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8화 학회 가자 (2)
우선 수혁은 잠드는 대신 호텔 바로 향했다.
일부러 혼자 묵는 날부터는 마리나 베이 샌즈라는 나름 싱가포르의 랜드마크 격인 호텔에서 묵기로 했기에 자연히 인피니티 풀장 옆에 있는 풀사이드 바로 가게 되었다.
‘오…….’
[수혁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네요.]
‘뭐, 인마?’
[옷차림부터가 그렇지 않습니까?]
싱가포르가 예전보다 죽었다 죽었다 해도 도시 경쟁력 3위 권 안에서 노는 나라 아닌가.
대한민국에 밀리는 것도 결국, 규모의 경제에서 밀리는 것이지 서울에 밀리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
그렇다 보니 핫한 호텔 바에는 여기저기 온 남녀 무리가 꽤 많이 모여 있었다.
복장은 다양했는데, 파티 드레스나 정장 아니면 아예 수영복 차림이 주를 이루었다.
그에 반해 수혁이 입고 있는 옷은 슬리퍼에 반바지 그리고 목이 늘어나지 않았음에 안도해야 할 것 같은 디자인의 반팔티였다.
‘음, 인정. 어차피 나는 뭐……. 저런 거 별로 안 좋아해서.’
[수영은 어떤 기분일지 좀 궁금하긴 합니다만.]
‘수영? 나 원래도 못했는데 다리가 아파서 잘못하면 죽을걸.’
[애도 들어가서 걷는데요?]
‘그래? 근데 수영복이 없어.’
[그럼 술이나 드시죠. 일단 바람도 좋고……. 음악도 좋군요.]
바루다는 나름 풍류를 알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막 뭐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 바루다는 나름대로 음악을 즐기는 편이었다.
그중에서도 재즈를 좋아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수혁의 연산 처리 능력이 조금 올라가는군요.]
‘음악을 들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게 정말인 건가.’
[그보다는 신경 전달 물질의 영향이겠지만……. 하여간 이 정도가 딱 적당합니다. 신경이 분산되지도 않고. 알코올로 떨어지는 수혁의 연산 처리 속도가 간신히 유지된다고 할까요? 오, 지금 노래는 제가 좋아하는 노래네요.]
‘뭔데.’
[마시모 파라오 트리오요.]
‘아, 그 이름이었지. 나도 좋아.’
[당연합니다. 제가 이걸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수혁이 이걸 들을 때 분비되는 도파민 때문이니까요.]
‘약간 소름 돋았다, 방금.’
당연한 얘기지만 누가 봐도 뜨내기처럼 보이는 수혁에게 다가오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술이 들어갈수록 자기 통제력이 떨어진 나머지 혼자 중얼거리는 듯한 모습까지 보이고 있자 아예 다가오기는커녕 멀어지는 사람밖에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수혁은 지금 풍경을 바라보며 바루다와 끝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니까.
“저기요?”
“응?”
사실 아주 괜찮지는 않았다.
수혁도 사람인데 바루다랑 얘기만 하고 있는 게 즐거울 리만은 없지 않나.
하지만 동시에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누군가 다가오자 놀라움 반 설렘 반 하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설레발 금지입니다. 닥터 왕팡이군요.]
고개를 돌리자마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왕팡?’
“네. 바로 알아보시네요?”
“얼굴 계속 봤는데 못 알아보면 그게 더 이상하지. 근데…… 웬일이야, 여긴?”
“교수님도 모레 학회 참석하지 않으세요?”
“그렇지.”
“제가 거기 준비 위원 중 하나거든요. 위원이라기보다는 그냥 허드렛일 하는 레지던트지만…….”
“이상하네, 주최자가 싱가포르 국립 병원 소속이 아니지 않나?”
“네. 근데 이번에 학회 이사장님 계신 병원이 그렇게 큰 곳이 아니라서요. 싱가포르에서는 이런 일이 흔해요. 서로서로 이럴 땐 다 도와요.”
“아, 그렇구나.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대한민국은 대학 병원의 숫자도 꽤 되는 편이지만, 그보다 더 차이를 보이는 것은 바로 전문의 숫자 아닌가.
이토록 많은 의사들이 전문의 과정을 밟는 곳은 없다고 보면 되었다.
