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601화 (601/1,303)

601화 학회 창설 (1)

이현종은 아까와는 달리 그저 자랑스럽다는 얼굴로 수혁을 바라보고 있는 신현태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한 점 흔들리지 않는 애정만 느껴졌다.

‘너도 너다, 진짜.’

이현종조차 자기 안건이 걸린 회의실에서는 체통을 지키고 있거늘.

명색이 원장이라는 인간이 회의 도중에 개인적인 애정을 뿜뿜 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아빠.”

“응, 왜.”

“내 머리 쓰다듬고 있어요.”

“에그머니.”

하나 정신을 차려 보니 이현종 또한 오른손으로 수혁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는 깜짝, 정말이지 본능이 이성을 억누르는 것도 모자라 스스로 손까지 움직였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며 손을 뗐다.

그 바람에 잠시 회의는 중단됐다.

사실 더 이어 나가는 것도 의미가 없는 상황이었다.

제일 문제가 될 거라 여겼던 통합진료센터의 군 펠로우 충원 건이 생각보다 건실하지 않나.

이대로면 호흡기나 알레르기 또는 류머티즘이나 감염, 혈종 등 군 병원에서의 필요성이 다소 떨어지는 분과의 펠로우가 잘렸으면 잘렸지, 저쪽은 별 걱정할 것도 없을 거 같았다.

“부센터장 이수혁입니다.”

게다가 이현종이 마이크를 그대로 놓은 채 입만 벌리고 있어서 회의가 이대로 끝나겠구나 하던 상황이었다.

그때 수혁이 이현종이 놓았던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그리곤 자기 소개를 했다.

불과 1년 전 같았으면 다들 이 새끼는 뭔가 해도 될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수혁은 레지던트가 아니라 교수였고, 그중에서도 부센터장이라는 꽤 큼지막한 보직도 맡고 있었다.

심지어 아까 말한 스폰서들은 전부 이현종 백이 아니라 수혁의 백들이었다.

“음.”

“으음.”

명실공히 태화 의료원의 떠오르는 샛별이자, 대세라 할 수 있는 수혁의 등장에 다른 과 교수들까지 집중했다.

신현태가 집중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학회…… 외에 또 하실 말씀이 있으신 거죠?”

물론 이현종보다는 이런 쪽으론 월등히 나은 인간이다 보니 원장으로서 해야 할 말도 잊지는 않았다.

수혁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루다의 기대감 어린 눈빛을 받아 가면서였다.

바루다는 수혁이 여러 재능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사람 홀리는 일에 재주가 아주 뛰어나다고 보고 있어서였다.

어째 사람 심리나 분위기는 잘 읽지 못하는 거 같은데 자기 뜻대로 설득하거나 움직이는 일에는 가히 천재적이었다.

[소시오패스……?]

‘닥쳐.’

바루다는 나름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이런 결론을 냈고, 수혁은 짤막한 대꾸로 바루다의 결론을 묵살했다.

“네, 이 자리를 빌어 공지하고픈 내용이 있어서요. 오래 걸리진 않으니…… 다들 괜찮으실는지요?”

“네, 뭐…… 어차피 생각보다 회의가 빨리 진행되어서요.”

수혁의 요청에 신현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딱히 양해를 구하지 않았더라도, 원장 직권이라도 사용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떠들게 하고 싶은 게 신현태의 심정이었다.

하여간 신현태는 레임덕이 오려면 아직 한참 먼 원장이었고, 그의 대척점에 선 교수들조차 지금 다른 의견 개진하는 건 말도 안 된다 생각하고 있던 상황이어서 수혁은 잡음 하나 없이 말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네, 다름이 아니라…… 이번 주 금요일 저녁에 학회 창설 기념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아……. 진짜 제대로 하네. 아니, 제대로 하는군요?”

창설 기념회라니.

이런 건 어지간한 분과 학회가 아니고서는 하지 않는 일이었다.

사실 학회라는 게 어떻게 보면 별거 없는 일이긴 했다.

그냥 마음 맞는 학자들끼리 모여서 이제 우리 정기적으로 모여서 대화도 나누고 합시다 하면 그게 학회 아닌가.

