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7화 귀국하자마자 (3)
보호자의 기대와는 달리 환자에게 딱 달라붙은 것은 넷뿐이었다.
이수혁, 이현종 그리고 안대훈, 우하윤.
남들이 보기엔 그냥 의사 넷이 제일 중요한가 보다 싶겠지만.
뒤에 선 추종자들이 볼 때는 어딘지 모르게 종교적인 성스러움이 느껴졌다.
‘교주님에…… 아버지 이현종, 주교들…….’
가르침을 들어야 하지 않겠나.
해서 방해하려고 드는 대신 뒤에 우르르 몰려와 섰다.
그것만으로도 수혁이나 이현종에게는 커다란 도움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대체 어디서 이렇게 의사들이 따르는 교수를 봤겠는가.
이미 이수혁이나 이현종이 유명한 의사고 또 센터도 워낙 유명하다는 걸 알고 왔지만, 그래도 또 눈앞에서 이렇게 권위 있는 모습을 보고 나니 마음가짐이 한층 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 제발 살려 주세요……. 우리 애 이거 어떡해요.”
해서 보호자는 고개를 숙인 채 연신 읍소했다.
그러지 않아도 환자를 볼 생각밖에 없던 두 부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여기 오셨으니까……. 저희가 최선을 다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별거 아닐 거라는 둥, 반드시 고쳐 주겠다는 둥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금기이기도 했지만 사실 딱 보자마자 아 어떤 질환이겠다 라는 견적이 나오면 수혁이나 이현종은 간혹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보호자나 환자가 제일 기다리는 말이란 것을 왜 모르겠는가.
괜히 입 털었다가 결과가 안 좋거나, 또는 지지부진하기만 해도 환자나 보호자가 실망하면서 치료에서 아예 이탈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못하는 말이었다.
다만 여기 있는 두 부자처럼 진료에 미친 사람은 자신감에 실력이 미치기에 정말 가끔은 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만성 설사…… 병적인 설사야.’
[네, 아이 체중이 키를 못 따라갑니다.]
‘단순히 마른 게 아니라…….’
[영양부족으로 보입니다.]
‘아동학대 가능성은?’
[그건 확인해 봐야죠.]
예전 같으면 부모가 자기 아이를 괴롭힌다는 거 자체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너무 끔찍한 일이지 않나.
아동학대라니.
하지만 최근 불거져 나오는 사건들을 보면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만 하는 사안이었다.
어찌나 수가 늘었는지 의협에서 자체적으로 추가 보수 교육을 실시하게 되었을 정도였다.
“일단, 바이털은 괜찮으니까 바로 센터로 가지. 어머님, 주 양육자신가요?”
이현종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쩌는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단순한 케이스는 아니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섣불리 환자 상태에 대해 얘기하는 대신 문진을 시도했다.
“아, 네. 제가 거의 주로 봐요. 아주머니가 계시긴 한데……. 같이 봐요.”
“그렇군요. 그럼 아이에 대해서는 잘 아시겠네요.”
“네, 물론이죠.”
그 자리에 세워 둔 채는 아니었다.
어차피 이동을 해야 했기에 걸어가면서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보호자 입장에서는 조금 불편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누가 들을지 어떻게 알고 병원 복도에서 아이에 대해 얘기한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예외로 쳐도 좋을 거 같았다.
추종자들이 어찌나 많은지, 침대조차 잘 안 보일 지경이었으니.
“좋습니다. 그럼…… 아이 현재 체중이 몇이죠?”
“42요.”
“키는 커 보이는데.”
“네, 166이에요.”
“166에 42라.”
성장기의 남자아이치고는 굉장히 몸무게가 부족한 편이었다.
심지어 급격한 체중 소실을 시사하는 살가죽 늘어남과 같은 소견도 보였다.
“체중이 최근 들어 빠진 건가요?”
“네? 네. 거의 25kg…….”
“얼마나 됐죠? 체중이 빠진 지는.”
“거의 6개월 됐어요. 사실 그때는…… 아유, 이 미련한 년이…… 얘 보고 살 좀 빼라고 했었거든요. 그래서 내심 잘됐다 했어요.”
“자책할 일은 아닙니다. 병인지 몰랐잖아요.”
원래 이현종은 환자나 보호자에게는 꽤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성품이 워낙 특이해서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었다.
