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6화 도련님이 천재야? (4)
수혁은 제갈공명이 지었을 법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마 쥘부채라도 있었으면 살짝 펴서 살랑살랑 부쳤을 것 같은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여러 소리로 묘사하려 했으나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냥 재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역시 교주님…….’
‘그분이 오셨다.’
물론 양이나 왕팡은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절대자라면 이 정도쯤은 해 줘야 한다고 믿었기에 그랬다.
게다가 수혁이 이런 비슷한 표정을 짓고 난 다음엔 반드시 진단이 된다는 구절이 있지 않은가.
안대훈이 쓴 경전을 보면 그랬다.
‘와……. 진짜 vvvvip이긴 한가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게 교정이 안 되었을 리가 없지.’
반면 다른 이들이 보기엔 그냥 재수 없는 얼굴일 뿐이었다.
역설적으로 또 그래서 오해가 더 깊어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나.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해 온 사람이라면 이런 표정은 지을 수 없었다.
설령 지을 수 있다고 해도 남들 앞에서는 자제해야 했다.
“우선…… 이 환자 자체를 봅시다.”
수혁은 그러거나 말거나 입을 열었다.
남들 반응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지 않나.
머릿속엔 오로지 환자만 가득 차 있었다.
아니, 환자만 차 있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환자에 대해 멋있게 설명하나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이 환자 키에 비해 체중이 아주 적게 나가요.”
“음.”
“특히 배를 보시면…… 내장지방이 굉장히 적습니다. 이건 에너지 소모가 심하거나, 또는 에너지 흡수 자체가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죠?”
“그렇습니다.”
“믿습니다.”
수혁은 거슬리는 답을 해 대는 양과 왕팡 쪽을 슬쩍 째려본 후 말을 이었다.
여전히 손으로는 환자를 가리키고 있으면서였다.
당연히 머리로는 환자 정보를 떠올리고 있었다.
“환자 외래 내원해서 진술한 내용을 보면…… 일단 직업은 사무직입니다.”
“네. 맞습니다.”
“아까 환자 핸드폰을 좀 봤는데……. 사진첩에 풍경 사진이 거의 없더군요. 대신 레고랑 게임 패키지 사진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활동적인 취미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란 뜻이죠.”
“아, 그래서 아까…….”
리웨이는 수혁이 뒤로 빠지기 전에 환자의 핸드폰을 살짝 들여다봤던 것을 기억했다.
원래 남의 핸드폰 들여다보는 일은 언제 어디서건 무례한 일이었으나, 의료진에게는 예외였다.
보호자 연락처를 얻어 내려면 피할 수 없는 절차여서 그랬다.
리웨이만 해도 인턴 땐, 그러니까 응급실에 뻔질나게 드나들 땐 그러지 않았나.
하지만 수혁처럼 사진첩을 뒤져본 적은 없었다.
“활동이 적다는 건 소모도 적다는 것을 의미하니……. 이 환자에게서 내장지방이 이렇게 부족하다는 건 결국, 흡수가 안 되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어떻게 봐도…… 영양실조가 생길 만한 직군은 아니니까요.”
“억측일 수도 있지 않나요? 식이 장애가 있거나…….”
“아, 거식증이요?”
“네.”
수혁이 참 특이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리웨이는 수혁과의 대화에 심취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질문을 던졌다.
던지고 나서는 혹 기분 나빠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기는 했으나 수혁은 오히려 좋았다.
이런 식의 토론을 즐기는 인간이 되어 버렸으니까.
다른 말로 하면 지적 변태라 할 수 있었는데, 원래 이런 인간들이 모여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법이었다.
원래 있던 말은 아니고 바루다가 수혁을 그렇게 세뇌시키고 있었다.
“일단 거식증은 여자에서 유병률이 훨씬 높습니다. 게다가 거식증에서는 대개…… 먹고 토하는 증상이 동반되죠. 하지만 환자의 이를 보십쇼.”
“아, 그렇군요.”
위산은 생각보다 굉장히 강력한 녀석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걸 견디는 위의 점막들이 더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하여간 이는 위산에 닿으면 부식되었다.
