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화 군 펠로우 (2)
김문재 교수는 말투만 조심한 게 아니라, 질문 자체도 조심스레 만든 모양이었다.
주변에 모여 있는 이들도 딱히 이현종이나 신현태에게 반하는 이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친 원장파 또는 친 수혁파로 분류되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그런가, 몇몇은 아예 얼굴을 딴 데로 돌리고 있었다.
혹 이현종이 불쾌해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새끼들.’
하지만 이현종은 딱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원래 TO 문제가 이렇지 않나.
한정된 자원을 두고 싸워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원래 친했던 이들도 여기서만큼은 얼굴을 붉혀야 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통합진료센터는 당장 작년까지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곳이니만큼 굴러온 돌이란 느낌이 정말 강하게 들 터였다.
게다가 질문 자체도 꽤 합리적이었다.
아마 이 회의를 두고 몇 날 며칠을 고민한 모양이었다.
“네, 질문 잘 들었습니다.”
해서 이현종은 일부러 웃었다.
나 화 안 났다고 말해 주기 위함이었다.
별 소용은 없었다.
‘하……. 웃네…….’
이현종이 워낙에 기인으로 유명하다 보니 이 인간이 평범한 반응을 보이는 게 더 이상하게 느껴져서 그랬다.
특히 어설프게 이현종을 아는 사람일수록 더 그렇게 느꼈다.
그러니까 김문재나 다른 분과장들처럼 원래부터 이현종파가 아니었던 이들은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을 문질러 없애기 바빴다.
하여간 이현종은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할 말을 읊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성질이 급한 사람이어서 그랬다.
“일단 추계 학회는 열 생각입니다. 통합진료학회라고 이미 사단 법인도 신청을 해 두었어요.”
“어……. 그렇습니까?”
어벙한 얼굴로 질문을 해 온 것은 신현태였다.
최근 관계가 소원해져서는 아니었다.
당장 저번 주 주말에만 해도 같이 골프 치고 오지 않았나.
그때도 신현태는 이현종이 센터 군 펠로우 신청을 해 놨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괜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던 것은, 어차피 안 될 건데 굳이 얼굴 미리 붉힐 거 없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한데 사단 법인을 신청해 놨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저 형이…… 진료랑 골프, 먹는 거 말고는 다 귀찮아하는 양반인데…….’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 누구라도 이현종처럼 진료에 진심이 되면 다른 일에도 관심을 두기는 어려울 터였다.
근데 사단 법인을 만들어?
말이 안 된단 생각이 들었다.
어찌나 강하게 들었는지, 나름 과장을 거쳐 원장까지 해 먹게 된 신현태임에도 불구하고 불신의 표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났을 지경이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원장님?”
이현종은 기분 나쁘단 얼굴로 그런 신현태를 마주했다.
그제야 아차 싶었던 신현태는 급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사단 법인이라는 게…… 쉽게 개설할 수 있고 뭐 그런 건 아니잖습니까?”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의사들, 그러니까 교수들이 수십은 족히 넘지만 그중에서 법인을 만들어 본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정말이지 다들 전공 바보들이었다.
전공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얘기였다.
그럴 필요도 없던 시대였던 만큼, 그중에서도 게으른 편인 이현종이 그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쉽지는 않은데 뭐 그걸 굳이 직접 할 필요가 있나요.”
“네?”
“위에서 도와주셨어요. 위에서.”
신현태는 그렇게 믿었다.
그게 맞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법인이 개설 안 된 건 아니었다.
이현종이 김다현 측의 도움을 받아 정말이지 이보다 깔끔할 수 없게 만들어 두었다.
“아……. 위에서. 그럼 법인은 아무 문제 없겠네요?”
“어, 그렇죠. 나름 직원도 하나 뽑았습니다.”
신현태나 다른 이들 모두 위에서, 그러니까 태화 생명이나 바이오에서 도왔다는 말에 법인 개설까지는 납득했다.
하지만 벌써 직원을 뽑았다는 말에는 다시 기함했다.
사실 학회라는 곳이 돈이 많을 수가 없는 곳이지 않나.
