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1화 도장 깨기? (1)
“질문 있습니다.”
전혀 핫하지 않던 장소인 패널 토의를 완전 핫플로 만들어 버렸던 주인공 이수혁이 손을 들었다.
‘하.’
그 바람에 방금까지만 해도 당당한 얼굴로 발표를 이어 나가던 레지던트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아까 왕팡 때문에 가서 구경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그랬다.
생각해 보면 그냥 할 수 있는 말을 한 것뿐이긴 했다.
하지만 좌장을 맡고 있던 교수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교수들도 나름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세 치 혀로 아주 박살을 내지 않았나.
“안녕하세요, 태화의료원 통합진료센터 부센터장 이수혁입니다.”
수혁은 그러거나 말거나 소개를 이어 나갔다.
딱히 파괴해 주겠단 생각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수혁은 그저 온전히 학회를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학회장이야말로 진정한 지적 유희의 현장 아닌가.
이곳에서야말로 날 선 지식인들의 공방이 이루어져야 정상이었다.
그래야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포장하지 마세요. 그냥 재밌어서잖아요.]
‘인정.’
[저도 인정.]
물론 수혁이 딱히 의학 발전을 위해 이러는 것도 아니긴 했다.
그저 재미있었다.
‘웃네……. 악마…….’
그러다 보니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 미소를 본 레지던트의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
사실 이 발표의 토대가 된 연구가 더럽게 힘들긴 했지만, 구멍이 아예 없는 건 아니기도 해서 더했다.
“일단 식이 행태에 관련한 연구를 진행했다는 점에 대해서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사실 이게 아주 어려운 연구잖아요? 덕분에 어떤 개념이 등장했을 때 오히려 학계의 대응이 제일 느리기도 하고요.”
“네, 감사…… 감사합니다.”
근데 일단 시작이 칭찬이자 좀 당황스러웠다.
‘하긴 왕팡 말에 따르면 이 사람 진짜 인격자라고…….’
왕팡의 사심이 엄청나게 들어간 말이 떠오를 지경이었다.
“그리고 또 당뇨 환자에 한정해서 했다는 것도 좋았습니다. 당뇨 환자들에 있어 체중 감소는 곧 질병 경과의 호전을 뜻하니까요.”
“감사합니다.”
“헌데…….”
“아.”
하지만 수혁이 빙글빙글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바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럼 그렇지라는 느낌이랄까.
웃긴 건 아까 패널 함락전을 보았던 레지던트들도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냥 의리 없는 새끼들이라고 욕하는 것도 좀 애매한 일이었다.
확실히 학회랍시고 모여서는 발표를 해 봐야 별다른 코멘트도 없고, 오히려 학회 끝나고 갖는 술자리에 더 의미를 두는 데 신물이 나지 않았던가.
교수들이야 본인들이 그걸 원하고 있으니 전혀 문제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젊은 레지던트들에게는 시간 낭비라고만 느껴졌다.
‘그 대상이 꼭 나일 필요는 없지…….’
거기에 수혁이라는 괴물이 혜성같이 나타나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으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주인공이 된 레지던트야 죽상이 될 수밖에 없지만 나머지는 다들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삭센다’라고 하는 약이…… 결국 복부 팽만감을 일으키는 약이지 않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음식에 대한 갈망을 건드리는 게 아니라, 그저 식사량을 떨어뜨리는 거죠. 맞습니까?”
“네네. 맞습니다.”
음식에 대한 갈망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개념.
이게 언뜻 보면 굉장한 단점처럼 보일 수도 있을 터였다.
배가 그렇게 고프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과 식욕을 떨어뜨리는 건 엄밀히 다른 얘기지 않나.
환자가 배가 고프지 않아도 계속 먹는 사람이라면 별 소용이 없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되었으니.
하지만 이것 덕에 삭센다는 정신과적인 부작용을 극단적으로 줄이는 약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당뇨약으로 만들어진 약이니만큼 안전하기도 해서 다이어트 약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아주 치명적인 단점이 있는데…….”
그렇다고 단점이 없겠나.
