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9화 패널 토의, 찢었다 (1)
수혁은 일단 얌전히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워낙 일찍 오기도 했고, 원래 첫날 첫 시간은 아무리 의사들이 모이는 학회라고 해도 어수선하기 마련인지라 자리는 꽤 많았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앞자리에 앉을 생각은 없었는데.’
[그러게요. 맨 앞자리에 앉아 버렸네.]
아는 얼굴이라고 단 하나도 없는 학회였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들겠지만, 사실 학회라는 게 배움을 위한 자리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사교 모임이기도 하지 않나.
여기서 만난 게 연이 되어서 같이 연구를 하게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얘기였다.
당연히 힘 있거나 유명한 교수들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리기 마련이었다.
수혁은 태화 의료원 교수이면서 동시에 부센터장이기도 해서 최근 국내 학회에 가면 늘 그렇게 되었더랬다.
‘와 진짜 아무도 안 오네.’
[약간 섭섭하네요.]
‘뭐……. 그래서 더 좋기도 하지. 정말 마음 편히 학회를 즐길 수 있잖아.’
[그렇긴 합니다.]
사실 수혁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학회 발표가 있는 상황 아닌가.
그걸 끝내야 즐길 수 있는 게 학회였다.
사교적인 성격도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일 뿐, 발표가 주를 이룰 수밖에 없는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수혁도 바루다도 전혀 발표에 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케이스 리포트 수준인 데다가 워낙에 발표를 많이 해 보지 않았나.
모르긴 해도 싱가포르라고 해서 수혁의 발표가 통하지 않을 거 같지도 않았다.
“자, 이제 자리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최근 급증하고 있는 기회감염에 대한 패널 토의, 곧 시작하겠습니다.”
해서 긴장감이라고는 하나 없는 얼굴로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니 좌장을 맡은 나이 지긋한 교수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는 대체 왜 좌장은 항상 저렇게 나이 많은 교수를 쓰나 했는데, 학회에 많이 와 보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르르.
일단 그 교수 밑으로는 다 말을 잘 들었다.
지금도 그랬다.
그렇게 어수선하더니만 순식간에 자리에 앉고 있지 않나.
덕분에 수혁의 양옆도 꽉 찼다.
“음.”
“으음.”
둘은 수혁을 향해 인사를 건네려다가 멋쩍은 표정을 짓더니 서로 인사를 건넸다.
암만 봐도 아는 얼굴이 아닌 데다가 목에 걸린 명찰을 보니 외국인이었기에 그랬다.
‘얘는 여기 왜 왔지?’
‘말이 국제 학회지……. 사실 한국에서까지 올 만한 학회는 아닌데.’
‘설마 초청연자인가?’
‘초청연자라고 하기엔 또 젊은데…….’
이제는 더 이상 국제화 시대라는 말을 쓰는 것도 애매할 정도로 초연결 사회로 진입한 지 오래된 마당 아닌가.
사실상 모든 학회가 국제 학회를 표방하고 있다고 보면 되었다.
심지어 대한민국의 공식 학회들도 대부분 한국에서 열리고 참가자도 절대다수가 한국인이면서 영어로 진행하고 있을 지경이었다.
싱가포르는 애초에 영어를 쓰는 나라인 데다가 국제도시라는 명성을 얻은 지도 오래다 보니 이 학회도 명색은 국제 학회였다.
초청연자들도 꽤 있었고.
하지만 암만 봐도 수혁은 뭔가 싶은 모양이었다.
‘엄청 얼굴 들여다보네…….’
[수혁이 딴 건 몰라도 동안은 동안이죠. 외국에서 온 레지던트라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긴 다른 나라 같으면 나 레지던트 나이이기도 해.’
[아, 그렇네요. 그렇다고 이렇게 들여다볼 일인가 싶기는 한데.]
‘아, 시작한다.’
과도한 관심이 슬슬 부담된다 싶을 무렵, 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패널로는 마운트 엘리자베스 병원 감염내과 리 교수님, 창이 병원의 장 교수님, 리틀 페이지 병원의 왕 교수님께서 나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도 좌장이자 패널로 토의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곧 시작한다는 얘기였다.