어지간한 분과 학회들도 직원이 하나 있거나 아니면 파트 타임으로 쓰고 있을 지경이었다.
“직원이요? 학회 회원이…….”
“전문의 회원은 다섯이죠. 아직은.”
“전문의 회원이 다섯……? 왜 다섯이지? 그리고 전문의 말고 다른 회원이 있어요?”
말이 어째 점점 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회원이 단둘이어야 정상이지 않나?
근데 왜 다섯이고, 심지어 그 뒤에 ‘은’이 붙는단 말인가.
원장을 비롯한 모든 내과 교수들이 미심쩍다는 얼굴로 이현종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제는 남의 집안일이라 여기고 딴청을 피우던 다른 과 교수들도 그랬다.
“여기 명단입니다.”
그때 수혁이 몸을 일으켜 신현태에게 파일 하나를 건넸다.
학회 명단이 적힌 파일이었다.
얼핏 봐도 회원이 둘이라기엔 너무 명단이 빼곡해 보였다.
“회장 이현종, 수련이사 이수혁…… 총무이사 조태진? 학술이사 우창윤? 재무이사 박국진? 아니, 이게.”
조태진은 솔직히 여기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거 없는 놈이긴 했다.
‘이 새끼는 수혁이 일이라면 뭐…… 버선발로 뛰어나올 놈이잖아.’
주책도 이런 주책이 없지 않나.
어찌나 수혁이를 챙기는지 얼마 전에는 조태진 아내에게 이런 전화까지 받았을 정도였다.
조태진 장인이 끗발 날리는 사람이고 또 신현태 측도 비슷하다 보니 간혹 집안 모임을 가지곤 했으나, 정말이지 그런 전화를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더랬다.
‘원장님, 이런 말씀 정말 죄송한데…… 우리 남편 혹시 병원에서 바람피워요?’
‘바람? 무슨…… 그게 대체 무슨 소리예요, 제수씨.’
‘이수혁이라고 저장된 사람, 아무래도 여자 같아요.’
‘수혁이? 수혁이 남잔데.’
‘아니 그럼 게이야?’
‘응?’
알고 보니 싱가포르 여행 계획 짜면서 ‘우리 수혁이♡’라고 해 놓고는 거의 데이트 코스를 짜 놓았던 것이었다.
‘미친놈이.’
코스 중에는 프러포즈라도 해야 본전을 뽑을 수 있을 것 같은, 정말이지 비싼 식당도 있었다.
하여간 그만큼 조태진은 수혁에게 진심이었다.
뜬금없는 건 우창윤이었다.
“여기 우창윤…… 학술이사라고 적혀 있는 건 본인 동의는 받은 건가요?”
아마 다른 사람이 들이민 서류라면 이런 질문은 필요치 않았을 터였다.
그렇지 않나.
세상 어떤 의사가 남의 동의도 없이 학회에 편입을 시킨단 말인가.
하지만 상대는 이현종이었고, 그에 못지않게 이상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 이수혁이었다.
이 둘이 함께라면 그 어떤 환자가 와도 두렵지 않을 수는 있겠으나, 그 어떤 말을 해도 이상하게 들리기도 했다.
“동의받았지. 입회비도 받았는데. 평생 회비도 받고.”
“네? 아니……. 그 양반 지금 내과 학회 일도 하고 내분비 학회 일도 하고…… 병원에서는 기조실장인데 이걸 또 한다고요?”
“어, 수혁이랑 가서 얘기 잘 했어.”
이현종은 신현태를 보며 윙크를 해 보였다.
그제야 신현태는 얘기라는 게 평범한 얘기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협박했구나.’
하여간 이현종을 세기의 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박국진까지 하면 벌써 전문의, 그것도 학계에서 꽤 이름이 알려진 교수들만 다섯이었다.
충분한 수준은 아니었으나, 이 정도면 나름 어디 가서 우리 학회 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문제는 이 뒤로도 명단이 꽤 빼곡하다는 점이었다.