다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갈망이 있는 환자들 중…… 디저트나 음료에 대한 갈망이 있는 환자들에게는 별 효과가 없지 않습니까?”
“아, 네.”
“그 점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심지어 환자 분류에서도 고려하지 않았는데 이유가 있나요?”
“그게.”
레지던트가 생각했던 본인 연구의 문제는 이게 아니었다.
아예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이 나왔다는 건데, 사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얼토당토않아야 했다.
‘와……. 이거…… 날카로운데.’
하지만 수혁의 질문은 매우 적절한 질문이었다.
실제로 위 내에 풍선 시술과 같은 삭센다와 비슷하거나 더 상위 효과를 내는 시술에서도 이게 문제가 되지 않던가.
‘어쩌면…… 이 연구에서 체중 감량 효과가 없다고 분류된 환자들이…….’
환자 보면서는 했던 말이기도 했다.
초콜릿이나 탄산음료 먹으면 말짱 꽝이라고.
하지만 연구에 동원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교신저자께서 답해 주실 수 있나요? 레지던트 입장에서는 어려울 수 있는 질문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발표를 맡았던 레지던트가 ‘흐’, ‘하’와 같은 소리만 내고 눈알을 굴리자, 수혁은 이내 좌중을 돌아보았다.
보통 레지던트가 발표하면 그 연구를 봐준 사람이 하나는 들어오는 게 예의이지 않나.
그래야 이런 상황에서 답을 해 줄 수 있을 테니까.
‘하…….’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아서 들어와 있기는 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이 질문에 답할 능력은 없다는 점이었다.
‘그렇네……. 왜 이걸 스터디 디자인할 때 생각을 못 했지?’
그렇다고 고개만 숙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까부터 레지던트가 방황하던 눈동자를 자기 교수에게 향하기 시작해서였다.
‘새꺄, 눈치 없냐?’
살짝 눈을 부라려 봤지만 지금 그런 게 눈에 들어오진 않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더 집중되기만 해서 도움이 되지 않았다.
“흠흠.”
해서 교수는 도살장에 오르는 심정으로, 하지만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다.
“아, 교수님.”
“네, 저는…… 리틀 페이지 병원의 내분비내과 리우청입니다.”
“네, 닥터 리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배제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면 듣고 싶습니다.”
수혁은 그런 리우를 보면서 눈을 빛냈다.
옳지는 않더라도 그럴싸한 논리가 있다면 좋겠단 생각을 하면서였다.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해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란 말인가.
더욱이 바루다를 탑재하고 있는 수혁이라면, 확실히 발전할 수 있을 터였다.
‘이 새끼……. 칼로 찔러 놓고 웃네.’
하지만 그런 논리가 없는 상황에서 빙글거리는 수혁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화만 났다.
“특별히…… 없습니다. 저희 레지던트 하는 걸 제가 더 잘 봐줬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내 잘못이요 라고 하는 것도 좀 그렇단 생각이 들었다.
명색이 교수고, 상대가 싱가포르 사람도 아니고 대한민국 사람 아닌가.
‘교수님…….’
심지어 리우청은 학술위원회의 일원이었다.
이현종이 수혁을 뒤늦게 꽂아 넣을 때 관여한 사람은 아니지만, 하여간 학술이사가 수혁을 미워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해서 대강 아무 시간에나 구겨 넣었을 정돈데 와서 이렇게 깽판을 칠 줄이야.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았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이건 무슨 장판파의 장비도 아니고 천하 무쌍이었다.
“그렇군요……. 음. 그럼 하나만 더요.”
아니, 무쌍 정도가 아니라 잔인하기까지 한 듯했다.
여기서 또 뭘 묻겠다고 할 줄이야.
이쯤 되면 교수를 묻겠다는 거 아닌가?
“메소드 앤 메테리얼 부분을 보면 연구 중간에 중도 탈락한 환자들이 있는데, 이유를 명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아.”
원래 연구라는 게 시작할 때 꽤 많은 환자와 함께 시작한다고 해도 끝까지 다 데려가진 못하는 법이었다.
