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6화 귀국하자마자 (2)
‘역시…… 교주님. 제가 오길 잘했죠.’
수혁이나 바루다나 진심으로 어려운 케이스라면 사족을 못 쓰지 않나.
말을 꺼낸 상대가 안대훈이라는 건 이쯤 되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뭐가 되었건 간에 안대훈은 수혁을 잘 아는 사람 아닌가.
그와 동시에 수혁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인생을 갈아 넣고 있는 이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대훈이 가져오는 케이스는 하나같이 어마어마했다.
“음흉한 미소만 짓고 있지 말고 운전을 하든 아니면 말을 해주든 하나는 해 줄래?”
“교주님도 웃고 계시길래요. 이런 얼굴 아니었나요?”
“아니었으면 좋겠다.”
“최대한 노력한 거라……. 아마 맞을 겁니다.”
“아. 아아.”
대훈이 물어 온 케이스만 생각하면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저런 느낌의 미소였다니.
수혁은 정말로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병원에서 떠도는 수혁에 대한 소문들이 하나같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거기에 이런 미소까지 더해지면 정말이지 걷잡을 수 없을 거 같았다.
게다가 눈앞에 안대훈을 놓고서 그렇게 웃었다?
나락이었다.
부우웅.
수혁이 간신히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오는 사이, 안대훈은 천천히 차를 몰았다.
아무래도 수혁이 타고 다니는 제네시스나 이따금 얻어 타는 신현태나 조태진의 차랑은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방금 꿀렁했는데……. 괜찮은 거냐, 이거?”
“아, 이거요? 오래돼서 그래요.”
“그건 나도 알겠어.”
시트가 가죽이 아니라 손으로 문지르면 색 변하는 벨벳도 아닌 뭔가 이상한 소재였다.
계기판에 보이는 km 수는 기껏해야 9만이었는데, 암만 봐도 이상했다.
“아, 이거요. 사기당했습니다. 생각해 보니까 진짜 이상하긴 하죠. 94년식 액셀이 7만이라니…….”
“7만원에 샀다고?”
“아니, 7만 달렸다고요. 교수님 그래도 이거 150 주고 산 거예요. 7만 원이라니……. 제네시스 모신다고 너무 무시하시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닌데 이건.”
액셀이라니.
그보다 94년식이라니.
20년이 아니라 거의 30년이 다 되어 간다는 뜻 아닌가.
하필 그때 차가 공항 고속도로로 접어들고 있어서 수혁은 더더욱 불안해졌다.
[택시 탈걸.]
수혁의 요동치는 심장박동을 느낀 바루다도 불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에 반해 안대훈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부웅.
알고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차 이름은 액셀이지만 아무리 액셀을 밟아도 언제부터인가 80 이상 나가질 않는다 했다.
“고즈넉하죠?”
“아니, 느리다고 다 고즈넉하냐? 너무 시끄럽잖아.”
“원래 이 속도로 달리면 다 이렇죠.”
“아니, 아니야. 이거…… 이거 옛날에 우리 보육원장님이 모셨던 거 같은데…….”
“부자들이 타던 차죠.”
“아냐, 대훈아. 그때도 부자는 그랜저 탔지. 이건…… 이건 소형이잖아.”
“하여간 환자가 있습니다.”
대훈은 얘기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화제를 바꿨다.
같잖은 수작이었지만 놀랍게도 수혁을 상대로 할 때는 항상 잘 먹혀 들어가는 방법이었다.
“12세 남아예요.”
“12세? 어리네? 소아과야?”
“네. 근데 처음부터 소아과가 아니라 센터로 협진 요청이 왔어요. 부산 병원에서 온 요청이라고 들었어요.”
“아……. 우리 병원 환자는 아니었구나. 주소가 뭔데?”
대훈은 잠깐 고민했다.
여기서 환자가 사는 곳을 말하면 어떻게 나오실까 궁금해서였다.
하지만 가뜩이나 후진 차 탔다고 생각하고 있는 마당 아닌가.
물론 대훈에게 이 차는 후지다기보다는 올드 카의 매력을 지닌 좋은 차였지만.
대훈에게 중요한 건 자기 생각이 아니라 수혁의 느낌이었다.
“일단 설사요.”
“설사라. 하필 설사네?”
