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585화 (585/1,303)

585화 귀국하자마자 (1)

수혁은 장판파의 장비라도 된 듯, 당당한 얼굴로 학회장 내부를 둘러보았다.

질문 있는 사람 있냐고 방금 말했던 참이었기에, 다들 질문이 없다는 것을 필사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특히 말도 안 되는 질문들을 계속 일삼았고 또 기회만 있으면 계속 질문을 하려고 했던 맨 앞자리에 있는 친구들 중엔 아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학술이사가 특별히 명해서 모인 이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학술이사의 명을 받들어 대항하기엔 학술이사부터가 침몰해 버린 마당이라 그랬다.

“자자, 다음 발표도 있으니까요. 벌써 20분 이상 지체되었습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좌장이 나섰다.

원래 같았으면 사실 벌써 한참 전에 나섰어야 했다.

기껏해야 1시간 반짜리 세션에서 20분 지체가 말이나 될 법한 소린가.

게다가 발표에서 밀린 게 아니라 질문 받아 주다가 시간이 다 가 버렸다.

애초에 이런 발표에서 질문은 대개 2분 내외로 끝내는 게 원칙인데 그걸 이끌어 줬어야 할 좌장이 직무유기를 했다, 이 말이었다.

“네, 교수님.”

뭐 그놈이 그러거나 말거나 수혁은 자기 할 말은 다 한 데다가, 생각보다 질문 수준이 떨어지는 바람에 흥미도 떨어진 마당이라 고개를 숙이고는 감사 인사만 남기고 내려왔다.

그와 동시에 뒤에 서 있던 인원이 우르르 밖으로 빠져나왔다.

수혁이 발표를 더 듣는 대신 밖으로 나와서이기도 했고, 또 애초에 수혁의 발표가 어떤지 보려고 술 먹은 다음 날의 숙취를 견디면서 들어온 이들이 태반이라 그랬다.

특히 레지던트들은 수혁을 거의 무슨 아이돌처럼 보고 있었다.

꼰대 같은 교수들을 한 손으로 쳐부수면서 다니는데, 외양은 젊은 레지던트로 보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잘생기기도 했고?’

여러 버프를 받아서 그런가. 외모도 좋게 보였다.

특히 마당발 중 하나인 왕팡이 하도 그렇게 말을 하고 다녀서인지, 진짜 잘생겼다고 생각하게 된 이들이 많았다.

“교수님, 저랑 사진 한 번만.”

“네? 사진요?”

“네, 사진 좀……. 여기 사인도요.”

“어…….”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서 난데없는 사진 요청과 사인 요청이 쇄도했다.

‘뭐냐, 이거. 나 의산데.’

[의사라고 사진 못 찍어 줄 이유라도 있나요. 그렇게 귀한 얼굴도 아닌데.]

‘새꺄, 그런 뜻이 아니라…….’

[저도 압니다. 생소한 경험이군요. 뭐, 좋습니다. 잘된 일이에요.]

‘뭐가?’

[제가 계속 수혁의 처리 속도를 리뷰 하고 있는 거 알고 있죠?]

바루다의 말에 수혁은 사진을 찍어 주면서 동시에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어두워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잘된 일이라고 여기고 있어서 그랬다.

바루다가 자기 능력을 점검하고 있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꺼림칙한 일일 수도 있지만, 수혁은 일단 긍정적인 인간 아닌가.

좋게 보면 남들은 절대 하기 어려운 종류의 자가 검진을 주기적으로 하고 있다고 보면 되었다.

‘알지, 근데 그게 이거랑 뭔 상관?’

[어떤 종류의 경험이건 간에 새로운 경험이 수혁의 연산 속도를 향상시키거나…… 느려지는 것을 방지한다는 결과를 도출했습니다. 이것도 황당한 경험이니까 어느 정도 효험이 있겠죠.]

‘음……. 최근에 나온 논문이랑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네.’

[네, 그렇습니다.]

인생에 있어 새로운 경험이 젊음을 유지해 준다는 믿음은 꽤 오래된 것이지 않나.

하지만 그것이 실제 의학적으로도 사실인지 여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었다.

일단 실험을 해 볼 수가 없어서 그랬다.

대체 새로운 경험이 뭔지 알고 그걸 선사해 준단 말인가.

물론 최근 들어 60이 넘은 나이에 그 전까지는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일을 시작한 이들의 수명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수명을 비교하고자 하는 연구가 있다고는 하는데, 이 또한 애초에 건강한 이들이 새로운 일을 시작할 가능성이 크지 않겠냐는 반론이 있어 암초에 걸린 상황이었다.

