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583화 (583/1,303)

583화 바로 이것이 일타 강의입니다 (1)

“흠흠.”

수혁은 인파 속에 선 채 헛기침을 해 댔다.

불과 어제 오전만 했더라도 수혁은 이 학회에서 듣보잡이었기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만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단 하루 만에 수혁은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어제 수혁이 워낙에 인상 깊은 짓을 하기도 했거니와 의사 사회가 국적 불문하고 말 많은 사회다 보니 소문이 워낙 빨리 퍼져 버린 탓이었다.

‘이수혁이다.’

‘맞아?’

‘지팡이 짚고 있잖아. 지팡이.’

‘아, 맞네. 저렇게 젊은데 지팡이 짚을 사람이…… 별로 없기는 하겠지?’

거기에 더해 수혁의 외양은 꽤 특이한 편이었다.

얼굴 생김새나 키, 체형이 그렇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지팡이가 그랬다.

김선웅 교수에게 수술을 받고 난 후로는 어느 정도 없이 생활이 가능해지기는 했다.

가령 연구실 내에서 움직이는 건 그냥 되는 정도?

아니면 집에서 물 떠먹거나 화장실 갈 때는 없어도 되는 정도?

하지만 그 외에 많이 걸어야 할 때는 여전히 필요했다.

그리고 그 지팡이가 일종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 있었다.

‘어제 패널 토의부터 다 찢었다던데.’

‘근데 들어 보니까 진짜 저 사람 말이 맞더라. 아니……. 그게 감염내과 교수들이 할 말이냐?’

‘그렇지. 의사가 되어 가지고 환자를 지레 포기하면 어쩌라는 거야. 다 해 봤는데 잘 안 되네요도 아니고 이만하면 잘하고 있으니까 그냥 만족하자는 식으로 말했다며.’

‘그 후로도 다 조지고 다녔더라. 발표 질문만 하면 벌벌 떨었대.’

‘그거 내 친구야. 오늘 안 옴.’

‘와……. 하긴 트라우마 되지. 억지로 까는 것도 짜증 나고 화나는데……. 속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반박이 안 되는 내용이었다며?’

레지던트들에게는 특히 어제 수혁의 활약이 절대적으로 깊은 인상을 남겨 버린 참이었다.

매너리즘에 빠져 버린, 말로만 국제학회지 사실상 싱가포르 내 교수들의 사교장이 되어 버린 학회에서 이만한 충격을 남긴 사람이 없어서였다.

아니, 레지던트들뿐만 아니라 젊은 교수들도 상당수 수혁의 움직임을 호의적으로 보고 있었다.

‘한국 학회는 저렇게 하나?’

‘내가 본 적 있는데…… 심장 학회는 그러더라. 이현종인가? 내가 이름이 잊히지 않는 교수가 있는데 진짜 멋있었어.’

‘그러니까 우리가 한국한테 안 되지……. 벌써 논문으로도 밀린 지가 언제냐.’

‘그것도 그래. 꼰대들……. 언제 적 싱가포르냐고.’

‘에이…….’

원래 의사 사회라고 하는 것이 수직적일 수밖에 없기는 했다.

수천 년을 도제식 교육으로 지식을 전수받아서 그랬다.

애초에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보면 ‘나는 이 지식을 나 자신의 아들들에게, 그리고 나의 은사들에게, 그리고 의학의 법에 따라 규약과 맹세로 맺어진 제자들에게 전하겠노라. 그러나 그 외의 누구에게도 이 지식을 전하지는 않겠노라.’라는 구절이 나올 정도로 폐쇄적이었다.

아들과 소수의 제자들 말고는 아예 가르치지 않겠다는 거 아닌가.

그 말은 곧 스승의 눈 밖에 나면 절대 의학 지식을 전수 받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

그렇다 보니 여전히 스승의 권위가 엄청났다.

‘일단 들어가자. 빨리 안 들어가면 서 있을 틈도 없을걸.’

‘그걸 또 복수하겠다고 한 거지?’

‘응. 내 친구가 지금 학술위원회 막내인데 어제 그렇게 한숨을 쉬더라. 대체 왜 이런 짓을 해야 되나 하면서.’

‘한심하지……. 하여간 안됐네. 아무리 천재라도…… 사실 학술이사님은 보통은 아닌데.’

