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9화 군 펠로우 (1)
“애 벌써 진단했다며?”
다음 날 아침, 어쩐지 개운한 얼굴로 나타난 이현종이 껄껄 웃었다.
수혁은 그런 이현종을 마주한 채 웃었다.
“네. 다행히…… 특징적인 소견이 있었어요.”
“나도 들었어. 그걸 가지고 특징적인 소견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긴 하던데…… 네가 그런 거 조합해서 사고하는 능력이 좋아서 가능했던 거야.”
“하하, 저야 뭐.”
“그래. 하루 이틀 된 일도 아니라 칭찬하기도 애매하네. 일단 이거 마셔.”
이현종은 캐리어까지 써서 들고 온 커피를 건넸다.
그렇지 않아도 아침 회진만 돌고 바로 카페로 달려가 부족한 카페인을 섭취하려고 했던 수혁이었던지라 바로 커피를 받아다 마셨다.
그러자 옆에서 입맛을 다시고 있던 안대훈이 입을 열었다.
저도 주세요, 뭐 그런 건 아니었다.
아무리 안대훈이 제정신이 아닌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 주었다고 해도 감히 진짜 기인 이현종에게 커피 사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저 교수님.”
“응? 너네는 인마 캡슐 타 먹어. 제빙기도 사 줬잖아. 그거 병원에서 안 된다고 해서 내 사비로…….”
“아뇨, 그 얘기가 아니라요.”
“아, 그래? 그럼 해 봐.”
그렇더라도 이현종은 살짝 찔리긴 했다.
명색이 센터장인데 주책맞게 수혁이 커피만 사 온 참 아닌가.
예전부터 밑에 애들 잘 챙겨 왔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그였던지라, 모양 빠진단 생각이 들었다.
어제 이기자 교수 위로하다가 분위기가 어쩐지 로맨틱해져서 정신이 좀 나간 탓도 있고, 오자마자 어제 두고 간 수혁이 볼 생각에 휘리릭 달려온 탓이기도 했다.
해서 좀 날카롭게 대했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자 다소 민망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그러자 안대훈이 자못 엄숙한 얼굴이 되어 입을 열었다.
“지금 이거 설마…… 블랙 그라운드입니까?”
“응?”
코를 벌름거리면서였는데, 원래도 썩 보기 좋은 얼굴이 아니었기에 이현종은 인상을 쓰며 되물어야만 했다.
일단 의학적인 질문이 아니어서이기도 했다.
탈모 전문가로서의 위력을 보여 준 이래, 나름 이현종은 안대훈을 좋게 평하기 시작했는데 이따위 말을 하고 있으니 한심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이런 이현종의 노골적인 표정을 마주하게 되면 어지간한 교수가 아니고서는 다 쫄기 마련이었다.
아니, 조태진, 신현태, 이기자, 이수혁 말고는 다 쫄았다.
하지만 안대훈은 기껏해야 레지던트인 주제에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교수님…… 이수혁 교수님은 신 원두 좋아하시는데 이게 대체 뭡니까.”
“어……?”
레지던트가 교수에게 이런 말투를 쓰면 경을 쳐야만 했다.
특히 상대가 이현종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딱히 이현종이 화를 내지 않더라도 주변에서 난리를 치지 않겠나.
도제식 교육이 일반화되어, 완전 수직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병원이니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이현종도 주변 레지던트도 감히 안대훈을 나무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정말인가? 내가 내 새끼 커피 취향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역시 주교님…….’
‘큰형님은 다르시다.’
이현종은 물론이거니와 지금 센터 내에 들어와 있던 레지던트들 모두 거의 수혁교이거나 그에 준하는 사람들뿐이어서 그랬다.
‘뭐 하는 거야?’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 자식이 어떻게 내 커피 취향을 알지?’
[늘 수혁만 주시하고 있는 놈이니까요. 표정만 봐도 알기 쉽죠. 수혁은 먹는 데 늘 진심이니까요.]
‘하긴, 그것도 그렇긴 하다. 소름도 돋고.’
늘 수혁을 주시하고 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좋아하는 상대가 그런다고 해도 좀 부담스러울 거 같은데, 안대훈이 그런다고 하니 짜증까지 났다.
이러한 수혁의 심정과는 별개로 이현종은 반성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수혁이가 선물해 줬던 원두…… 셨어.’