인생에는 피치 못하는 사정이라는 게 생기기 마련 아닌가.
아니면 그저 귀찮아져서 안 오는 환자들도 많았다.
혹은 먼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거나, 심지어 급작스럽게 다른 심각한 병에 걸릴 수도 있고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걸 다 퉁 쳐서 그냥 중도 탈락이라고 표현했는데, 수혁이 그걸 비집고 들어온 것이었다.
그저 시비 걸기 위함은 아니었다.
‘보니까 환자 대상이 당화혈색소가 높고…… 현재 약으로 잘 조절되지 않는 당뇨 환자들이었지?’
[네, 그 말은 곧…… 염증에 취약하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런데 삭센다는 주사잖아. 배에 셀프로 놔야 하는 주사.’
[감염의 위험은 언제나 있죠. 인슐린도 마찬가지지만…….]
‘그만큼 경각심을 갖고 교육을 했을까? 인슐린하고 비교하면 얼마나 차이가 날까?’
[궁금하군요. 이건 답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름대로 제대로 된 이유가 있었다.
해서 수혁은 눈을 반짝이며, 치열하게 수혁의 눈을 피하고 싶어하는 교수에게 물었다.
“따로 분류를 해 두셨는지요? 아무래도 환자들이 당뇨 환자들이다 보니…… 탈락 이유가 중요할 거 같은데. 가령 원래보다 조절이 더 어려워졌을 수도 있고, 당뇨 합병증이 발생했을 수도 있고요.”
“아…….”
사실 교수는 냅다 화를 낼까 싶기도 했다.
대체 누가 연구하면서 중도 탈락자까지 챙기냐고 하면서.
하지만 듣고 보니 확실히 챙겨야 했을 거 같아지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학회장에 있는 모두가 그랬다.
몇몇 입 싼 전공의들은 저들끼리 이런 얘기도 나누기 시작했다.
“그렇네, 애초에 이 연구가 당뇨 조절을 위한 연구잖아.”
“야야. 그렇게까지 심혈을 기울이겠냐? 딱 보니까 삭센다 거기서 돈 받아서 진행했는데.”
“아, 발표에서는 그런 얘기 안 해도 되지. 참?”
“응. 나중에 논문 나오는 거 봐 봐. 분명 펀딩 내용 나온다. 생각을 해 봐. 삭센다 그 약이 한두 푼 하는 약도 아닌데……. 어떻게 그냥 하냐? 연구 목적이면 환자 부담금 줄여야 될 텐데.”
“아, 그렇네.”
딱히 의학적인 말들은 아니었지만, 이 또한 날카로운 말들이긴 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얼렁뚱땅 잘 넘어가고 있었는데 이런 말이 나오게 해?
‘하.’
아니나 다를까, 뒤를 돌아보니 기대감 어린 눈으로 들어와 있던 삭센다 측 직원이 후다닥 나가는 게 보였다.
이런다고 뭐 문제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펀딩을 받고 연구하는 게 잘못은 아니지 않나.
아니, 이런 펀딩이 없으면 요새 연구를 어떻게 하나.
문제는 학회에서 삭센다 자체가 쪽팔림을 당한 것처럼 되었단 점이었다.
“안 하셨군요? 아쉽습니다. 저는 삭센다 사용 시 복부 감염이나 봉와직염, 단독 등의 부작용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빈도가 어떤지가 궁금했는데.”
“아.”
수혁은 말없이 서 있는 교수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누가 봐도 비난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정말 아쉽다는 말투와 표정일 뿐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교수가 초라해지고 있었다.
뛰어난 학자로서 당연히 품어야 할 호기심을 풀어 주지 못한 셈이 되었으니까.
‘이런 제기랄……. 이현종보다 더한 새끼네, 저거.’
한편 소란이 자꾸 인다는 말에 먼발치에서 수혁을 지켜보고 있던 학술이사는 이를 갈았다.
“안 되겠어, 애들 모여 봐. 내일 저 인간 발표 대책 회의해.”
“네? 아,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