‘그건 그래. 게다가 심장 전공도 아니더라고.’

세상은 빨리 변하고 있는데 윗대가리들은 여전히 고리타분한 얘기나 하고 앉았고, 옛날얘기나 하고 있으니 진취적인 아랫사람들은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서 주류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여기고 있던 찰나에 혜성같이 나타난 외국인 교수가 윗대가리들을 강의장에서 대놓고 참수를 했으니 어찌 신이 나지 않을까.

레지던트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대놓고 티를 낼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이들은 뭐가 되었건 이 학회 내에 평생 종속된 사람들이니까.

“지나갈게요.”

“아, 네.”

수혁은 수군대는 분위기 속에서 천천히 앞으로 향했다.

학회장은 콘서트장을 방불케 할 만큼 붐볐는데, 그럼에도 일단 맨 앞자리는 비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발표자를 앉게는 해 줄 모양이었다.

하지만 딱 앉자마자 아까와는 좀 다른 수군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고.’

‘지적질이 제일 쉬운 법이지.’

‘거참 젊은 사람이 말야……. 못된 버릇이 있어.’

아주 적대적이었다.

아예 학회장을 열자마자 들어와서 앞자리를 채운 모양이었다.

질문 공세 전에 심리적인 압박도 하겠다는 거 같은데, 애석하게도 별 소용은 없었다.

수혁이 다른 건 몰라도 멘탈 하나는 원래부터 좋지 않았나.

‘어디…… 다른 분들은 어떤 강의가 있나.’

[케이스 리포트 할 만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꽤 들을 만할 겁니다.]

아예 듣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팸플릿 순서만 보고 있었다.

그러니 뒤에 있던 이들로서는 열불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저러네.’

‘안 들리는 척해도 소용없어.’

‘거참 거…… 아오.’

일부러 들리라고 더 크게 말하는 이도 있었다.

수혁은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 팸플릿을 슥 훑었다.

[오늘 점심은 왕팡이랑 양 사 줄 겸해서 요 앞에 호커센터 가는 게 어때요? 도시락은 영 별로던데.]

‘그럴까? 하긴 싱가포르 왔으면 호커센터를 가야 된다고 하더라.’

[그러니까요. 푸드 코트처럼 되어 있어서 이것저것 먹을 수 있다더라고요. 저는 칠리크랩 다시 먹고 싶군요.]

‘좋지. 칠리크랩…….’

[커리크랩도 좋고요.]

‘오……. 커리…….’

심지어 속으로는 먹을 거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이게 바루다가 맛을 재현해 주거나 하기 때문에 남들이 하는 상상과는 궤를 달리하는 면도 있다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수혁을 어떻게든 골릴 생각만 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정말이지 열불 뻗치는 일이었다.

‘와……. 나 혈압.’

‘교수님 진짜 심장도 빨리 뛰는데요?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

‘괜찮아. 약 먹는다. 약 먹고 저 새끼 조진다.’

나이가 좀 있는 학술이사는 뒷목을 잡고는 켁켁거렸을 지경이었다.

하여간 시간이 되었으면 발표는 시작되어야 하는 법이었다.

아무리 높은 사람이 와 있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좌장을 맡은, 그러니까 시작 전부터 학술이사에게 부탁을 받은 교수가 입을 열었다.

뎅뎅뎅.

그 전에 왕팡과 같이 준비위원을 맡은 레지던트들이 종을 쳐서 이제 그만 복도에 나와서 농땡이 피는 이들이 학회장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이 방에 한해서는 별 의미 없는 짓이었다.

이미 미어터지도록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

아마 전날 술 진탕 마시고 대강 진행하는 게 일종의 법칙처럼 자리 잡혀 있는 싱가포르 내과 학회에서는 둘째 날 첫 강의가 이만큼 붐비는 건 사상 처음 있는 일일 터였다.

진귀한 광경이다 이건데, 그 때문에 왕팡을 비롯한 준비위원 중에는 사진을 연신 찍어 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 이제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첫 발표는…… 누구더라.”

하여간 종소리와 함께 입을 연 좌장은 지금 이 학회에 참석한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는 수혁의 이름을 까먹은 척 중얼거렸다.

학술이사의 눈치를 보면서였다.

‘이런다고 멘탈이 흔들릴까요?’