힌트도 줬는데 자신이 몰랐다는 자책이 들어서였다.
동시에 안대훈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 너라면 우리 수혁이를 보필할 자격이 있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도우마.’
비록 진짜 자식은 없지만, 수혁에 대한 애정만큼은 세상 어떤 아버지에게도 밀리지 않는 사람 아닌가.
석좌 교수가 되었으니 일흔까지는 병원에 있을 테지만 그 후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있겠다고 우기면 방법이 없지는 않기는 했다.
하지만 이기자 교수가 했던 말이 있어 불가능해진 지 오래였다.
‘평생 대학 병원에서만 환자 보려고?’
‘왜? 대학 병원에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환자들 오는 건데.’
‘병원에 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봐야지. 난 외국 나가고 싶어.’
‘아……. 봉사?’
‘그래, 제2의 인생은 그렇게 살아 보려고. 근데 자기가 석좌니까 나도 한 5년은 더 한국에 있다가 가야지.’
원래 계획은 정년 퇴임하자마자 나가려고 했었다는데 이현종 때문에 5년을 미루겠다고 하지 않나.
거기다 대고 난 죽을 때까지 수혁이 봐야 한다는 말을 어찌하겠나.
해서 그 전에 빨리 수혁이 자리를 공고히 만들어 줘야 한다고 다짐한 바 있었다.
안대훈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그 첫 번째 단추로 안대훈을 뽑았다.
“그래, 내가 주의할게.”
“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해서 이현종은 시건방진 소리를 쉬지 않고 늘어놓고 있는 안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기까지 한 후, 수혁을 바라보았다.
갈 데가 있었다.
“회진만 돌고 회의실 가자.”
“아……. 네. 원내 회의죠, 일단은?”
“응. 일단은 그래. 아……. 오늘은 쉽지 않을 거야.”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군 펠로우 TO를 위한 회의였다.
단어만 봐도 느낌이 오기는 할 텐데, 더 자세히 말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원래 의사는 일반적으로 딱 면허만 따고, 그러니까 면허만 따고 가는 것, 떨턴을 포함해 수련 도중 가는 것 그리고 전문의를 따고 가는 것 이렇게 세 가지 방법으로 군대에 갔다.
인턴을 안 했으면 공중보건의, 떨턴이면 중위 군의관, 전문의를 따면 대위 군의관으로 간다.
처음엔 이래도 되었다.
전문의 인력이 차고 넘치는 군 병원의 진료 역량은 어지간한 2차 병원보다 좋았으니까.
‘근데 요새…… 요새 전문의가 완전한 전문의라고 하기는 좀 어렵지.’
하지만 수련 환경이 점점 더 체계화되면서 또 원내 의료 사고에 민감해지면서 오히려 레지던트들이 무언가 해 볼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들고 있었다.
게다가 내과는 3년제로 바뀌면서 예전의 전문의랑은 그 위상이 바뀌기도 했다.
비단 내과뿐 아니라 여러 수술 과도 마찬가지였다.
전문의를 따면 그 과정에서 기본적인 수술은 다 할 수 있었던 예전과는 달리 요새는 펠로우를 하지 않으면 좀 어려운 상황이 된 지 오래였다.
해서 나온 것이 군 펠로우 제도였다.
군대에 가기 전에 병원에서 펠로우까지 하고, 대신 군 병원급으로 가게 되는 제도였다.
말만 들어도 꽤 좋은 제도이지 않나.
당연히 각 과별로 이 TO에 대해 꽤나 민감했다.
“준비됐어?”
이현종은 회진을 돌고 난 후, 수혁에게 물었다.
어디 외래 가는 것도 아닌데 넥타이까지 다 하고서였다.
마주한 수혁도 차림새는 비슷했다.
완연한 정장 차림에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네. 환자들도 다 안정적이에요.”
“종이는 챙겼지?”
“네, 설문지 챙겼습니다.”
“그래, 근데 너 옷 이쁘다?”
“아 이거요. 왕팡이라고 싱가포르에서 같이 옷 봐준 애가 있어요.”
“그래? 그래, 가자.”
왕팡이라는 이름에서 쿠팡 정도만 유추할 수 있는, 의학적인 것 외에는 머리가 굳어 버린 이현종이었기에 추가적인 질문은 없었다.