아까보다 더더욱 소란이 가라앉았다.
예전보다야 패널 토의라는 것에 관심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하여간 기라성 같은 대가들이 나와서 떠들어 대는 얘기 아닌가.
아무리 근거 중심 의학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고 해도 대가의 경험의 가치를 폄훼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다 주워들어 두면 쓸 일이 있을 터였다.
‘수준이 어떤지 볼까.’
[흥미롭네요.]
비슷한 이유로 다들 귀를 기울이는데 오직 한 명 수혁만이 시건방진 얼굴로 넷을 바라보았다.
양옆에 있던 젊은 교수 둘은 이놈이 미쳤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수혁은 바루다를 만난 이래 점점 변화해서 이제는 어디 한번 골몰하면 옆에서 뭔 짓을 해도 모르는 집중력의 소유자가 된 지 오래였다.
“기회감염이란 말이 등장한 것은 꽤 오래되었습니다. 의학사에 에이즈가 등장하면서부터니까…… 벌써 수십 년은 되었죠.”
덕분에 수혁은 양옆보다는 앞에서 하는 얘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좌장이었다.
좌장이라기보다는 약간 MC 느낌이 들었는데, 원래 좌장이 하는 일 중에 이런 것도 있기는 했고 이현종이 좌장을 볼 때는 아예 패널 토의를 주물러 터뜨릴 때도 있어서 수혁은 꽤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 기회감염이 비단 HIV 감염자들에게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HIV 감염자들은 약들이 나오면서 어느 정도 조절이 가능한 시대가 왔죠.
“네, 교수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제는 중환자 전반에 걸쳐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암 환자들의 생존 기간이 오래되면서…… 더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도 암 환자에 있어 제일 중요한 지표는 5년 생존율로 인식되고 있기는 한 상황이었다.
왜냐면 5년간 살았으면 암이 다 나았다는 걸 의미하던 시대가 꽤 길어서 그랬다.
하나 지금은 항암제의 발달로 인해 다 낫지 않은 암 환자도 5년 이상 생존하는 시대가 차차 열리고 있었다.
이에 더불어 부작용까지 줄어들어서 암과 함께 여생을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었다.
‘혈종 학회였으면 아마 5년 생존율에 대한 논의가 나왔겠지?’
[네, 그렇습니다. 사실상…… 변해야 할 개념 중 하나죠.]
‘그러니까 말야.’
수혁은 배경 지식이 워낙 뛰어난 탓에 영 딴생각을 하면서 듣고 있었다.
“네 병동 감염 추이를 보면 항생제 내성 박테리아, 소위 슈퍼 박테리아도 문제가 되고 있지만……. 암 병동만 따로 떼어 놓고 보면 기회감염이 가장 커다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마운트 엘리자베스에서는 어떤 균이 가장 호발 하죠?”
“아무래도 곰팡이입니다.”
“저희도 그렇습니다.”
“저희도.”
“이건 다 마찬가지인 거 같네요. 저희도 자세한 통계는 수치를 들여다봐야 알겠지만 일단 제일 많은 건 곰팡이입니다. 그 외 기생충이나 뭐 이런 감염들도 있기는 하죠.”
네 패널은 같은 감염내과 교수들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원래 친한 사람들이라서 그런가. 꽤 공감대를 형성해 가면서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보통 이현종이 낀 패널 토의를 많이 보아 온 수혁으로서는 낯설기만 했다.
아니, 신현태도 패널 토의에서는 일부러 좀 반대 의견을 내는 편이지 않나.
[그래야 발전된 의견이 나온다고 하죠.]
‘다 그래그래 할 거면 MT를 가지 왜 학회를 오냐고도 했지.’
[그건 이현종이죠?]
‘어? 당연하지.’
하나 이쪽은 분위기가 좀 달랐다.
예전의 수혁이었다면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들었을 터였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하지만 이현종과 오래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바루다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뒤늦게 발현한 더러운 본성 때문이지는 몰라도 속이 근질근질했다.
‘아……. 질문하고 싶다.’
[저도.]
심지어 바루다도 말릴 생각이 없었다.