애도 없어서 특히 애 있는 보호자에게 그랬는데,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직접 낳은 애는 아니지만, 가슴으로 낳은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는 수혁이 생긴 까닭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이게 정상적인 일이냐고 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실제로 변했는데.”
“네, 감사합니다.”
하여간 보호자는 역시 명의는 말하는 것도 다르다고 생각했다.
말 한마디만으로 보호자의 심금을 이렇게 딱딱 울려 대고 있지 않나.
“아무튼, 그럼 6개월간 25kg이 빠졌다는 거네요?”
“네.”
“그 병원에 간 거는 언제죠?”
“사실 한 20kg 빠질 때까지는…… 애도 저도 별문제 없다고 생각했어요. 밥도 잘 먹고…… 지금 생각해 보면 밥을 잘 먹는데 살이 빠지는 게 이상하긴 했는데……. 하필이면 운동도 시작했었거든요.”
“운동? 어떤?”
운동이라는 말에 이현종은 물론이거니와 수혁도 다시금 아이의 몸을 돌아보았다.
사실 이 정도 나잇대 아이에게 근육 운동을 시키는 건 드문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운동을 꾸준히 하는 아이들은 어느 정도 형태는 잡혀 있기 마련이었다.
특히 키가 이 정도로 큰 아이들은 어려도 태가 잡힐 수 있었다.
‘약간 근육이 있기는 하네.’
[수혁 정도로 보이는데요?]
‘야. 내가 저거보단 많지.’
[성인인 것을 감안해야죠.]
‘아.’
이 아이의 경우에는 애매했다.
해서 수혁도 이현종도 유산소 위주의 운동을 시켰겠거니 했다.
살 빼는 게 목표였다면 당연한 얘기 아니겠나 싶기도 했다.
“피티요.”
“피티……?”
“네. 애가 키는 또래 중에서 큰 편인데 좀 매가리가 없어서요. 남편이 워낙 운동 마니아기도 하고…… 익숙해서요.”
“흐음, 그렇군요. 뭐……. 설사를 하고 있었다면 영양 흡수가 안 돼서 근육 형성이 잘 안 되었을 수는 있었겠습니다.”
“네네.”
근육을 운동했다면 얘기가 살짝 달라졌다.
명백히 근육 획득을 위한 운동을 했는데, 그것도 반년간 피티를 받았는데 저 정도?
“그 피티에서 영양분…… 식단도 관여했나요?”
궁금증이 인 수혁이 환자를 살피다 말고 물었다.
보호자는 누가 봐도 연장자에 윗사람으로 보이는 이현종을 먼저 바라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느낌이었는데, 이현종으로서는 딱히 필요 없는 제스처라 할 수 있었다.
‘우리 수혁이…… 정말 중요한 질문이다!’
일단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더라도 수혁이 했다면 뭐든 인정해 줄 용의가 있었다.
아들이니까.
해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고, 그와 동시에 보호자가 답했다.
“네, 담당해 줬어요. 아직 성장기라 다이어트용은 아니고 그냥 단백질을 좀 많이? 대신 지방 많은 고기는 말고요.”
“흐음……. 그럼 평소보다 오히려 섭취량은 많았을 수도 있겠는데. 혹시 하루 끼니 수는 몇이나 됐나요?”
“어……. 네 끼, 다섯 끼? 근데 간식은 진짜 요거트나 아니면 닭 가슴살 정도였어요. 총칼로리는…… 적었을 텐데.”
“그렇군요.”
근육 만들 때 총 섭취하는 단백질량을 늘리는 것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십상인데, 사실 끼니 수 자체를 늘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인슐린 분비 횟수가 늘어나면 그만큼 근 생성 시간도 늘어서 그랬다.
‘그래 봐야 아직은 남성 호르몬이 피크 칠 나이는 아니라…… 근 합성이 떨어지기는 했겠지만.’
[확실히 흡수율이 떨어지는 종류의 설사입니다.]
‘응. 만성 설사 중에서도…… 자가면역과 연관이 있겠어. 남자인 것을 감안하면 베체트나 크론? 아니면 궤양성 대장염도 가능하지.’
[하지만 나이가 걸립니다.]
‘너무 어리긴 하지? 그럼 선천성 질환은 어떠려나?’