해서 이만 봐도 대강 이 사람이 식이 장애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 환자의 경우는 나이에 비해 잇몸이 좀 부실해 보이긴 해도 이 자체는 괜찮아 보였다.
“네, 자기 의지로 발생한 영양실조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 오자마자 시행한 혈액검사에서 빈혈이 있었던 것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되죠.”
“먹어도 흡수가 안 되니…… 빈혈이 올 수 있죠.”
“네, 그렇습니다. 환자의 체형을 보면 이게 꽤 오래된 증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통증을 동반하지 않고, 주로 설사나 흡수 장애로 증상이 나타났다면……. 특히 본인이 마냥 건강하기만 할 거라 믿는 20대에서는 진단이 늦춰질 수 있죠.”
“하긴 그렇죠. 오히려 20대가 더 늦어질 때가 있죠.”
언제나 그러하듯 의학에서만큼은 나이가 깡패였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사람과 나이에 비해 늙어 보이는 사람을 비교해도 그랬다.
겉으로 보기에 젊어 보이는 것과 실제로 젊은 것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으니까.
때문에 이러한 흡수 장애가 있을 때조차 견딜 수 있었다.
아마 환자는 그냥 자기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해서 설사가 잦아진 거라 여겼을 수도 있었다.
간헐적으로 나오는 출혈에 대해서는 설사를 자주 하니 닦느라 생긴 상처 때문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고.
억측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추론이었다.
“충분히 가능한 얘기입니다.”
소화기내과 교수도 수혁의 얘기에 누구보다 공감했다.
실제로 이래서 진단 시기를 놓치는 젊은이들이 많아서였다.
특히 염증성 장 질환에서 그랬다.
하필 호발 하는 연령이 20대여서 그랬다.
“네, 그럼 이번엔 내시경 소견으로 돌아가죠. 아까 찍은 사진을 보시면…….”
수혁의 말에 따라 모두가 모니터를 향했다.
수혁만 제외하고서였다.
수혁의 머릿속에는 찍어 둔 사진 몇 장이 아니라 아까 보았던 영상 전체가 돌아가고 있었다.
때문에 훨씬 더 구체화 된 설명이 가능했다.
“해상도가 좀 떨어지기도 하고……. 카메라에서 병변 부위가 멀어서 그렇긴 한데……. 협착이 보이죠?”
“아, 네.”
“그리고 자갈밭처럼 보이는 소견도 있습니다. 후향적 분석을 통해서 볼 때나 가능한 판단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보면 그렇게 보이죠?”
“네.”
“아, 정말…….”
“아까는 전혀 몰랐는데.”
억지로 머리를 그쪽 방향으로 쥐어짜서 돌리면 그렇게 보이긴 했다.
수혁은 내시경 소견을 대강 납득 시킨 후, CT를 띄웠다.
이쪽은 오히려 더 쉬웠다.
리웨이가 있으니까.
“확실히…… Ileocecal valve(회맹부, 회장과 맹장이 만나는 부위)에 협착도 있고……. 그 주변부로 장간막에도 염증이 있어요. 크론이나…….”
“결핵에서 주로 보이는 소견이죠. 하지만 결핵이라고 하기엔 침범 부위가 너무 적어요. 대장과 소장 전부를 침범할 수야 있다지만…… 아까 말씀드렸듯 이 환자에서 증상 발현은 꽤 오래되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대장이 이렇게까지 깨끗한 것은 이상하죠.”
“그렇네요. 아까 시행한 대장내시경은 시그모이드에서 멈추긴 했지만……. 하여간 피떡 말고는 깨끗했죠. CT상에서 봐도 여기 외에 대장에서는 다른 병변이 보이지 않아요.”
“네, 하지만 크론은 워낙 질병 발현을 다양한 양상으로 하는 병이다 보니 이러한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수혁은 리웨이와 함께 거기까지 말한 후, 소화기내과 교수를 바라보았다.
환자는 사실 이비인후과 과장 환자지만 이미 찌그러진 지 오래였다.