아마 이곳이 싱가포르가 아닌 국내였다면 손을 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낯선 타국이라는 생각이 유일한 브레이크가 되어 수혁을 말려 주고 있었다.
“그럼 곰팡이 감염에 대한 모니터링은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아, 입원 환자요?”
“외래 환자도 좋고요.”
“사실…… 곰팡이 감염은 워낙 진행이 빠르기도 하고……. 모니터링은 어렵다고 봅니다. 최대한 빨리 캐치 하는 게 중요한데 이것도 사실 어렵죠.”
“그렇긴 합니다. 이게 보통 부비동과 같이 눈에 잘 안 보이는 곳에서 발현하다 보니…….”
“후욱후욱.”
말려 주고 있기는 한데 점점 더 참기는 어려웠다.
듣다 보니 너무 반박하고 싶은 의견들을 남발해서 그랬다.
딱히 틀린 말들은 아니었다.
명색이 다들 명망 있는 감염내과 교수들인데 당연한 얘기 아닌가.
하지만 저렇게 다들 동의만 하고 있으면 절대 발전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의 학풍은 아니, 태화의 학풍은 저렇지 않았다.
애초에 이현종부터가 기존 학회 의견에 반발하는 논문을 내서 석좌교수까지 해 먹지 않았나.
“맞습니다. 이게 참 아직은 어쩔 수 없는…… 그런 부분이 있네요.”
“네. 그나마 좋게 생각해 보면 기회감염이라는 것이 생긴다는 것부터가 면역력이 저하된 상태로 오래 살아서이지 않습니까? 그만큼 현대 의학이 진보했고 또 각자 속하신 병원들이 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죠.”
“후욱후욱.”
“음?”
필사적으로 참기는 했으나 숨이 거칠어지는 것은 참기가 어려웠다.
어영부영 맨 앞자리에 앉지만 않았어도 사실 옆에 있는 사람들만 알아챌 정도였을 터였다.
하지만 하필 맨 앞자리인 데다가 워낙 집중해 버린 까닭에 더 앞으로 튀어나와 있는 상황이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과호흡하시는 거 같은데.”
“어어.”
덕분에 패널들 모두가 수혁에게 집중했다.
수혁으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아니, 과호흡은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복장이 터질 거 같았으니까.
“지금 해결이 어려울 수는 있습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이신지. 아픈 게 해결이 안 된다고요?”
다들 의사이니만큼 수혁을 여전히 환자 취급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여차하면 수혁의 입에 갖다 대려고 비닐 봉다리까지 꺼냈다.
하지만 수혁의 숨소리는 오히려 말을 이어 나가면 이어 나갈수록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대신 다른 이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열 받아서 그랬다.
“다들 감염내과 의사들 아닙니까? 근데 기회감염이 생기는 것 자체가 현대 의학의 발전에 의한 것이니 좋은 일이라 치고, 지금 발생하는 감염 대처에 대해서는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가요?”
“아니, 우리도 경험을 얘기하기는 할 겁니다. 하지만 죄의식을 갖지는 말자 이거죠.”
“내 환자가 빨리 진단 내렸으면 살 수도 있는 병으로 죽었는데 죄의식을 갖지 말자니, 그게 뭔 소리지?”
“너무 이상적인 접근을 하네. 보아하니 레지던트 같은데……. 아직 어려서 그런가. 같이 온 교수님은 어디 가시고 혼자 덜렁 여기 왔어.”
기분이 나빠진 좌장이 쏘아붙였다.
할 수 있는 말이긴 했다.
버릇이 없기는 하지 않나.
하지만 수혁은 자신이 하는 말에 대체 어떤 반박이 들어올지가 궁금해서 다른 게 보이지 않게 된 상황이었다.
[옳지, 잘한다. 그래야 우리도 저들도 실력이 늘지.]
바루다가 악마처럼 귓가에 대고 속삭이고 있다 보니 더더욱 그랬다.
“아,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태화 의료원 통합진료센터 부센터장 이수혁입니다. 일단 지금까지 말씀하셨던 거…… 하나하나 짚어 가면서 질문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