아마 조태진이 들었다면 혹시 여자냐, 분위기 좋냐 등의 질문을 했을 텐데.
이현종은 그저 군 펠로우만 생각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수혁도 딱히 왕팡과 잘될 거라는 기대 따위는 없어서 그저 빨리 움직이기만 했다.
회의실 내부는 아직 5월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가 후끈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군 펠로우 여부는 그만큼 모든 과에 있어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자자, 조용히들 하시고…… 자리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원장 신현태도 나름 긴장한 얼굴이었다.
평소라 해도 긴장이 되었을 텐데, 이번엔 하나 큰 차이가 있어서였다.
‘센터에서 군 펠로우 요청하는 건 처음인데……. 아니, 애초에 펠로우가 가능하기는 한가…….’
펠로우란 결국 분과 전문의가 되기 위한 과정을 뜻하는 거 아닌가.
통합진료센터는 아직까지 태화에만 있는, 그중에서도 단 두 교수만 배정되어 있는 센터였다.
위에서는 뭐가 문제냐고 하면서 일단 회의에 참석시키라 했지만, 신현태로서는 저어되는 면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뭐……. 이번엔 나도 편 못 들어준다고 했으니까 알아서 하겠지.’
신현태는 잠시 이현종과 수혁을, 그러니까 다른 과 교수들도 죄다 쳐다보고 있는 둘을 보다가 말을 이었다.
“다 오신 거 같군요. 일단 외과부터 갈까요?”
“네. 저희는 일단 세 자리 넣어 보려고 합니다.”
“세 자리?”
“네. 간담췌, 상부 위장관, 대장 항문입니다. 칠성하고 아선에서도 동일하게 넣을 거 같기는 한데…… 심사는 자신 있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하죠.”
변화 없는 과들은 딱히 문제가 없었다.
아니, 내과를 제외한 과들은 다 그랬다.
어차피 여기서 승인이 된다 해도 최종 권한은 국방부에 있기 때문이었다.
주로 칠성, 아선과 경쟁을 하게 되었는데, 최근 태화의 명성이 다시금 둘을 제쳐 두고 달리고 있어서 유리할 터였다.
“자, 소화기내과.”
“네……. 음. 저희는 4명입니다. 국방부 측에서 이번에 군 검진 사업을 위해 내시경 가능한 전문의를 대거 요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내과였다.
소화기내과 교수 또한 이현종과 수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분과와 차이가 있다면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라는 점뿐이었다.
설마하니 국방부에서 요청한 TO가 잘릴까 싶었다.
“네, 다음은 심장.”
“저희도 요구가 있어서요. 둘입니다.”
심장도 비슷했다.
하지만 나머지는 좀 애매했다.
호흡기도 신장도, 알레르기, 류마티스 등도 국방부에서 딱 짚어 주진 않아서 그랬다.
“먼저 저희 과에 대해 말씀드리기 전에…….”
그중 총대를 멘 것은 놀랍게도 과장 김문재였다.
“절대 오해하진 마십시오. 저는 진짜 궁금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예전과는 달리 굉장히 조심하고 있었다.
이제는 위에서 얼마나 수혁을 그리고 통합진료센터를 신경 쓰고 있는지 알고 있어서였다.
또한 수혁의 실력이 감히 자신이 질투할 만한 정도도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동시에 신현태나 이현종이 수혁만 관여되면 체통을 잃고 지랄한다는 것까지도 몸소 체험한 바 있었다.
그래서인지 김문재는 본격적으로 얘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오해 말라는 소리만 벌써 여러 번 하고 있었다.
“아, 알겠으니까 빨리해 봐. 답답해 뒤지겠어.”
성질 급한 이현종이 이 말까지 하고 나서야 말을 이어 나갔을 지경이었다.
“네, 이번에 통합진료센터에서 군 펠로우랑 펠로우 모두 신청한다고 들었습니다. 근데…… 문제가…… 펠로우 과정을 신설하기 위해서는 우선 주관하는 학회가 있는 분과여야 합니다. 그 학회가 있는지. 없다면 추계까지 열 수 있는지. 또 지원할 사람은 있는지 여부가 궁금합니다. TO가 났는데 중간에 어그러지면……. 다른 분과에 지원할 수 있었던 사람 하나가 피해를 보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