“네. 워낙 흔한 증세라 거기서도 처음에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긴 모양이에요. 애초에 환자 보호자도 집이 가까워서 큰 병원으로 간 거지, 위중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모양이고요.”
“흐음.”
얘기가 이렇게 돌아간다는 건 역시나 단순 설사는 아니었다는 얘기였다.
수혁도 바루다도 어느새 안대훈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원래 흔한 증상인데 드문 질환일 때가 제일 어려운 케이스여서 그랬다.
“근데 이 설사가 멎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지금 거의 반년째래요.”
“정말 설사는 맞고?”
“아.”
수혁의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었다.
설사를 한다는데 설사가 맞냐니.
하지만 설사의 의학적인 정의를 들으면 이해가 갈 터였다.
설사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좀 묽은 변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액상이나 반 액상 형태를 띠면서 하루 3회 이상을 넘어가는 경우를 의미하기에 그랬다.
“네, 맞습니다. 만성 설사입니다.”
“원인은 불명이고…… 섭생은?”
“확인했다고 합니다. 환자분은 급식을 먹고 있고 아침저녁 모두 가족과 함께 같은 음식을 먹습니다.”
“흐음……. 그래? 설사? 그것만 있어?”
“사실 그 외에 검사를 더 하고 싶어 했던 거 같은데……. 보호자가 완강하게 본원 진료를 희망한 모양이에요. 교주님도 아시겠지만, 교주님이 매스컴도 좀 타고 하셨잖아요. 저 같아도 잘 안 풀리면 교주님 진료를 보고 싶죠.”
교주님 소리가 거슬리지만,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김다현 사장이 수혁을 태화 의료원의 미래로 보고 밀고 있지 않나.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그렇게 했다면야 당연히 별 의미가 없었을 텐데, 김다현쯤 되는 사람이 밀다 보니 어느덧 수혁은 대한민국에서 대중적으로는 제일 유명한 젊은 의사가 되어 있었다.
“그럼 그 외에 다른 건?”
“방금 왔거나 오고 있을걸요. 저도 나오기 전에 들은 거라.”
“그래?”
하여간 수혁은 12살 만성 설사 환자의 병명이 무엇인지 너무 궁금해진 지 오래였다.
잠시 집에 가서 쉴까 어쩔까를 생각했으나, 환자 얼굴도 보지 않고 그냥 갔다가는 잠도 오지 않을 게 뻔했다.
아마 가서 짐만 놓고 다시 오지 않을까?
그러느니 아예 지금 가는 게 맞았다.
“병원으로 갈까?”
“그렇지 않아도 병원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알고?”
“하하, 척하면 척이죠.”
그 속내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안대훈이 맞혔다는 게 짜증 나긴 했으나 뭐 어쩌겠나.
하여간 안대훈이 수혁을 잘 아는 건 사실이니까.
게다가 흡족하기도 했다.
시간 낭비 없이 바로 환자를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먼저 올라가시죠. 저는 주차하고 올라가겠습니다.”
“뭐 얼마나 차이 난나고.”
“전 여기 주차 못 하고 옆에 장례식장에 대야 해서요.”
“아, 레지던트라 그렇구나.”
“네.”
“알았어.”
병원의 주된 수입원 중 하나가 바로 주차비 아닌가.
경영주 입장에서는 솔직히 말해서 교수들도 그냥 다 걸어 다녔으면 싶을 텐데 어찌 레지던트들에게까지 주차장을 내어 줄 수 있을까.
해서 레지던트들은 그나마도 인원수가 아니라 과에 한두 개 나오는 자리마저 다 장례식장으로 배정받아야만 했다.
그렇다면 수혁도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멀쩡한 다리로도 먼 거리를 어떻게 이 다리로 걸어온단 말인가.
딸깍.
해서 수혁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센터로 향했다.
지팡이를 연신 짚어 가면서였는데, 지나면서 든 생각은 확실히 태화 의료원이 좋기는 좋다는 생각이었다.
[시설이 비교가 안 되는군요.]
‘아무래도 들어간 자본이 차이가 많지.’
[규모도 그렇고.]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인구가 진짜 많으니까.’
난데없이 차오르는 국뽕과 함께 수혁은 센터 안으로 들어섰다.
비행기 도착은 3시였지만 원래 이것저것 하다 보면, 또 공항에서 오는 거리도 있고 하다 보면 시간은 꽤 흐르기 마련 아닌가.