“이건…… 안대훈, 우하윤…… 전공의들이잖아요?”
“어, 전공의 서른 명. 우리는 해외 회원도 있어. 국제 학회야.”
“해외……? 왕팡이랑 양웨이? 이거 실존하는 사람은 맞아요?”
“싱가포르 국립 병원에 있는 애들이야. 당연히 실존하지. 아까부터 말이 영 이상하네.”
“거…… 아니, 이게.”
전공의들을 동원해서 학회 인원수를 채웠을 줄이야.
심지어 외국인까지?
신현태만 혼란스러워진 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랬다.
질문하면서도 벌써 이걸 만드는 게 가능할까 했던 김문재는 아예 아까부터 입을 쩍 벌리고만 있었다.
숨은 쉬고 있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왜 뭐 문제 있어요? 학회는 발족했잖아요. 국가에서 인정할 만한 규모고 거기에 해외 회원들도 있어서 국제 학회입니다. 좋아할걸.”
“그…….”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말이 되기도 했다.
하여간 우리나라 정부 사람들치고 외국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단 말인가.
아무것도 아닌 것조차 외국물 먹었다고 하면 괜히 더 있어 보인다 판단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아마 왕팡과 양웨이라는 의사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만, 이 둘이 커다란 힘이 되어 줄 것이 뻔했다.
“그리고 추계 학회는…… 이수혁 부센터장?”
“네, 센터장님.”
이현종은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신현태를 앞에 둔 채 수혁과 쿵짝을 맞춰 유에스비를 발표용 컴퓨터에 꽂았다.
그러자 곧 윙 소리가 나더니 빔프로젝터에 의해 화면이 하나 떴다.
통합진료학회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나름 돈 좀 썼는지 상당히 이쁘게 생긴 로고였다.
“로고도 있어요?”
“당연히 있지. 하여간 추계 학회 계획입니다.”
“네, 근데 공적인 자리니까 존대를 하려면 제대로 해 주셨으면…….”
“내가 반말했어?”
“네, 지금도.”
“알았어요. 주의할게.”
“음.”
신현태는 다른 과 교수들 눈치를 보다가, 다들 이현종이니까 하는 수 없단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우리 형 기행이 우리 과에서만 유명한 게 아니지.’
약간 쪽팔릴 뻔했는데 그냥 다들 그러려니 하고 있으니까 오히려 괜찮았다.
그렇게 신현태가 마음을 추스르는 사이 수혁의 짤막한 발표가 이어졌다.
“첫 학회이니만큼 토요일 오후에만 진행하려고 합니다. 축사는 태화 의료원 신현태 원장님께서 해 주시기로 했고요.”
“응? 부센터장님. 저는…….”
“해 주실 거죠?”
“그…….”
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의 마음을 흔들 만한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내가 저 얼굴을 보고 아니라고 한 적이 있나.’
하여간 신현태는 수혁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 채 고뇌했다.
이현종 하는 꼬라지 봐서는 좀 더 애가 타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는 수혁이였다.
“해야지.”
“네. 감사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수락을 하고 난 후였다.
“첫 세션은 저희 센터에서 경험한 증례에 대해 안대훈, 우하윤, 저, 이현종 센터장님 이렇게 넷이 돌아가며 발표할 예정입니다.”
“다음 세션은요?”
“다음 세션은 센터의 국제 성과에 대한 발표입니다. 싱가포르 국립 병원의 장 교수님과 두바이 병원의 알 교수님이 와 주시기고 했습니다.”
“아……. 진짜 국제 학회는 국제 학회구나. 근데 이거…… 돈 좀 들겠는데…….”
“스폰서로 두바이 왕자님하고 싱가포르 리홍이, 화이자 제약, 태화 생명, 태화 바이오가 나서 주기로 했습니다. 모든 연사님들 숙소와 비행기는 전액 지원하며, 무엇보다 첫 학회에 한해 학회 참가비도 무료입니다.”
“오.”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운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신현태는 놀라운 것을 넘어 경탄에 빠졌다.
‘우리 수혁이가 진짜 거물은 거물이 됐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