‘노인 인구에 있어서 새로운 음식……. 그러니까 이국적인 음식이나 파인 다이닝에서 나오는…… 익숙한 재료지만 새로운 조리법을 써서 아예 다른 맛을 내는 음식을 먹었을 때, 인지 능력이 올라간다는 보고가 있지.’

[네, 의학적인 연구에 있어서 지나친 확대 해석은 금물이라고 하지만, 이론적으로 새로운 경험과 인지 능력 향상이 연관이 있다는 결론 정도는 얼마든지 내 볼 수 있습니다.]

‘좋군. 좋아. 연예인 된 기분이라 꽤 좋은 경험이기도 해.’

[네네. 얼마든지 즐겨 주세요. 저는 시뮬레이션 돌려 보겠습니다.]

‘너도 좋지 않냐?’

[저야…… 수혁의 엔도르핀 농도가 올라가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습니다만, 미각과 같은 감각을 느낄 수 없는 이상 별다른 느낌은 없습니다.]

‘아.’

대화가 이상하게 끝나기는 했으나, 하여간 좋은 일이라는 것에 변함이 없었다.

뭐가 되었건 간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는데 마다할 일은 없지 않나.

게다가 지금 와서 사인 요청하는 이들은 안대훈하고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양이나 왕팡하고도 좀 다르고.

종교적인 색채보다는 연예계와 같은 색채가 더 강하다는 얘기였다.

“여기…… 어플 써도 될까요?”

“네네. 셀카로 할게요. 이게 더 이쁘게 나와서요.”

“스노우네요? 한국 어플인데, 이거.”

“네, 뷰티는 한국 게 최고예요. 보세요.”

“아.”

“강제로 화장시켜서 죄송합니다.”

비록 두툼한 입술에 붉은 립스틱을 칠하고 그것도 모자라 볼 터치까지 해 버린 사진을 찍고 있기는 하지만.

하여간 사인이라고는 결재 사인만 해 본 입장에서 남들 이름까지 써 가면서 하게 되는 이 경험은 상당히 특별했다.

특별한 만큼 두뇌에 강력한 자극이 될 거란 믿음도 생겼다.

“편안한 비행 되시기 바랍니다.”

그 덕에 나머지 일정도 꽤 신나게 즐길 수 있었다.

원래 학회라는 게 자기 발표가 끝난 다음에야 비로소 진심으로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했거니와 사진 요청하는 친구들이 다들 하나씩 수혁에게 가 볼 만한 명소나 음식점을 알려 주어서이기도 했다.

‘싱가포르…… 좋았다.’

[더할 나위 없었습니다.]

맛있는 음식 진탕 먹은 바루다도 몽롱한 눈을 한 채, 수혁을 따라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이 공항이 도심 가까이에 있지 않아서 보이는 거라곤 울창한 숲뿐이었지만, 어차피 바루다에겐 원하는 장면을 다시 재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상관없었다.

비록 용량 문제로 해상도를 점점 낮추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기는 해도, 대강 비슷한 기분은 느낄 수 있다는 얘기였다.

‘좋군.’

[기내식은 뭐가 나오죠?]

‘일등석이라…… 내가 뭐 예약했더라. 아, 그냥 코스 했는데.’

[좋군요.]

‘좋지. 돈이 좋아.’

[많이 법시다, 우리.]

‘그래.’

싱가포르 출장 와서 나름 해낸 일도 많았다.

김승규 교수를 앞세워 싱가포르 국립병원과의 협상도 성공적으로 이끌어 냈고, 마운트 엘리자베스 병원도 끼게 만들어 냈다.

거기에 더불어 언론도 타는 바람에 태화의 이미지도 좋게 만들었다.

학회도 찢었고.

새로운 신도들과 추종자들도 만들었다.

하지만 수혁은 몰라도 이미 세태와 야합한 지 오래인 바루다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비싸고 편안했던 숙소와 역시나 비싸고 맛있었던 음식들이었다.

따르릉.

그렇게 추억 한 보따리 싸 들고 인천 공항에 내리자마자, 정말 딱 내리자마자 전화기가 울렸다.

‘와……. 귀신이네.’

[센터 번호네요?]

‘어떻게 알고 전화를 걸었지?’