6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어, 교수님.”
“교수님,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교수님.”
그럼에도 센터는 북적북적했다.
암만 봐도 원래 있어야 할 인원보다도 많아 보였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하고 있으려니, 하윤이 다가왔다.
“너…… 넌 왜 여깄어.”
“아, 저 여기 아닌 거 알고 계시는구나.”
“당연히 알지. 내가 부센터장인데.”
“요새 센터에 애들 자주 와요. 배울 거 많아서. 안대훈 선생님이 싱가포르 영상도 계속 풀고 해서 재밌기도 하고.”
“아니, 내가 다녀왔는데 그놈은 어떻게 영상이 있냐.”
“대단하죠?”
“그…… 대단하긴 한데.”
전공의가 그쪽으로 대단하면 안 되는 거 아니니? 라는 말을 하려는 찰나, 이현종이 달려왔다.
“아들! 집에 가서 쉬라니까! 아빠 보고 싶어서 왔구나!”
“아, 네네.”
정말 이현종 생각이라고는 하나도 안 한 채, 환자만 볼 생각으로 왔던 수혁은 자신을 얼싸안고 빙글빙글 돌고 있는 이현종을 보면서 마음에도 없던 소리를 해 댔다.
[이럴 때 보면 수혁이 사람이긴 한 모양입니다.]
‘그럼. 다 사회생활이지. 날 얼마나 이뻐하시는데.’
어찌나 표정도 진심처럼 보였는지 바루다마저 칭찬을 해 댔다.
여기서 어떻게 환자 얘기를 꺼내느냐가 관건이었다.
“아, 맞아. 마침 잘 왔네. 환자 하나 오거든? 너 없으면 아무리 나라도 소아과는 좀 그래서……. 너 올 때까지만이라도 기자한테 부탁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부를 필요도 없네.”
다행인지 뭔지 이현종도 환자 보는 것에 환장해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니 남들 같으면 정년 가까워 왔으니 뒷방 노인네처럼 놀기만 해도 될 나이에 이렇게 센터장까지 하고 있는 것 아니겠다.
하여간 수혁이 따로 말을 꺼내기도 전에 환자 얘기를 먼저 꺼냈다.
그리곤 아까 대훈에게 들었던 말을 싹 전달하다가 돌연 응급실로 향했다.
“환자 왔대. 갈 거지? 아, 힘든가? 오늘은 쉴래?’
“아뇨, 아뇨. 볼게요.”
“그래, 이래야 이현종 아들이지.”
“그럼요. 이래야 아빠 아들이죠.”
환자가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서였다.
그와 동시에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상한 말을 주고받으면서 부리나케 걸음을 옮겼다.
‘역시 환자에 미친 사람들…….’
‘교주님과 초대 교주님…….’
당연히 원래 센터에 속한 레지던트들도 뒤를 따랐다.
또 여기 오면 배울 게 많다는 얘기에 와 있던 이들도 따랐다.
그리고 우하윤을 필두로 하는, 진성 수혁교 신도들도 함께였다.
병원 생활이 워낙 바쁘다 보니 다 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 명은 그냥 넘어서 거의 스물 가까이 되는 인원이 되었다.
“자, 드가자.”
이현종은 자기 생각에는 배움의 열정이 타오르는, 그야말로 바람직한 제자들을 돌아보고는 응급실 문을 열었다.
우르르.
거의 뭐 응급실 접수하러 가는 분위기였다.
안에 있던 이들이 죄다 흠칫 놀랐다.
너무 많은 인원이 의사 가운 휘날리면 들어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VIP 오시나?’
‘그런 연락 없었…… 는데?’
태화가 기본적으로 그룹에 속한 병원이다 보니, 태화 오너 일가가 오면 이러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응급실이 아니라 아예 따로 마련된 루트로 오지 않던가.
해서 사람들은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면서 그들의 추이를 살폈다.
‘역시, 역시 태화에 오길 잘했지.’
그리고 이제 막 앰뷸런스에서 내려, 아이 침대 난관을 붙잡고 걷던 아이 보호자들은 뒤에 수십 명을 거느리고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오는 이현종, 이수혁 부자를 보며 안도감에 젖었다.
집단 지성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저들이 다 같이 아이를 봐주면 무조건 나을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