당연히 레지던트가 각 병원마다 꽤 있었고, 그들만으로 학회 준비가 가능했다.
물론 비인기과 같은 경우는 그게 안 되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병원에서 부를 생각은 꿈도 못 꾸었다.
가뜩이나 인기도 없는 과가 어찌 레지던트를 함부로 쓸 수 있을까.
단기 알바라도 구했다.
“저기 애들이랑 쫑파티 겸해서 왔다가 긴가민가해서 와 봤어요. 여기 묵으세요?”
“어? 어. 여기 전에도 한번 와 봤는데 좋은 거 같아서.”
“근데 내일은 그럼 뭐 하세요? 다른 분들은 다 간 거로 알고 있는데.”
“혼자 보내려고.”
“아, 혼자. 음.”
왕팡은 혼자라는 말에 입을 다물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왕팡이 꽤 귀엽게 생기도 했거니와, 수혁은 일단 이렇게 가까이서 또래 여성을 볼 일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너무 빨리 교수가 된 것도 탈이 되는지, 같은 교수들은 가까워 봐야 큰누나뻘들이지 않나.
그렇다고 레지던트들에게 접근하기엔 사내 연애 금지 조항이 걸렸다.
물론 말뿐인 조항이고 막상 이어지면 다들 축하한다고 하지만, 안대훈 때문인지 뭔지 몰라도 수혁은 이미 연애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이거 혹시…….’
[가만히 있어 보세요.]
‘어? 평소라면 지랄할 놈이?’
[저도 헷갈려서 그래요. 외국인이라서 그런가 표정이 좀.]
‘뭐야. 그린 라이트야?’
[그럴 수도?]
‘허.’
그러다 보니 바루다도 최근엔 연애 관련한 분석은 해 볼 기회가 없었다.
헷갈린다는 얘기였다.
굳이 모르겠단 말을 하기가 좀 그래서 말은 하지 않았다.
자연히 수혁은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바루다의 성능이 최근 더 좋아졌다는 걸 누구보다 체감하고 있어서였다.
“그럼 여기 가 보세요. 주롱베이, 보타닉 가든. 밤에는 나이트 사파리 가시고요.”
“아, 그래. 혼자 가도 되는 곳이야?”
“네? 아……. 싱가포르 치안 좋아요.”
“으응, 그래.”
하지만 바람은 쉬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 차이가 있다면 이번만큼은 이수혁과 바루다의 헛발질만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이수혁 교수님……. 솔직히 멋있긴 한데……. 내가 감히 어떻게…… 펠로우로 지원하면 모를까.’
왕팡은 수혁에게 실제로 호감이 있었다.
호감이 안 생기는 것도 사실 이상한 일이지 않나.
한류가 판치는 세상에 한국에서 온 교수가 심지어 나이도 2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완전 천재에 롤스로이스에 비서까지 딸려 있고.
얼굴도 연예인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썩 나쁘지 않은 편이다 보니 어찌 보면 그야말로 백마 탄 왕자님 느낌이었다.
‘괜히 말 꺼냈다가 펠로우도 못 가게 되면 어쩌냐.’
오히려 그래서 기회가 사라진 셈이었다.
이러한 내막을 모르는 수혁은 곧 방으로 돌아와 술을 더 먹고 뻗어 버렸다.
‘너 한 번만 더 나 설레게 하면 머리에서 뽑아 버린다…….’
[넵, 오늘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더 정진하겠습니다.]
어찌나 표정이 안 좋은지 바루다도 머리 숙여 사과를 했을 지경이었다.
물론 수혁은 워낙에 긍정적인 인간이다 보니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왕팡에게 전해 들은 코스를 밟았다.
아침엔 카야 토스트도 먹고, 점심엔 칵테일 슬링도 먹고 하면서였다.
그러다 보니 하루가 후딱 가서 어느새 학회 일정이 시작되었다.
‘오늘 들을 만한 건 뭐가 있나.’
첫날은 발표가 없다 보니 그저 여유로운 얼굴로 학회장을 어슬렁거리기로 작정했다.
사실 이현종은 그냥 발표 있는 날만 가고 나머지는 놀라고 했으나, 수혁은 학회에 놀러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진짜 미친놈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안녕하세요!”
“아, 닥터 왕팡.”