하지만 나라에서 지원을 받고 또 회원들을 모집해서 학회비를 받아 운영하려면 그럴싸한 모양새를 갖추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학회 연다고 할 때까지만 해도 그냥 일회성 아닌가 했는데…….’

그런 학회는 어쩔 수 없이 남들이 하는 건 다 해야 했다.

그래야 학회에 소속된 인원들도 으쌰으쌰 힘을 낼 수 있지 않겠나.

‘진심이구나, 우리 수혁이. 그럼 내가 도와야지.’

물론 보통 일은 아니었다.

특히 의학 관련한 학회는 더더욱 그랬다.

학회 자체가 빡세다기보다는 본업인 의사가 너무 힘든 직업이어서였다.

진료에 교육에 연구에 할 거 다 하고 나면 녹초가 되기 마련인데 거기에 학회 일까지 해?

괜히 학회 기둥이라 평가받는 큰 병원 교수 중에 이혼하거나 애초에 결혼하지 않은 이들이 많은 게 아니었다.

가시밭길이란 얘긴데, 동시에 또 명예로운 길이기도 했다.

어차피 수혁은 의학이랑 결혼한, 그러니까 평생을 이현종처럼 독수공방할 사람 아닌가.

응원해 주기로 했다.

“가야겠네요. 축하 인사드리러.”

“네, 원장님뿐 아니라, 이 자리에 계신 모든 교수님들을 초대합니다.”

“아……. 내과 관련 학횐데, 그래도 됩니까?’

“네. 말 그래도 기념회라서요. 식사가 주를 이룰 예정입니다.”

“아……. 식사를? 대강당에서 하나요?”

신현태는 이상하다 하면서 말을 이었다.

원래 원장이 대강당 예약 상황까지 다 꿰고 있는 건 말이 안 되지만, 우연히 이번 주 예약 상황은 알고 있어서였다.

이비인후과에서는 나름 큰 학회인 태화, 아선, 칠성 집담회가 있는 날이지 않나.

거기 말고는 이 많은 인원이 들어갈 만한 곳이 없었다.

일단 여기 소속된 레지던트들만 해도 수십 명이지 않나.

“아, 아뇨. 모임은…… 인터컨티넨탈 호텔 뷔페 전체를 빌렸습니다. 거기서 할 겁니다.”

“으응?”

이번에도 이상하다 싶었다.

아니, 잘못 들었겠거니 싶었다.

뷔페를 빌리다니?

저 정도 패기는 내과에서 가장 큰 학회이자 근본이 되는 학회인 내과 학회도 부릴 수 없는 짓이었다.

아니, 부리려면 부릴 수는 있겠지만 스폰서로 나서야 할 제약 회사니 기구 회사니 뭐니 하는 곳에 회장단 전부가 가서 머리를 조아려야 할 터였다.

‘그래도 요새는 어려울 거 같은데…….’

해서 말이 되냐는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있으려니, 수혁이 말했다.

다른 교수들도 비슷한 얼굴이었기에 수혁은 회의실 전체를 돌아보고 있었다.

“두바이 왕자님이 스폰을 해 주셔 가지고요. 원래 저희도 그냥 강당 빌려서 도시락 까먹으면서 두런두런 얘기나 하려고 했는데…… 그럼 안 된다고 가까운 제일 좋은 호텔이 어디냐고 하시더니 갑자기 일이 이렇게 됐습니다.”

“아……. 그 왕자님.”

두바이 왕자면 이해할 수 있었다.

기름 부자 아닌가.

세상에서 제일 돈 쓰기 좋은 부자들일 터였다.

그냥 가만히 있을 뿐인데 돈이 막 들어오지 않나.

심지어 앞으로도 그럴 게 뻔했다.

옛날 교과서에는 분명 석유라는 게 2020년쯤이면 거의 고갈될 거라 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고갈은커녕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도 자꾸 늘어 가고만 있었다.

“네, 그래서 사실 저희 학회 인원보다 자리가 너무 많아졌습니다. 스폰서분들도 가능하신 분들 초청하고 있기는 한데, 대부분 외국계 회사들이라 직접 오는 건 불가능하셔서요. 어차피 식사 공짜고, 학회라고 해 봐야 아직은 저희 병원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니 친목 도모한다 치고 오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혁은 말을 하면서 두바이 왕자의 말을 떠올렸다.