[그렇다고 하기엔 또 나이가 많아요.]
‘흐음.’
12살.
한창 애매한 나이였다.
성인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마냥 소아라고 보기도 그런.
그렇잖은가.
저 키에 몸무게만 적당하면 작은 성인으로 보일 게 뻔했다.
소아는 작은 성인이 아니다, 란 말이 소아과 교과서의 명제이지만.
글쎄, 12살도 그렇게 봐야 할까?
“흐음.”
수혁의 흐음에 맞춰 이현종도 고개를 갸웃했다.
보호자가 옆에 있다 보니 아주 노골적으로 아직 잘 모르겠단 티를 내진 않았지만.
하여간 바로 답이 나오는 케이스는 아니었다.
“일단 여기에 입원하시죠.”
“네네. 그럼 검사나 치료는 언제…….”
“우선 저희끼리 토의를 좀 하겠습니다. 그쪽 병원에서 보내온 자료도 같이 검토하고요.”
“아, 네. 감사합니다. 부탁드립니다!”
해서 두 부자는 환자를 병실에 옮긴 후 회의실로 향했다.
말이 회의실이지, 거의 두 부자의 토론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천재가 입을 열기 시작하면 나머지는 감탄사 외에는 딱히 할 말이 없어서였다.
“우선 그 병원에서 시도하지 못한 검사…… 대장 내시경부터 해 보는 게 좋겠는데요?”
“응. 베체트 가능성도 있으니 일단 인후두 검사도 하고. 혹시 해진 곳 있으면 조직검사도 시도해 달라고 하자고.”
“이건 이비인후과 의뢰하기 전에 일단 제가 먼저 볼게요. 병변도 없는데 하는 건 좀.”
“어, 어. 혈액 검사는 그쪽에서도 하긴 했는데 우리 쪽에서도 나가 보자고.”
“네, 그게 좋겠습니다. 종류는 어떻게 할까요?”
“full lap 긁고…… 그 외에는 지금부터 얘기해 봐야지. 우선 아까 오면서 내내 검진했잖아? 소견이 좀 어때?”
이현종은 수혁을 보다가 이내 다른 이들도 보기는 봤다.
얘들도 환자를 오는 내내 지켜보지 않았나.
수혁처럼 청진이나 타진 등은 안 했지만, 시진은 했다 이 말이었다.
혹 누군가 또 혜성처럼 좋은 아이디어를 던져 줄 수도 있었다.
특히 기대를 걸게 만드는 건 후광처럼 천장 등을 반사시키고 있는 안대훈이었다.
‘저놈이 진짜 열심이긴 하던데?’
아까도 그랬지 않나.
다른 놈들은 그냥 주워들으러 온 게 뻔히 보이는 데 반해 안대훈은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열심히 한다고 해서 다 수혁처럼 천재성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일단 빈혈은 없어요. 갑상선도 도드라져 보이거나 하지는 않고요. 하지만…….”
“항진증이 생기면 설사하고 체중감소 모두 보일 수 있지. 그래 호르몬은 확인해 보자.”
“네, 그리고…… 스테로이드 그러니까 부신 피질 자극 호르몬도 궁금하네요.”
“아, 그래. 그것도 문제가 있을 수 있지.”
“네. 그 외에는…….”
“뭐, 이 정도?”
둘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더니만 순식간에 일차적으로 나가야 할 거 같은 검사를 딱딱 정했다.
서거나 앉거나, 하여간 둘의 대화를 유심히 듣던 이들은 전부 받아 적거나 녹음하고 있었다.
이들이 검사를 그냥 내리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근거를 대면서 내고 있어서 그랬다.
이것만 복기해도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 뻔했다.
그렇게 대화를 마친 수혁과 이현종은 예의상 한 번 더 물었다.
“니들은 뭐 할 말 없냐?”
“다 같이 봤잖아. 눈알이 여기 몇 개니.”
마치 한 사람이 묻는 것같이 일치된 말투였다.
원래도 성격이 비슷해져 가고 있는 둘인데, 지금은 대화까지 나누고 난 참이라 더 그런 듯했다.
“오.”
“오.”
그때 안대훈이 손을 들었다.
“저…… 머리숱이 좀…… 적지 않나요?”
약간 뜬금없어 보이는 말을 하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