하여간 시키니까 이렇게 하기는 하는데, 암만 봐도 수혁은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세상 편안해 보이는 얼굴로 멀뚱히 자신을 보고 있지 않나.

저런 게 연기일 수도 있지만, 저 정도 연기를 할 수 있는 인간이면 배우를 해야지, 의사를 하면 안 될 거 같았다.

“아, 네. 태화 의료원의 이수혁 교수입니다. 외국 병원이다 보니 제가 낯설어서 이것참 죄송합니다. 하여간 나와 주시죠.”

아무튼, 좌장은 수혁의 소개를 끝냈다.

누가 봐도 노회한 교수가 할 만한 실수는 아니어서 레지던트들을 중심으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진짜 개유치하네…….”

“뭐 저렇게 하냐.”

“이러니까 우리가 한국한테 안 되지.”

“왜 이렇게 쓸데없이 자존심을 부려? 지금 이거 복수하겠다고 몰려온 것도 웃기는 일인데…….”

세련되지 못한 방법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작 이 일을 저지른 좌장은 억울하기만 했다.

‘아, 나도 원해서 이러는 거 아니라고. 얘들아…….’

좌장도 수혁이 하는 짓이 마음에 막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학술이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런 짓을 하는 게 더 싫었다.

들어 보니 실제로 할 만한 말을 하지 않았나.

오히려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무도 그런 말을 못 했다는 게 문제 같았다.

얼마나 학회가 경직되어 있으면 윗사람 말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단 말인가.

근거 중심 의학으로 대세가 돌아가게 된 것이 벌써 수십 년인데, 아직도 이런다는 건 정말이지 한심한 일이었다.

딸깍.

딸깍.

소개가 한심했건 노골적이었건 간에 관계없이 수혁은 담담한 얼굴로 지팡이를 짚고 단상 위에 올랐다.

딸깍.

일부러 지팡이를 세게 짚어서 소리를 냈다.

의사들은 보통 학회를 엄청나게 보기 마련 아니던가.

하지만 아무리 많이 다녀 본 사람이라 해도, 지팡이를 짚으며 올라온 사람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런 소리를 들은 것도 처음이었고, 심지어 이미 수혁에게는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상황이지 않나.

그렇다 보니 아직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해진 가운데 이목을 끌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태화 의료원 통합진료센터 부센터장 이수혁입니다. 오늘 제가 발표할 내용은…… 우리 센터에서 심장 원발성 림프종에 대해 진단 및 치료했던 경험 대해서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심지어 수혁은 발음이 아주 좋은 편이었다.

원래 한국어 발음이 모음 때문에 어려운 편이지 않나.

한국어 발음 잘하는 사람은 영어건 중국어건 다 잘하게 되어 있었다.

거기에 더해 바루다의 도움을 받는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환자는 숨찬 증세를 주소로 응급실에 왔습니다. 당시 시행한 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수혁은 그렇게 완벽한 발음과 말투 그리고 톤을 이용해 발표를 이어 나갔다.

환자가 원래는 어떤 증상으로 왔는지, 그러다 이현종의 눈에 띄고부터는 어떤 진단 과정을 밟았는지를 자세하면서도 중복되는 말 하나 없이 쭉쭉 일목요연하게 말해 주었다.

“와우.”

“발표도 진짜 잘하시네.”

뒤에 있던 레지던트들은 왕팡과 같은 준비위원들을 중심으로 해서 한마음 한뜻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사실 레지던트들이라고 해서 다 수혁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특히 어제 까였던 이들은 지는 잘하면 얼마나 잘하길래 이랬는지 보자고 벼르던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할 말이 없어지는 강의를 듣고 있다 보니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잘한다……. 옆에서 진단 과정을 보는 것 같아.”

“근데 진단 과정을 편집했나? 어떻게 이렇게 물 흐르듯 해?”

“이현종 교수……. 그 사람이 심장내과 그 이현종인가? 그러면 그럴 수도.”

젊은 교수들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는데, 그들이 놀라는 포인트는 좀 달랐다.

발표 자체도 잘하긴 하는데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어서 그랬다.

‘질문 시간 와라.’

‘질문!’

그에 반해 맨 앞에 앉은 이들은 저도 모르게 감탄할까 봐 이를 악물고 질문만 생각하고 있었다.

수혁은 그런 그들이 그저 안쓰러웠다.

‘그냥 듣고 좀 배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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