[켜자마자 울리는 거 보면, 오늘 오는 날인 거 알고 미저리처럼 계속 눌러 댄 거 같은데요.]

‘아빠려나.’

[네, 환자 일이면 이렇게까지는 안 할 겁니다.]

추론이 좀 이상하게 흘러갔다.

병원 전화번호로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오는 전화를 보면서 환자가 아니라 이현종일 거라 확신을 하다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현종 전 원장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 싶을 수도 있을 터였다.

“네, 아빠.”

“어, 수혁아! 오는 길은 평안했어?”

“아, 네. 비행기 타고 오는데요, 뭐.”

“그래도 걱정이지. 하여간 잘 왔어. 오늘은 푹 쉬어. 내가 배웅 나갔어야 했는데……. 그게 안 돼 가지고 아휴.”

“환자 보는데 어쩔 수 없죠.”

“어. 그래서 갈 수 있는 놈을 보냈으니까 버스 타지 말고, 그놈 차 타고 집으로 가.”

“네? 그놈? 뭐야.”

수혁은 뭐지 하는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사실 딱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기는 했다.

뭐가 되었건 날아올 놈이 있지 않나.

아마 휴가를 내서라도 올 터였다.

“교주님!”

아니나 다를까, 만남의 광장으로 나가자마자 안대훈을 마주할 수 있었다.

광을 냈는지 뭘 어쨌는지 오늘따라 유난히 더 반짝였다.

“뭔 짓 했어?”

“네? 아, 네. 요새 동호회 있는 날은 신경 좀 씁니다.”

“신경을…… 아니다, 됐다.”

자세히 물어보면 안 될 거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짐이 무겁기도 했다.

싱가포르에서는 리홍이가 도와준 덕에 비서가 짐까지 다 부쳐 줬지만 여기서는 그게 안 되지 않았나.

낑낑대며 끌고 있는 것만도 힘들단 얘기였다.

안대훈이야 수혁의 일거수일투족을 신경 쓰고 있는 이였기에 당연히 그것부터 받아 들었다.

“이리 주세요.”

“어? 어. 근데 되게 무거워. 오래 있어 가지고. 정장도 있고.”

“하하, 저 운동 열심히 합니다.”

“네가? 어……. 그렇네? 언제 했냐?”

“교주님이 언제 뭘 시킬 줄 알고 운동을 게을리하나요. 체력은 신앙. 이게 제 모토입니다.”

“그게 대체 뭔 개소리야. 그보다 너 왜 이렇게 들떴어?”

안대훈이 원래 좀 텐션이 높은 놈이기는 했다.

다른 직장에서는 이 정도가 보통일 수도 있겠지만, 신날 일이 거의 없는 병원에서는 정말이지 드문 일이었다.

늘 낄낄거리면서 다닌다는 얘긴데, 오늘은 그 정도가 좀 심했다.

애가 정말로 정신줄을 놓아 버린 건가 싶을 정도라고나 할까.

수혁은 저도 모르게 오진승 교수의 번호를 찾으며 물었다.

“제가요? 하하.”

“그래, 너.”

“뭐 그럴 수밖에요.”

“뭔 소리지? 여자친구라도 생겼냐?”

“아, 아뇨. 저는 오직 교주님만…….”

“닥치고.”

“싱가포르 찢고 오셨는데 그럼 제가 신나죠. 벌써 다 전해 들었습니다. 학회에서도…… 이 사진은 볼 때마다 울컥합니다.”

안대훈은 그런 수혁의 말을 들으면서도 내내 웃었다.

차에 오르면서도 웃었는데, 그와 동시에 인스타에 올라온 사진 하나를 보여 주었다.

계정 이름까지 보여 주지는 않아서 수혁교라는 이름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냥 사진만 봐도 울컥했다.

모르긴 해도 안대훈과는 좀 다른 느낌의 울컥일 터였다.

“이 새꺄……. 왜 이런 사진을 공유해.”

“좋잖아요. 외국에서도 인산인해라니.…… 왜 우리나라 놈들은 안 이러는지 화나긴 하지만요.”

“아휴.”

“아, 근데 교주님.”

안대훈은 한숨을 연신 쉬고 있는 수혁을 향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표정이 진중해져 있었다.

운전대를 잡아서일 것은 아니라고 수혁은 확신했다.

그런 놈이 아니었다.

[환자 얘기겠군요.]

‘그래.’

[안대훈이 물어 오는 환자는 늘 어려웠죠.]

‘그렇지.’

저도 모르게 기대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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