크론, 궤양성 대장염, 베체트, 결핵 다 아는 질환명이긴 할 테지만.
그래서 정말 그 질환에 대해서 아느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숙여야 하지 않나.
실제로도 그러고 있었다.
“네, 그럴 수 있습니다.”
하여간 소화기내과 교수는 내 말이 맞지?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수혁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내 재수 없는 사람이란 생각은 지우기 어려웠으나 그와는 별개로 옳은 소리만 하고 있어서였다.
‘아귀가 딱딱 맞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소위 말하는 발상의 전환 따위는 아니었다.
아까는 전환할 발상 자체가 없었으니까.
그냥 맨땅에 헤딩하는 느낌 아니었다.
한데 수혁은 거기서 갑자기 정답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아니, 정답으로 돌진한 후 그 과정을 나머지에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뭐야, 이 인간?’
대체 머리가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다 건너뛰고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감탄 어린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양과 왕팡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후후 하고 웃었다.
‘비서도 쌍으로 재수가 없네. 잘난 놈만 아니었으면…….’
그것도 거슬렸으나 뭐 어쩌겠는가.
그냥 지위만 높은 재수 없는 놈이라 해도 건들 수가 없는데, 지금은 능력도 있는 지위 높은 재수 없는 놈이 되어 있었다.
명색이 소화기내과 교수인데 크론이라는 진단명도 못 맞힌 대역 죄인은 그저 머리를 조아리는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처음 왔을 때 귀 사진을 보죠. 크론의 피부 병변이라고 생각하고 보시면…… 어떻습니까?”
“전형적이네.”
“그렇죠?”
“근데 귀에만…… 오는 경우가 있나?”
“제가 컴퓨터로 찾아본 것이 바로 그건데, 사례에 있네요.”
“아…….”
“그 사례에서는 결핵으로 오인해서 항결핵제 쓰다가 환자 거의 익스파이어 할 뻔했는데……. 하여간 가능은 하다는 얘기죠.”
“아, 크론에 항결핵제를 때렸구나.”
뭐 이런 경우가 없는 건 아니었다.
워낙 크론이랑 결핵이랑 헷갈리는 질환이지 않나.
특히 대한민국처럼 결핵 유병률이 높은 곳에서는 결핵 비슷한 놈이 보이면 일단 그거부터 감별하는 게 옳았다.
하나 명심할 것이 있다면 확신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이미 다른 병, 특히 크론과 같은 질환이 있는 사람은 가뜩이나 몸이 약해져 있지 않나.
그런 데 반해 결핵약은 독한 약이라 확신을 가지고 너무 오랜 시간 무턱대고 때리다가는 환자가 죽는 수가 있었다.
“네, 뭐 그쪽에서도 모탈리티 콘퍼런스를 통해 반성하는 뉘앙스의 페이퍼를 냈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진단이 꽤 빠른 편이죠.”
“그…… 그렇네요. 그럼…….”
“우선 환자 상태부터 올려야 하니……. 조심스럽게 약을 쓰죠. 영양분 보충해 주고……. 레미케이드는 확진이 되면 주도록 할까요? 결핵 위험이 있으니까요. 가뜩이나 결핵이랑 헷갈리는데 쓰는 건 좀 아닌 거 같습니다.”
“네, 그럼 약은…….”
“인플리시맙(infliximab) 정도면 조심스러운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네네. 그렇군요.”
다시 말하면 수혁이 아니었다면 진단이 밀려서 아까 모탈리티 콘퍼런스를 통해 페이퍼를 발행했던 병원과 별 다를 바 없는 짓을 할 뻔했다는 얘기였다.
게다가 모니터를 보니 해당 환자는 그래도 서른이 넘은 환자인 데다가 기저에 다른 병도 있었다.
그에 비해 이 환자는 건강하던 사람 아닌가.
정말로 병원에 걸어 들어왔다가 죽어서 나갔다는 얘기 듣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죠.”
“네, 감사합니다.”
그렇다 보니 진단 외의 일도 수혁의 말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리웨이는 그런 교수와 과장 얼굴을 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럼 이 둘은 일단 포섭…… 밀어붙여도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