‘관대함을 보이게. 그럼 사람들이 따를 것이야.’

약간 「300」에 나오는 대사 같기도 하고 해서 오글거릴 수도 있는 말이었으나, 말하는 사람이 기름 부자 왕자다 보니 느낌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지금도 그의 관대함에 취한 상황 아닌가.

그냥 학회 창설 기념회 한다고 알리려 전화만 한 건데 난데없이 호텔 식당 전체를 빌려다 줄 줄이야.

덕분에 수혁은 예상치 못했던 호텔 지배인의 전화까지 받을 수 있었다.

“아……. 그럼 꼭 저희 아니더라도 가능한 사람이 가면 됩니까?”

“네. 과 내에 공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병동에도 해 주세요. 여사님들도 오셔도 좋습니다. 이송 요원분들도요.”

해서 수혁은 그의 조언을 따라 비단 교수뿐 아니라 전공의나 간호사 등 병원 내 모든 사람을 다 부르기로 했다.

“애들이 좋아하겠네. 전공의 애들, 안 그래도 금요일 저녁 병원 밥은 맛없다고 뭐라 하던데.”

“그러니까, 하하.”

분위기를 보아하니 교수들은 그래도 자존심도 있고, 사실 이런 기회 아니더라도 호텔 뷔페 정도는 먹을 일이 있다 보니 직접 올 생각을 없어 보였다.

사실 호텔 뷔페로 대학 병원 교수를 꼬신다는 게 이상한 일이긴 하지 않나.

아마 수혁이나 이현종 둘이 이 기념회를 계획했다면 여기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김다현 사장은 달랐다.

‘기왕 호텔 빌린 거…… 무대도 꾸미시죠.’

태화가 유일하게 손을 안 뻗치고 있는 분야가 연예,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콘텐츠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도 다 옛말이었다.

지분 투자는 알아서 하고 있었다.

직접 이름을 걸고 하지 않을 뿐이었다.

혹 영향력 있는 개인이 사고 치게 되면 태화의 이름에 암운이 끼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는데, 하여간 연예인들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아, 그리고 축하 공연도 있을 예정입니다.”

“공연? 설마 두 분이서 춤 춥니까?”

“아뇨, 저희가 하면 공연이 아니라 민폐라…… 화이트핑크분들께서 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으응?”

그 말에 몇 번 외과 교수들이 고개를 돌렸다.

수술할 때 맨날 하는 짓이 차트 눌러서 노래 틀어 두는 것 아닌가.

그러다 보니 어지간한 젊은이들보다 오히려 외과 교수들이 요즘 노래나 가수들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화이트핑크라고 하면 톱이지 않나.

“진짜로 그 화이트핑크?”

“네. 감사하게도…….”

“아니, 그…… 활동 바쁘지 않나……?”

“아시는 분이 있어서 어떻게 연결이 됐습니다.”

“거…… 그럼 저도 가도 돼요?”

“네, 물론입니다.”

“사인도 해 주시려나.”

교수들 중 광팬들이 있는지 몇몇의 얼굴이 상기됐다.

그것만으로도 꽤나 거대한 반전이었으나, 아직 수혁의 말은 끝나지 않은 참이었다.

“아, 그리고 이런 것까지 말씀드려야 되나 싶기는 한데…….”

“말씀하시죠, 부센터장님.”

“이기원 원내대표님, 김다현 사장님, 남지영 사장님, 주한 싱가포르 대사, 주한 아랍에미레이트 대사님 그리고 한국 화이자 대표님도 와 주실 예정입니다. 혹 아시는 분이 계시면 이 기회에 인사 나누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습니다.”

“오.”

이번엔 또 다른 무리의 교수들이 술렁였다.

아까보다 아무래도 숫자가 훨씬 많았다.

대학 병원 교수들이라는 게 주로 어떤 존재들인가.

성급한 일반화일 수도 있겠으나 대개는 돈보다 명예를 택한 사람들이라고 보면 되었다.

다들 생각하는 명예가 다르다 보니 다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사회 명사들, 그러니까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과의 친분을 원하는 비율이 꽤 높았다.

“그, 그래요? 그럼 저도…….”

“저도…….”

“하하, 이거야 원. 이수혁 부센터장님 끗발이 장난이 아니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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