 재능이겠다 싶겠는데, 제자까지 이러면 그냥 교수법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야만 했다.
“난 갑니다. 이제 여기 안 올려고요.”
“어어, 과장님!”
영상의학과 과장까지 나가게 되자, 회의실은 이제 썰렁하기까지 해졌다.
“아니, 이게.”
“으음. 일단 오늘은 이만하죠. 사실…….”
게다가 남아 있는 이들도 그냥 교수 얼굴 봐서 있는 거지, 무슨 대단한 결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이미 패잔병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교수도 마음을 달리 먹어야 하는데, 아직 그러지 못했다.
체면이 깎였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와 씨. 이거 어떻게 엿을 먹이지?’
보통 이렇게 되면 엿을 먹는 건 자신이라는 사실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