“일찍 오셨네요? 보통 이 시간에는 발표자만 오는데.”
“들을 만한 거 없나 싶어서요. 호텔 방에 있어 봐야 할 것도 없고.”
“아……. 정말 대단하시네요.”
물론 신도들이 볼 때는 미친놈이긴커녕 그냥 너무 대단한 사람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렇지 않나.
보통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은 죄 놀 생각뿐인데.
딱히 뭐라고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학회 전반에 걸쳐 미국 학회는 진짜 공부하러 가는 곳, 유럽은 좀 쉬러 가는 곳, 동남아는 놀러 가는 곳이란 인식도 퍼져 있었으니까.
‘하긴……. 이러니까 이 나이에 저렇게 능력이 있지.’
왕팡은 진심으로 감탄한 얼굴로 수혁을 바라보았다.
아마 바루다는 일전에 수혁의 당부가 없었다면 지금 한 번 더 가능성을 언급했을 터였다.
그만큼 뭔가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추천할 만한 거 없어요? 싱가포르 내과 학회에서 유독 강하다, 뭐 이런 분야도 좋고.”
바루다만큼이나 단호박이 되어 버린 수혁은 애써 왕팡의 의미심장해 보이는 표정을 무시하고 물었다.
왕팡은 거기서 한 번 더 수혁의 대단함을 느끼며 머리를 굴렸다.
“그…… 아무래도 저희는 감염병이 좀 많죠. 싱가포르는 도시지만 인접한 나라 중에는 그렇지 않은 곳이 많기도 하고……. 인도네시아나 발리 쪽에서 좀 오는 편이거든요.”
“오호 그렇군. 감염이라. 재밌는 주제인데…….”
“근데 지금은 각 병원 모탈리티 콘퍼런스 케이스만 하고 있어요. 새로운 연구는…….”
“아, 그래? 이미 결판이 난 케이스만 한다는 거죠?”
“네.”
“음.”
수혁이 애매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왕팡은 그를 만족시켜야겠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어려운 걸 좋아하시지? 나도 이분 설명하는 거 또 보고 싶긴 한데.’
뒤통수가 뜨끈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같이 학회 준비했던 이들에게도 전도를 아니, 수혁이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에 대해 떠들어 댔기 때문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과연 다들 오호 저 사람이야? 얼마나 똑똑한데? 뭐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다시금 오기가 생겼다.
‘뭣도 모르면서……. 우리 이수혁 교주님이 얼마나 대단한데.’
딱히 수혁이랑 접점도 거의 없으면서도 그랬다.
아니, 객관적으로야 없지만 주관적인 접점이 있어서 그랬다.
누가 뭐래도 왕팡은 싱가포르 2호 신도 아닌가.
“저, 교수님.”
“네.”
“패널 토의도 있어요.”
“토의……? 거기는 근데 의견 주고받는 거지, 뭘 배우기는 좀 애매하지 않나?”
“네, 그렇긴 한데……. 제 생각에는 싱가포르 내에서 주로 치료하는 방식이나 이런 게 한국이랑 다르지 않을까요? 그 차이에서도 뭔가…….”
“아, 그건 그렇겠다. 음, 좋은데? 고마워요. 어디서 해요?”
“마침 제가 거기 안내자여서요. 같이 가실래요?”
“그래요, 좋죠.”
국제 학회라면 다들 그렇듯 호텔 콘퍼런스룸들을 대관하여 진행 중이었다.
왕팡을 따라 들어간 곳은 그중 민트룸이라는 곳이었는데, 이름이 민트라서 그런가 벽면이 민트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안에는 그렇게까지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시간이 이르기도 하거니와 패널 토의라는 것 자체가 아주 사람들이 몰리는 곳은 아니기에 그랬다.
옛날에는 패널 토의, 그러니까 전문가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자리가 가장 인기였지만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근거 중심 의학이 자리 잡은 지 워낙 오래되었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하여간 수혁은 왕팡의 말대로 싱가포르 의학의 느낌을 전해 받기 위해 온 참이라 실망하는 대신 앞쪽 빈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교수님이…… 듣고만 있으면 재미없는데…….’
왕팡은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안내하기 위해 문가에 선 채, 수혁을 바라보았다.
제발 신이 내려서 잘난 척을 해 주길 바라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